10월[十月]
초 1일
새벽. 아침 일찍 성북의 아버지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윤동접이 임천접과 함께 관포(冠浦) 칠산(七山) 읍내에 진을 치고 호남을 막으려 하며, 또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고 운운하였는데, 세상이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매우 심하게 크게 어지러워졌는가”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이른 아침 후에 요곡에 가서 춘악와의 시제(時享)를 보았다. 해질 무렵 집에 왔다. 날이 매우 맑았다.
초 2일
아침 일찍 구름이 많이 끼었다. 비가 오려 했다. 요곡에 가서 경구(警九)를 만났다. 오후에 올 때 흰 종이 6장을 가지고 왔는데, 경구의 『세계(世系)』 2권을 뽑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날씨가 맑았다. 이른 밤에 어머님을 모시고 처와 함께 요곡의 종형 집으로 갔는데, 요곡 앞에 이르기 전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구름이 혹 많이 끼기도 했다.
초 3일
새벽과 밤에 부슬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서 보니,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다. 하루 내내 부슬비가 내렸으며 혹 반은 뿌리기도 했다. 바람이 혹 불기도 했다. 해가 간간히 맑기도 하였다. 오후에 요곡에 갔다. 『세계(世系)』를 초록한 것 2첩(牒)을 경구씨 집에 전해주고 왔다. 비로소 『논어』 제3권을 읽었다.
초 4일
날씨가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마치 창밖 푸른 대숲에서 부는 듯 했다. 해질 무렵 요곡의 박동식(朴東植)이 와서 말하기를, “남북접의 도인들이 합세하니 일본 군사 스스로 물러났다”라고 운운하였다. 밤에 처음으로 호박을 땄다.
초 5일
하루 내내 맑았다. 조금 추웠다. 아침 일찍 첫 서리가 하얗게 내려서 촉촉하였다. 오전에 용동(龍洞)의 이선비(李雅)가 와서 함께 갔다.
초 6일
하루 내내 맑았다. 조금 추웠다. 아침 일찍 서리가 하얗게 내려 촉촉하였다. 집에서 찰벼 3석 여를 타작하였다. 오시에 종형이 말하기를, “오늘 각 포(包) 중에서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을 막론하고 혹 돈과 곡물을 가진 자는 잡아두고, 법으로 몇 석·몇 꾸러미를 유치하도록 하여 나중에 군량으로 삼는다”라고 운운하였다. 근래에 도풍(道風)이 다시 불었으니 어찌 난이 장차 일어날 싹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땅거미가 질 무렵 서산에 구름의 기운이 서렸다. 밤이 깊어 비가 쏟아졌다.
초 7일
새벽. 새벽과 밤에 비가 조금 뿌렸다. 아침이 지나 바람이 불었으며 비가 점점 쏟아지다가 곧바로 멈추었다. 오후에 용동의 이종대(李鍾大)가 와서 나를 만나고 이윽고 읽은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초 8일
새벽. 이종대가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대학(大學)』을 읽었다. 날씨가 매우 맑았으나, 아침 일찍 구름이 껴서 흩어지지 않았으며, 바람이 불기도 하였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해질 무렵 조금 추웠다. 밤이 될 무렵 성북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마을의 이택현(李宅鉉)이 오늘 아침 스스로 어색해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취하여 말한 것에 대해 오해를 풀었으면 한다’라고 운운”이라고 하였다. 지난 7월 22일 저녁 함부로 내게 말한 일을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스스로 풀어야한다. 운운”이라고 하신 것이다. 내 마음은 스스로 기약하면서 말하기를, “제나라가 강하고 노나라가 약했어도 노나라가 이기는 것은 필연이다”라고 하였다. 밤에 종조부인 최용주 (崔容柱)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했다.
초 9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이종대와 함께 용동에 갔다. 오시에 식사를 한 후 이선비(李雅)의 선산에 올라서 살펴보았다. 또한 농정동(望井洞)에서 작별하였으며, 나는 홍산 처갓집으로 갔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하루 내내 그러하였다. 밤에 선동 처갓집에서 머물러 잤다. 그때 밤에 도인 23 명이 처갓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초 10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아침 일찍 도인들이 선동 앞산의 평지에서 진을 치는 훈련을 하는 것을 보았다. 진을 치는 것을 익힌 후 서천(舒川) 길산(吉山)으로 간다고 하고, 도회(都會)에 대하여 운운하였다. 오후에 박봉규(朴鳳圭)와 함께 시사(時事)를 같이 논하였으며, 헤어져서 집에 도착하였다. 그때 박무곡(博武谷) 주점 앞에서 먼저 송정(松亭)의 이도사(李都事)와 용동의 이오위장(李五衛將)을 만나 함께 가면서 이야기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도착하였으며, 밤에 총 쏘는 소리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크게 소리를 질렀으며, 원모촌까지 갔다. 나는 마을의 아이와 함께 가서 조령(烏嶺)에 올라서 그것을 바라보았으며, 끝내 무엇을 훈련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잤다. 원래 단정(丹亭)의 도인 수 명이 사곡에 들어와서 소란을 피워서 이 때문에 시끄러웠다.
11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해질 무렵 구름이 끼거나 혹은 흩어졌다. 밤에 바람이 불어 끊이지 않았다. 이 마을 도인이 허문의 염치명의 아들을 잡아갔다고 운운하였으며 시끄러웠다. 땅거미가 질 무렵 염치명이 우리 집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죄가 없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은 일이 있는가?”라고 운운하고 갔다. 밤에 바람이 조금 불었으며 추웠다.
12일
날씨가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4종형 병문(炳文)씨의 차녀의 혼례를 보았으며, 돈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또한 신랑 김동현(金東鉉)을 만나서 이른 밤에 함께 놀다가 왔는데, 할아버지 야헌께서 깜짝 놀라셨다. 밤에 달빛이 밝았다.
13일
아침 일찍 서리가 하얗게 내려 촉촉했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14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도인 수만 명이 임천 읍내에서 기포(起包)했다. 이들은 각 포에서는 일으키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다투어 일어난 것이라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병문의 딸이 처음으로 시집으로 들어가면서 쇠고기전과 고기를 보냈는데, 명일에 시제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15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바람이 미세하게 불고 안악와공(安樂窩公)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일신재공(日新齋公) 3위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해질 무렵 날이 매우 맑았다. 오시에 요곡에 가서 신씨(申氏)의 묘에 제사를 지내려 할 때, 대접주인 이종필(李鍾弼)이 도인 수천 명을 신장(新場)에서 이끌고 임천 읍에서 열릴 도회로 가려던 중이었다. 잠시 요곡을 지날 때에 총을 몇 방 쏘니 그 소리가 가락암에까지 들렸는데, 군대를 이끌고 갔다. 밤에 비가 조금 뿌리다가 곧 그쳤다. 이른 밤에 달이 밝았다.
16일
날씨가 맑았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 촉촉하였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조금 추웠으나 오히려 맑았다.
17일
새벽. 아침 일찍 구름이 많이 끼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날씨가 맑았다. 대나무의 그림자가 창에 비쳤다.
18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19일
새벽. 하루 내내 맑았다. 구름이 혹 많이 끼기도 했다. 아침 일찍 서리가 하얗게 내려 촉촉하였다. 용동의 이선비(李雅)가 와서 책을 읽었다.
20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유준래(劉俊來) 공(公)이 내게 와서 배웠다.
21일
새벽. 날씨가 맑았다. 이른 아침이 지나 다시 이재천의 병이 어떠한지 물었다.
22일
이른 아침이 지나 사곡에 갔다. 『논어』 제3권을 전했다. 또한 송산에 갈 때에 증조부인 현포공(玄圃公)의 산소를 살폈다. 또한 송산에 들어가서 승수를 만났다. 승수가 말하기를, “다시 유장(儒狀)을 새로 부임한 수령인 정대무(丁大懋)에게 내려한다”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다시 돌아와서 사곡에 들어갔다. 또한 『논어』 제4권을 얻어 왔다. 구름이 어둡게 깔렸다. 임천 읍내의 전라도 도인 1,000여 명이 관가에 갑자기 쳐들어가 군기를 빼앗았다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밤에 구름이 매우 짙어 어두웠다. 해질 무렵 비가 왔고, 이경(二更, 오후 9∼11시)에야 비로소 그쳤다. 김동현과 함께 다시 간 자들과 함께 놀았다.
23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아침 일찍이 지나 윤동 김선생이 와서 우리 할아버지를 방문하여 알려주고 갔다. 또한 전라도의 도인들이 입포(笠浦)에 들어가서 폐단을 일으켜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산과 들에 두루 가득 찼다. 김동현과 함께 하루 내내 같이 놀았다. 오현(烏峴)에 올라 들판을 살폈다. 밤 삼경에 또한 아버지 성북을 모시고 또 다시 함께 오현에 올라 시대가 변하는 것을 생각해보고 내려왔다. 얼마 되지 않아 새벽이 되었다.
24일
아침 일찍 요곡의 윤상호(尹相皓)가 우리 집에 와서 말하기를, “어제 10월 23일 신시에 요곡 문중 어른의 동생 장오(壯五)씨가 돌아가셨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관에 쓸 나무는 우리 집에서 짊어지고 가서 사용하였다. 아침이 지나 요곡에 가서 장오씨를 조문하였다. 해질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이날 하루 내내 가락암에서 윤동접이 군대를 이끌고 진을 익혀 시끄러웠다고 운운하였다. 한 밤중에 비가 쏟아졌다. 이른 밤에 김동현·이종대와 함께 놀았다. 이 날 땅거미가 질 무렵 오령(烏嶺)에 올라가서 가락암을 보고 내려왔다.
25일
아침 일찍 새벽에 비가 왔다. 이른 아침이 지나 그쳤으며, 구름이 흩어져 푸른 하늘이 드러났고, 오후에 매우 흐렸으며 맑지 못하였다.
26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이른 아침이 지나 마을에 갔다가 오시에 재종(再從)인 복기(福基)의 관례와 혼인을 보았다. 서천(舒川) 당산리(堂山里)에 갔다. 뒤에 또한 송산에 가서 승수씨를 만나 그 아들의 혼인날이 내일이어서 돈 1냥을 주고 왔다. 송산에 갔을 때 먼저 현포공(玄圃公)의 산소에 들러 살폈다.
27일
아침 일찍 서리가 하얗게 내려 촉촉하였다. 오후에 사곡의 권택수 만송(晩松)씨가 와서 나를 찾았다. 나는 곧 술 3잔을 내고 시세(時世)의 어지러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해질 무렵 또한 함께 오령으로 가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이어 재종인 복기가 결혼하여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가락암에서 집으로 들어갔다. 땅거미가 질 무렵 권선비(權雅)와 이별하였다.
28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오후에 재종수(再從嫂)씨에게 알려 인사를 하였다. 해질 무렵 구름이 가장 많이 끼고 비가 올 듯하였다. 만덕리(萬德里)의 지봉석(池鳳錫)이 장아(長牙)의 김희만(金喜萬)이 본읍 내에 있는 수성군졸(守城軍卒)을 잡아갔다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해질 무렵 뒷산에 올라 송정 앞에 있는 부여촌리(富余村里)에 사는 강접주(姜接主)가 진을 익히는 것을 보고서 집으로 내려왔다. 시를 읊었다.
29일
집에서 벼를 타작하였다. 또한 근처의 도인들이 다투어 기포(起包)하여 장차 본읍(서천)에 들어올 것이라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해질 무렵 구름이 조금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