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략기[討匪略記]
12월 11일 진잠에 출진한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이르기를, “진잠에 사는 박만종은 삼남의 비류 도대장(都大將)이며, 또한 금영(錦營)을 범하여 이미 금산을 함락하고, 사람을 죽인 것이 전봉준·김개남 2적보다 더 많다. 만일 이 적을 잡게 되면 공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진잠은 거리가 이곳에서부터 60리입니다. 오늘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박만종을 잡아 휘하에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즉시 군대가 마구점(馬口店) 20리까지 행진하여 먼저 여행증명서(路文)를 진잠에 보냈으며, 소모관 문석봉(文錫鳳)의 군대가 진잠에 출진한 일을 알렸다. 기밀군관 신영휴(申英休)를 따로 보내어 밀계를 주었다. 이러이러해서 유시(酉時, 오후 7∼9시) 쯤에는 어리석은 듯한 1명의 병사를 택하여 또 봉서 1개를 주고 박만종의 집에 직접 전하였는데, 박만종이 집에 있는 여부를 묻지 않고 그의 식구에게 주고 오게 했다.
그 편지에는 “날씨는 생략하고, 지금 과천에서 온 소모관 문석봉이 다소의 의병을 이끌고 우리 읍으로 출진한다고 들었습니다. 글을 먼저 보내어 도착할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술시(戌時, 오후 7∼9시)와 해시(亥時, 오후 9∼11시) 쯤에 읍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또한 제가 감영에 사는 매우 절친한 자에게서 듣기로는 문(文)이라는 자는 기교를 부리는 것이 귀신과 같다고 합니다. 36계 중에서 5책(策)을 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무개 아무개 등 6,7인이 오늘 밤에 도착하여 황혼에 가수원의 다리 근처에 있는 공점(空店)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원컨대 형께서는 빨리 행장을 차리고 1구의 단도(短刀)만 가지고 오십시요. 밤을 잊고 경상도 김산읍(金山邑)을 넘으면 투탁(投託)하여 서로 의지할 곳이 있습니다. 빨리빨리 날듯이 서둘러서 나오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달아나면서 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것에서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발 그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썰미가 좋고 손이 빠른 군관이 반드시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아낼 것입니다. 제발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두 번 인사드립니다”라고 하였다.
편지를 보낸 후 천천히 군대를 움직여 해시가 끝날 무렵 진잠에 도착하였다. 말안장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신영휴가 말 앞에서 인사를 하고 말하기를, “소인은 가르쳐주신 대로 가수원 다리 근처에 있는 공점에 도착하였더니 과연 해시 무렵에 박만종이 등에 반보자기를 지고 1구의 단도를 걸고 와서 도착하여 빈 터의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신데 이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인이 자사리(刺斜裏)·흑영리(黑影裏)를 꺼내어 이야기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 되었다’라고 하고, 곧이어 그를 결박하여 잡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곧바로 관청에 올라서 자리를 열고, 박만종을 잡아 들여 곧바로 군율을 시행하려 하였다. 그랬더니 박만종이 울면서 고하여 말하기를, “소인이 지은 죄가 천지지간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의 보잘것없는 재주를 사용하여 법헌(法軒, 최시형)을 잡고 여러 우두머리들을 체포하여 공으로써 속죄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박만종의 사람됨을 보니 기밀과 관련한 것은 그가 능하지만, 놓아주고 다시 잡는 것은 또한 내가 어렵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묶은 것을 직접 풀어주면서 윽박지르는 동시에 은혜와 위엄도 함께 보였다. 이에 마음에 품었던 것을 이야기하기에, 곧바로 여비를 주어 그에게 나아가서 잡아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뜻으로 편지를 써서 순영에 보냈는데, 감사가 이를 듣고 깜작 놀라서 몰래 영교(營校)를 우리 진중에 보내어 박만종을 잡도록 하였다. 13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무렵 박만종이 적을 염탐하고 돌아오다가 영교에게 잡혔으며, 박만종은 스스로 그의 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기회를 보아 도주하였다. 현감 이세경과 영교들은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어느 길을 택해야 할 지 두려워하면서 나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박만종을 놓쳤으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원컨대 병정을 빌려주시면 밤을 잊고 쫓아가서 잡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영원히 잡지 못할 것이 뻔하였다. 계책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큰 우두머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니 아깝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후회를 한들 어찌 하겠는가? 병정들을 모두 내어서 현감에게 붙여주니, 현감과 영교 및 본읍의 이교들이 병정을 이끌고서 박만종을 쫓아서 갔다.
나는 다시 일의 기미를 짐작하고 박만종의 사람됨을 헤아리니, 박만종은 반드시 곧바로 큰 길로 달려가지 않고 단지 한쪽에서 소리를 내는 듯하면서 다른 쪽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였다. 즉시 이방을 불러, “여기에서 동편으로는 무슨 마을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교촌(校村)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세력이 있는 집으로는 어떠한 집이 있는가? 관리의 집인가? 양반의 집인가?”라고 물으니, 이방이 말하기를, “별로 없습니다. 서리는 이상신(李相信)으로 조금 나이가 있으며, 양반은 민금해(閔金海)로 태어난 집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이방과 함께 민가의 집으로 가서 확인만 하고 돌아왔다.
무릎과 다리에 두른 것을 풀고 아랫 사람들을 물려서 병풍으로 촛불을 막아 옅은 잠을 한 차례 잔 후에 해시(亥時, 오후 9∼11시) 무렵 다리를 묶고 머리에 띠를 둘러 행장을 차리고, 손에 철편(鐵鞭)을 가지고 곧바로 민가(閔家)의 집에 도착하여 담을 넘어 들어갔다. 이 집은 정침에 대청이 있으며, 큰 방에는 부녀들이 언문으로 된 고소설을 읽고 있었다. 작은 방으로 건너가서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2개로 된 창을 열었는데, 떨어진 것 당석(唐石) 1개를 얻어 불을 켜서 휘둘었다. 과연 박만종이 벽 아래쪽을 향하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를 부르면서, “박만종, 박만종 고생이 매우 많다”라고 말하고서는, 곧바로 잡아서 가두었다. 이어서 순영에 편지를 써서 알렸으며, 다시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치는 계책을 써서 법헌을 잡고 싶었다. 때마침 법헌이 청산에서 소란을 피워서 박만종이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득이 눈물을 훔치고 박만종을 금영(錦營)으로 보냈다. 머리를 베고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 보였는데, 12월 17일이었다.
염정동(廉貞洞)은 고산·진산·연산·진잠 4개 읍의 경계에 있는데, 대참산(大旵山, 대둔산)은 천참(天旵)의 높고 험함이 난약(蘭若)·촉산(蜀山)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동(烏洞)에 사는 백성들은 6∼7백호이며 또한 산 앞과 산 뒤에 있는 부근의 동은 수천 호나 되었다. 을미년(乙未年, 1895) 정월 24일 비류 중에서 교화되지 않은 자는 최사문(崔士文)·최공우(崔公友)·양양옥(梁良玉)·박중집(朴仲執)·이홍기(李洪基)·김치선(金致善) 등이다.
듣건대, 청산의 적들이 다시 일어나, 도당 1,000여 명을 모으고 상응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연산현감 정대위(丁大緯)는 편지를 써서 급한 사정을 알렸으며, 또한 순무영 암행참모(暗行參謀)인 이명상(李明翔)은 글을 써서 내게 진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였다. 같은 날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회덕에서 병정 20명과 장관 23인 등 43인을 거느리고 길을 재촉하여 진잠 남면(南面) 증촌(增村)으로 가서 진을 쳤다. 적의 허실과 무기 및 식량과 땔감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여, 잠시 진에 머무르다 등짐장사(負商) 2인을 보내어 그들의 사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이수령(梨樹嶺)에 도착하여 기밀을 염탐하는 일을 치밀하게 하지 못하여, 반대로 영(嶺) 위에 있는 비도들이 파견하여 지키는 군대에게 잡혀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보다 수일 전에 연산현감 또한 정탐하기 위하여 별감을 보냈는데, 그 또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병력이 약하고 적어서 할 수 있는 계책이 없어서, 참으로 근심스러웠다.
한 가지의 계획을 생각하였는데, 기밀장관(機密將官)을 염정동에 보내어 3면을 드나드는 길 입구에서 피란하는 자 1명을 잡았다. 그는 본동에 사는 진사인 권도현(權道賢)이었다. 그곳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어 보니, 그들의 세력이 크고 무기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아무런 계책을 행하지 못하는 때에 26일 하늘에서 눈이 많이 내렸다. 기뻐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이는 하늘이 나에게 성공하게하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장군의 무리들을 불러서 귓속말로 이러저러하라고 말을 해주었다.
증촌(增村)에서부터 염정동까지는 30리로서, 산이 험한 길이었다. 그날 신시에 밥을 지어 먹고 배가 부르자, 각각 밥 한 덩어리를 싸고, 각각 탄(炭) 5홉(合)을 가지고서 길을 떠나 곧바로 염정동으로 향하였다. 눈이 내린 가운데 1보를 가면 한번 넘어져서 매우 고생하였다. 술시(戌時, 오후 7∼9시) 쯤에 이수령 20리쯤에 도착하였으며, 산 위를 습격하여 파수막 중 7개에서 적졸들을 잡아서 모두 결박하여 막중에 가두었다. 각각 가지고 있는 탄불(炭火)을 일으켜 손과 다리를 따뜻하게 하고, 칼자루와 총머리를 데웠다. 날쌔게 마을 가운데 있는 김 세마(洗馬)의 집으로 갔는데, 이때 진사 권도현은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 집은 담장의 높이가 2척이며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틈 사이로 살펴보니,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대개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적도들이 마음을 놓고 잠을 자고 있어서 우리 군대가 뜻하지 않게 출병한 것을 몰랐다.
사졸들이 먼저 몸을 앞세우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즉시 사람들에게 담 아래에 서있게 하고, 등을 밟고 담장에 올랐다. 담장 위는 가시로 차례로 엮어서 넘어서 내려갈 수 없었다. 담요를 덮어 미끄러져 떨어지게 하여 먼저 문고리를 뽑고 문을 열어서 군사들이 들어오게 하였으며, 발자국소리를 줄이면서 방옥(房屋)으로 갔다. 만일 총자(銃子)를 앞세우지 않았으면 완전히 큰 공을 거두기 힘들었다. 창문 틈으로 거울을 비쳐 보니, 2칸의 큰 방에 비도들의 대장이 사용하는 막(幕)이 있었다. 적의 무리들이 삼, 사겹으로 가로 막아 어긋나게 드러누워 있었다. 북벽의 뾰족 튀어난 곳 구석에는 무리들이 모여 있었고, 수십 자루의 총이 세워져 있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왼손에는 철편(鐵鞭)을 오른손에는 환도(環刀)를 가지고 몸을 던져 쳐들어가서 적들의 배를 밟고 적들의 머리를 밟아 곧바로 총을 세워 놓은 주위로 날개를 덮치듯이 섰다. 그때 밖에 있던 44명의 죽음을 무릅쓴 의사들이 큰 소리와 고함을 지르면서 말하기를, “경병과 신영병(新營兵) 4,000여 명은 3겹으로 포위하여 철통같이 하라. 또한 큰 문 가운데에 대포를 설치하고 만약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처참하게 죽여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적들은 삼가고 조심하여 얼굴을 묻고 처분을 기다렸다. 큰 우두머리를 섬멸하고 협박에 의해 따른 자는 마땅히 사면하였다.
모든 곳에 흰 눈이 내려서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협곡에 열을 지어 서 있는 것 같았고, 총을 쏘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마치 천둥과 번개가 치는 듯했다. 때는 밤 12시 정각이어서 비록 담이 큰 장사라고 해도 누군들 감히 꼼짝달싹할 수 있었으랴. 비도들 중에서 놀라서 일어난 자들은 하나하나 총이 있는 쪽으로 향하여 서게 하였으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 하여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방내의 적 16인의 목을 베는 것이 끝나자,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포박하였으며 투항 한 자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다. 모두 옷을 벗기고 빈 방에 가두었으며, 남은 탄불을 켜서 손과 발에 불을 쬐고, 무기를 데웠고 보자기로 싼 밥을 따뜻하게 하여 몇 사람에게 먹도록 하였다. 곧바로 대성사(大城寺)를 향하여 10리를 가서 먼저 적의 우두머리를 잡게 하였으며, 투항한 자가 모두 400여 명이었다. 그때가 3시 무렵(丑末)이었다. 3시가 지난 때에 다시 토굴로 가서 4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때 얻은 말과 소, 곡물들은 모두 마을에 있는 잘 살지 못하는 집들에게 진휼로 나누어 주었다. 우두머리 5놈의 목을 베고 나머지 무리들은 귀화시켰다. 이날은 정월 28일이었다.
고산 대둔산은 가운데가 하늘로 솟아올라, 매우 높게 각이 진 바위가 3층의 길을 이루고 있다. 1명이 관문(關門)을 지키어도 1만 명이 열 수 없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류들의 거괴인 최공우·최사문 3부자 및 숙질로 이루어진 6명의 큰 우두머리가 그 위에서 거점을 차지하고 몇 칸의 집을 지었으며, 무기와 식량을 갖추었는데, 수개월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멀고 가까운 적들의 우두머리로 사나운 자인 김치삼(金致三)·장문화(張文化)·김태경(金台景)·정옥남(鄭玉男)·고판광(高判光)·송인엽(宋仁業) 등 십수 놈이 또한 산위로 올라가서 들어간 자가 많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붙어 와서 화를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장차 도적질을 하고 다시 일어날 계획이 있었다.
정월 19일에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과 함께 신영병 40명을 이끌고 산 아래에 이르러서, 험한 산속의 좁은 길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고, 다만 지혜로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군사들을 진산읍(珍山邑) 20리 되는 곳으로 물러나 진을 치게 하였으며, 기밀장교인 구형덕(具亨德)에게 고산(高山) 주암동(舟巖洞)으로 가서 최공우의 심복인 김공직(金公直, 直은 眞의 오자)을 잡아오라고 하여, 이치로 그를 깨우쳤다. 그의 모양을 보니, 비록 귀화를 한다고 하였으나 끝내 진심은 아니었다.
계책을 이용하여 계책을 취하는 법을 이용하는 것인데, 편지를 봉하여 주어서 산위에 있는 적들 사이를 헐뜯게 하여 서로 멀어지게 하였다. 편지에 쓰기를, “김치삼·장문화 등은 보아라. 너희들이 산으로 올라간 날에 정녕 나와 약속하기를 최사문·최공우 3부자 숙질의 머리를 베어 갖다 바쳐서, 공을 세우는 것으로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기일을 크게 어기고 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여 다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심한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군들 잘못한 것을 고쳐서 선한 일을 하려 하지 않겠는가마는, 너희들이 만약 끝내 미혹하려 한다면 마땅히 너희들이 사는 산의 앞과 뒤를 모두 포위하여 너희들에게 물과 곡식을 대어 주는 길을 끊어서 불과 반 개월이면 마땅히 굶어 죽은 귀신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들의 식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빨리 계책을 행하고 하루 빨리 최적 3부자 숙질들을 베어서 머리를 가지고 와서 공을 세워 속죄를 하라”고 하였다.
소모관이 편지를 몰래 김공진(金公眞)에게 주어 부탁하기를, “너는 이 편지를 가지고 마천대(摩天臺)에 올라 가서 장문화(張文化)·김치삼(金致三) 등에게 전해 주고 힘을 함께하여 일을 이루면 모두 너희들의 공이다”라고 하고 술과 먹을 것을 주고 관대하게 대하여 보냈다. 과연 김공진이 편지를 품고 산에 올라갔는데, 장문화·김치삼에게 주지 않고 몰래 최적(崔賊)에게 주었다. 최적이 직접 편지를 열어보고, 비로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놈 6명이 그의 3부자 숙질들을 기도하려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최적이 동생과 조카를 불러서 각각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편지에 쓰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재빠르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6놈들에게로 향하여 가서 하나하나 죽이고 그들의 죽은 시체의 목을 치고 낭떨어지로 던졌다.
정월 22일 바야흐로 비천포(飛天砲)를 만들었고, 최적들을 죽일 때인 24일 강화병영의 군사와 일본군사들이 도착하여 힘을 합쳐서 함께 산위에 있는 적들의 바위 소굴을 공격하였다. 다만 많은 적들이 있었으나, 모두 최적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22일에 김치삼과 장문화와 함께 서로 공격을 하여 김치삼과 장문화 등 6인을 쳐서 죽이고, 곧바로 김공진과 함께 산위 뒤편을 따라서 내려가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다. 과연 최적은 염정동(廉貞洞)에서 다시 기포하였고, 그 때문에 큰 눈이 오는 것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여 죽일 곳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