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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가장[家狀]

돌아가신 부군(府君)의 성(姓)은 문(文)이고, 휘(諱)는 석봉(錫鳳), 봉각(鳳珏)이다. 자는 이필(而弼)이며, 호는 의산(義山)이시다.
남평 문씨가 시작하게 된 것은 신라 대아찬겸대학대국사삼한벽상공신(大阿飡兼大學大國師三韓壁上功臣) 남평백(南平伯)으로 시호는 무성(武成)이며 휘는 다성(多省)인 분에서 부터이다. 5파가 전하는데, 휘(諱) 극겸(克謙)은 관직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휘(諱) 후식(侯軾)을 낳았으며, 후식은 관직이 한림학사증대광보국상주국평장사(翰林學士贈大匡輔國上柱國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휘(諱) 익점(益漸)은 호(號)가 삼우당(三憂堂)이며 관직은 좌사의우문관제학(左司議右文館提學)으로 조선시대에 지정사(知政事)로 증직되었으며,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고조부는 휘가 덕수(德粹)이고, 증조부는 휘가 무상(武常)이며 통훈대부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을 증직받았다. 할아버지는 휘가 택호(宅鎬)이며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을 증직받았다. 아버지는 휘가 하규(夏奎)이며 호는 석전(石田)이고 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를 증직받았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李氏)로 후근(厚根)의 딸이며 정부인(貞夫人)을 증직받았다.
돌아가신 부군은 철종 신해년(辛亥年, 1851) 12월 24일에 현풍군(玄風郡) 상동리(上洞里)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석전공(石田公)께서 비봉산(飛鳳山)이 스스로 열려서 황색의 봉황이 입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 정부인은 여승 수 십인이 와서 인사하고 “비봉산 신령이 당신 집에 머물렀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석봉(錫鳳)으로 이름을 지었다. 태어나면서 그의 바탕은 원만하고 기운이 세었으며, 몸이 건강하고 골격이 뛰어났다. 7삭이 되지 않아 걷고 뛰었으며, 5살에는 학문을 배웠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잘 기억하였다. 글을 읽는데 소리를 내어 토를 다는 것이 명확하였다. 어른들은 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12살에 여러 아이들과 대나무로 된 활을 갖고 놀면서 소를 쏘았는데 반드시 적중하였다. 함께 놀던 자들에게 활을 갖고 오게 하였으며, 먼저 갖고 온 자에게는 상을 주었으며, 늦은 자에게는 벌을 주어 마치 군율이 있는 것 같았다. 때마침 어사 김화영(金華榮)이 지나가다가 보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석전공을 방문하여 “이 아이는 장차 반드시 장수의 재목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후 술사(術士)인 이성구(李性九)에게 보내어 육도삼략(六鞱三略)을 가르켰다.
13세에 초계(草溪) 변씨(卞氏)에게 장가를 들었다. 나이가 어려 장난으로 동상례(東床禮)를 청하였다. 선친께서 이야기하기를 “내 다리를 드는 자가 있으면 당신의 청을 들어주겠다”라고 하였는데, 끝내 들 수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20세에 활쏘기와 말을 타는 것에 뜻을 두었으며, 항상 스스로 단련하였다. 이성구와 함께 고견암(古見菴)에 들어가 신통력을 얻고자 3년이나 기도하였다.
23세에 주역을 읽었으며, 2년간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25세에 중국에 들어가서 금릉(金陵) 사람인 왕희주(王希周)를 만났으며, 침술과 약에 대하여 배워 묘방을 얻었다.
28세에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와서 그의 기술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구제한 자들이 많았다.
석전공이 수년 동안 심하게 아팠는데 살아 있는 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그 때 날씨가 추웠으며, 얼음이 얼어서 선친께서는 내동(內洞)의 연못에 가서 기도하였는데, 얼음이 갑자기 풀리면서 잉어가 나왔으며, 그것을 바쳐서 효과를 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관에 알려서 관청에서 상으로 비단(紬) 1단(段)을 주었다. 그 때에 사나운 호랑이가 마을에 들어왔는데, 관군이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그것을 쫓아냈다. 호랑이가 빙고(氷庫)에 들어가자, 선친께서 한 손에 등을 들고 한손에는 호랑이를 잡아서 나왔다. 군사들 모두가 크게 놀랐으며, 관에서는 1자루의 총을 상으로 주었다.
32세에 상납리(上納吏)가 되어 배를 이용하여 수천 석의 쌀을 운반하여 무안(務安)과 목포(木浦)를 지날 때 전라도에 큰 기근이 있었다. 마침내 배의 곡식을 풀어서 빈민에게 진휼곡을 나누어 주었다. 정부는 그가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하여 죄를 물어 그를 잡도록 하였다. 선친께서는 “국가를 속인 것은 죄이다. 그렇지만 이들 백성만 국가의 물건이 아니란 말인가? 쌀을 중히 여기면서 백성을 버리는 것을 나는 참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집의 일을 친구인 김수영(金秀榮)에게 맡기고, 이름을 바꾸어 식구들을 이끌고 지리산 가운데로 들어갔다. 동생 익봉(翼鳳)은 통진(通津)에 스스로 대신 갇힐 것을 청하였다. 선친께서 이야기하기를 “어찌 내 동생이 죄가 없는데 죽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형조의 관문을 위조하여 석방하도록 알렸고, 동생이 돌아오자 함께 숨었다. 후에 김수영과 현감 어병선(魚秉璿)이 상의하여 상소를 올려서 백성을 구제한 실상에 대하여 있는 대로 의견을 말하여, 비로소 용서를 받게 되었다. 산에서 나와 현감 및 김수영과 함께 군대를 조련하는 기술을 익혔다.
41세에 살고 있던 수문동(水門洞)으로 되돌아 와서, 촌수가 먼 일가인 지산공(池山公) 문용현(文龍顯)과 함께 영파재(映波齋)를 세워 빈민의 자제들 50여 인을 가르쳤으며, 영파재에 대한 기록(齋記)을 직접 지었다.
그 때에 각 군에는 비적(匪賊)들이 많아서, 담당수령인 윤병(尹秉)이 선친을 맞아 군대를 이끌고 고을 사방을 순찰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군에서는 영상 김병시(金炳始)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서로 감탄하여 이르기를 “문모(文某, 문석봉)는 한쪽을 막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윤병이 과천으로 옮겨 지키면서, 부군이 책실(冊室)로써 동행하였다. 청주에 이르러 북암점(北巖店)에서 잠을 잤는데, 밤에 적 수십 명이 와서 습격하였다. 선친께서는 총포를 쏘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으며, 적들은 놀라서 도망하였다. 윤(尹)이 이윽고 도임하자 포군을 두면서 선친을 장수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읍에는 500여 근(斤)이나 되는 큰 비석이 있었는데, 부군(府君)께서는 아침에 남령(南嶺)으로 운반하였고, 해가 저물 무렵에는 읍중으로 운반하였다. 적들이 감히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드디어 편안해졌다.
계사년(癸巳年, 1893) 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별과를 특별히 설치하여 선친이 무과 장원에 선발되었으며, 특별히 경복궁 오위장에 제수되었고 궁궐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12월에 진잠현감에 제수되었으며, 갑오년(甲午年, 1894)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흥선대원군은 선친이 장군의 재목임을 듣고,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병법과 시정(時政)을 논하고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동학난이 충청도와 영남에서 일어나 시끄러웠다. 수령 감사들 중에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임금께서는 어윤중(魚允中)을 선유사로 삼았으나, 끝내 귀순시킬 수 없었다. 선봉 전봉준(全琫準)이 전주를 함락하고, 박만종이 금산(錦山)을 근거로 삼았고, 김개남(金介男, 金開男의 오기)이 충청도를 약탈하였다. 임금께서는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廵撫使)에 임명하였고, 선친을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로 삼아 그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선친은 군율을 엄하게 하여, 지나가는 군현에서는 조금도 범하는 것이 없었다. 혹 눈이 온 것을 이용하여 공격하거나, 기계를 설치하여 덮쳐서 병사들이 출발한지 얼마가 되지 않아 박만종·김개남·박화춘(朴化春)·김관일(金寬一)·최정범등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초유하여 귀화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도 잘못 죽인 자가 없었다. 사방에서 모두 흡족하여 첩보하였다. 임금께서 그를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로 올려주었으며, 삼대를 추증하였다. 임금께서 부군을 신영(新營)의 영관(領官)으로 임명하였으며, 연산(連山)으로 나가서 지키도록 하였다. 충청과 호남의 사람들이 상소를 내어서 그가 머물기를 원했으며, 그를 충청과 호남에 잠시 머물게 하였는데, 백성들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6읍의 대민과 소민들이 명찰선정비(明察善政碑)를 세웠다.
부군이 공주의 관병 400명을 이끌고 신식으로 훈련하였는데, 장차 다른 날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재수(金在洙)라는 자가 일본(倭)을 치려 한다고 무고하여 서울의 감옥에 갇혔다. 을미년(乙未年, 1895) 6월 21일 비로소 사면을 받았다.
선친께서는 이때부터 종적을 감추고 나가지 않았으며, 야인처럼 살았다.
이해 8월 19일 밤 훈련관 우범선(禹範善)이 일본인을 인도하여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곤령전(坤寧殿)에서 시해하였다. 부군께서는 변을 듣고 통곡하면서 그들을 공격하여 복수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의지할 세력이 없었다. 9월 18일 서울에 들어가서 송근수(宋近洙)·김병시(金炳始)·신응조(申應朝)·김홍집(金弘集)을 방문하여 국모를 위하여 창의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4명의 재상들은 모두 내심 허락하였다. 또 상공(相公)인 계당(桂堂) 민영환(閔泳煥)을 만나서 그 뜻을 말하였더니, 민영환이 개탄하면서 말하기를 “해와 달이 매우 밝고,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충성과 의리가 매우 밝다. 군신의 의리가 나뉘어 있는데, 그대의 이러한 말을 들으니 국가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환도 1자루를 풀어서 그를 격려하였다.
부군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인 고영근(高永根)을 보내 적(賊) 우범선을 일본에서 죽였다. 그리고 공주의 유성(儒城)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스스로 대장이 되었고, 김문주(金文柱)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오형덕(吳亨德)을 중군으로 삼아서, 같이 가서 송도순(宋道淳)을 만났으며, 군향(군수미)을 부탁하여 원수를 갚고 적을 치겠다는 뜻을 동지들에게 불러 일으켰다. 이에 진사 김종률(金鍾律)과 의사 200여 인이 응하였다. 그는 5일 동안 군인 1,000여 명을 얻었다. 진잠현감 이세경(李世卿)이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빨리 보고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정예군을 이끌고 내습하여 연이어 3일을 싸웠으나, 양쪽이 모두 죽이고 다쳤다. 그런데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대하지 못하였고, 여러 주진(州鎭)들이 오히려 적을 응원하여 군대는 패하였다.
부군은 오형덕(吳亨德)과 함께 1필의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려서 고령현감을 방문하였다. 현감은 갑자기 서로 도울 뜻이 없었고, 오히려 그를 밀고하였다. 감역(監役) 윤희순(尹羲淳)을 방문하였으며, 윤공은 분개하면서 군자를 도와줄 것을 허락하였다. 드디어 전국에 격문을 전하였으며, 초계(草溪) 군수 신태철(申泰哲)에게 빨리 가서 만나서 관에서 돈을 내어서 군대를 도울 것을 청하였다. 신태철은 영에서 내린 훈시를 보여주면서 이르기를, “관에서 당신을 잡는 것이 매우 급하다고 하여 현상금으로 만금을 걸고 여러 군의 사람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한다. 잠시 숨어서 후일을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부군은 하늘을 보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운이 과연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이해 11월 20일에 마침내 화를 입게 되어 대구(大邱) 옥에 갇혔다. 관찰사 이중하와 경무관 장규원은 구해줄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위협하고 겁을 주었다. 부군은 전후의 공초를 받으면서 대의를 통렬하게 펼쳤으며, 또한 그들이 의리가 없음을 엄하게 꾸짖었다. 통곡하여 부르짖어 가슴 속의 피가 위로 흘렀고 이가 저절로 빠져서 피가 흐름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이중하는 기가 움츠러들어 물리친 후에 다만 그를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관찰사를 압박하여 그를 반드시 죽이려 하였다. 동생인 봉익(翼鳳)이 함께 약속한 여러 대신들에게 달려가서 알렸으나, 모두가 두려워서 구할 길이 없었다.
황성일보 사장 배설(裵說, Bethell, Ernest T.)이 그 일을 듣고 탄식하여 부군의 동생인 봉익(翼鳳)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는 큰 변을 겪어서 세상이 흉흉한데, 당신 나라의 신하들은 누군들 이러한 뜻이 없겠는가. 소위 4명의 재상들이 1명의 무신 재상 보다 못하다”라고 하였다.
정인회(鄭寅會)는 부군(府君)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춘천에서 병사를 일으켜서 부군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군은 옥에 갇힌 것이 수십 일이 되었는데, 생각해도 구출할 사람이 없었다. 또한 한갓되이 죽어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이에 영장 최은동(崔殷東)·부장 오덕형(吳亨德)과 함께 밤을 이용하여 옥을 부수고 나왔다.
부군이 몰래 과천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고향의 집은 이미 일본병사들이 태워버렸으며, 식구들은 참판 이당오(李唐吾)의 집에 숨어 있었다.
병신년(丙申年, 1896) 4월 부군(府君)은 몰래 서울에 들어가서 흥선대원군을 만났으며, 세상의 일을 말하고 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대원군은 다만 한탄할 뿐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미우라 고로가 죽었으며, 관에서 금하는 것이 조금씩 해제되었다.
임금께서 부군(府君)을 불러서 만나 충의(忠義) 2글자를 써서 주셨으며, 또한 칙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만일 네가 아니라면 어찌 나의 근심을 알겠는가? 지금부터 백세동안 응어리진 마음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부군은 울면서 받들면서 답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하늘과 땅과 같이 널리 미치는데 용기가 없고 꾀도 없어서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또한 의대(衣帶)를 내리면서, 부군에게 몰래 조칙을 내렸다. 서둘러 원주에 도착하여 스스로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각도의 의사(義士)들에게 통문을 돌려 장차 일본을 이기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도록 깨우쳤다. 불행히도 병이 생겨서 11월 19일 밤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하늘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다. 내 어찌 눈을 감으랴?”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였다. 아아! 슬프다.
부군은 평생 잠을 자도 눈을 감지 않았으며, 죽은 후에도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보셨다. 숙부인 휘 익봉(翼鳳)께서 5일이 지나고 와서 곡을 하였으며, 환도를 가지고 손에 집어 주자 이에 눈을 감았다.
군(郡)의 논공면(論工面) 사부랑금석곡(沙浮浪黔石谷)의 남동향을 등진 들판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초계(草溪) 변씨로 변진덕(卞振德)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었다. 후처인 현풍(玄風) 곽씨(郭氏)는 곽용달(郭龍達)의 따님으로 2녀를 낳았는데, 딸들은 수원 백성기(白性基)와 경주 김두완(金斗完)에게 시집을 갔다. 3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李氏)이며 이국노(李國老)의 딸로 3남을 낳았다. 영정(永井)·영생(永星)·영저(永氐)인데, 영정은 아들인 운채(雲采)를 낳았고, 영생은 아들인 인채(仁采)를 낳았으며, 영저는 아들인 광채(光采)와 복채(福采)를 낳았다.
부군께서는 평시에 글을 쓸 여가가 없었으며, 저작한 것을 다듬지는 않았다. 뜻에 따라서 올린 것을 찾아서 이때에 신서(新書) 1편을 펴냈다.
이에 경륜과 힘을 쓰신 것이 있었으나, 당시에 잘 쓰인 것이 없었다. 애석하도다! 못난 아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난리에 바삐 달아나 숨었는데, 상을 당한 중에도 다행히 선인(先人)의 여러 친구 분들이 구해주시고 아껴주심을 입어 부군의 손때가 묻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였으니, 어언 수십 년이 되었다. 근래 나라가 망하였고, 집안은 떨치지 못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같은 때에 망국의 유신들이 이미 새벽별처럼 드물게 되었다.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날이 두려워 없어지는 것들을 수습하고, 숨겨진 것들을 합하여 유고를 만들었으며, 당시 조정의 동료친구들의 글과 호남과 호서의 유장(儒狀), 6개 읍의 비명(碑銘)과 외국인들이 말한 것을 대략 서술하여 붙였다.
부군께서 평생하신 일의 행적을 조목마다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날마다 볼만 한 것이 있어도 모자란 내가 자세히 미치지 못하여 하나라도 거두어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죄를 지은 한이 매우 크다. 사리를 아는 군자들이 이 때문에 헤아려 글을 채택하여 주었다.
불초 아들 영정이 울면서 삼가 글을 올립니다.

주석
임금께서는 어윤중(魚允中)을 선유사로 1893년 보은과 금구에서 동학도의 대회가 있었을 때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 선유사로 삼아 선유하게 했다.
박만종·김개남·박화춘(朴化春)·김관일(金寬一)·최정범등을 베고, 문석봉이 김개남을 벤 적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왜곡 과장되어 있다.
우범선(禹範善) 1895년 훈련대의 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해 민비 시해에 가담했다. 뒤에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배설(裵說, Bethell, Ernest T.) 영국인 기자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서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여기에서 황성신문 사장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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