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영에 올리는 글[上巡營]
정월 초9일 연산을 출발하여 고산으로 향한 뜻은 연유를 갖추어 첩보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당일 해가 저물 무렵 전주(全州) 광두점(廣頭店)에 도착하여 머물러 잠을 잤으며, 초10일 새벽에 출발하여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쯤에 대곡동(垈谷洞)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바로 마천대(摩天臺) 아래입니다. 산 위로 비류들의 바위 소굴을 쳐다보니, 새도 넘어가기 힘든 길이라 말 할만 합니다. 마치 하늘 위에 꼬불꼬불한 험한 길이 있는 것과 같았는데, 위로는 아주 높은 바위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고, 좌우로는 몇 겹의 병풍바위로 장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골짜기를 가려 2칸의 집이 들어갈 수 있고 석벽을 쌓았으되 단지 처마가 노출되었을 뿐입니다. 동·서·북 3면으로는 고립된 듯 깎아지른 듯 서 있어서, 자신의 몸에 날개를 달지 않으면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내려가는 1개의 길만 있으며, 또한 3층으로 된 잔도(棧道)가 매달려 있어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1사람이 관문을 맡으면 만 명의 사람이 열 수 없는 곳입니다. 또한 서로 마주 보는 봉우리들이 없어서 총이나 돌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 서남쪽 어깨 아래로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있어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조방장 김학립(金鶴立)과 함께 병정들을 이끌고 무기를 가지고서 몸을 굽혀서 돌부리에 접한 정상에 올랐습니다. 쌓인 눈이 허리가 빠질 정도이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10보를 가면 9번 넘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15리를 가서 겨우 산꼭대기에 도착하여, 연이어서 서양 총을 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잡을 한 가지 방도는 물과 양식을 대주는 보급로를 끊으면 10일 안으로 반드시 굶주리고 목이 마른 귀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토착민들로 하여금 더욱 잘 지키도록 하여 보급로를 엄히 막고 막지 못하면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침 금산(錦山)의 의병장 김진용(金鎭容)이 복수할 것을 기약하는 병사 300명을 이끌고 이들 적들과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산 아래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책을 주어서 그들에게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연산의 영정동(永貞洞)에서 비괴(匪魁)가 기포(起包)한다는 급한 기별을 듣고 곧바로 그들의 소굴을 쳐서 우두머리를 잡아서 곧바로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때 얻은 벼 50포를 그 동네에서 생활이 힘든 집을 진휼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공주 소전(蘇田) 지역에 도망한 괴수들의 소굴이 많다고 하여, 바로 조방장(助防將)과 함께 병사들을 합쳐 곧바로 갔습니다.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