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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남도의 소요를 논하고 느낀 점을 서술한 상소 1894년 5월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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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13 소차[卷十三 疏箚]

남도의 소요를 논하고 느낀 점을 서술한 상소 1894년 5월[論南擾陳所懷疏甲午五月]

신은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의 후예로서 외람되게 과거에 급제하여 시종(侍從)의 반열에 올랐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여러 신하들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저 남들을 따라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은 지가 이미 5∼6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은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 죄를 받지는 않았으나 신은 항상 마음속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제 국가에 변고가 발생한 때를 만나서 그 사안이 위급한데도 한 마디 말을 아뢰고 하나의 계책을 내어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바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의 마음을 저버리고 신의 조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찌 차마 전하의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지금의 정세는 마치 사람의 큰 종기가 곪아터진 것 같습니다. 상태가 위급한데, 어느 겨를에 병의 원인을 규명하여 그 처방을 장황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우선 곪아터질 지경까지 이르게 한 흉악한 무리들의 죄를 논한 다음 응급조치와 대증(對證)요법의 사용을 전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삼가 바라건데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보잘 것 없는 의견을 받아주신다면 공사(公私) 간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병세가 참으로 위급하기는 하나 그 발병의 원인은 동학(東學)의 무리이며 난민(亂民)의 패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동학이 근거 없는 사설(邪說)로서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데도 그 세력이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난민은 본래 성상께서 기르던 백성들이므로 틀림없이 성상의 덕택에 감화되어 귀의할 곳이 있을 것인데도 그들의 흩어진 마음을 수습할 수 없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오래도록 향리에 있으면서 목격한 바, 최근에 관찰사와 수령들이 대부분 자신들을 살찌우려는 욕심을 품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간혹 농업이나 상업에 부지런히 종사하여 그럭저럭 살만한 자가 있으면 그들을 약육강식할 좋은 대상으로 여겨 비류(匪類)라는 이름을 붙이고 용서받지 못할 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합니다. 그리하여 불쌍한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호소할 곳이 없어 평생 고생하여 모은 재물을 가혹한 호랑이의 입에 남김없이 바치고 겨우 실낱같은 목숨을 건져 돌아와서 처자식을 데리고 길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동학의 무리들이 그들을 꾀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동학에 들어오면 수탈을 면하고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하자, 백성들이 서로 이끌어 동학에 귀의하여 정도(儒敎)를 버리고 사도(邪道)를 따르면서 법을 위반하고 기강을 어기면서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동학교도와 난민이 합쳐서 하나가 되고 서로 동조하여 모여서 그 세력이 날로 불어나서 벌과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쓸어버릴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변란을 초래한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럼에도 저들 관찰사와 수령들은 이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탐욕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라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익은 자신에게 돌리고 원망은 누구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이 무리들의 뱃속에 과연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 전운사(轉運使)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국가의 재정을 돌보지 않고 직무를 빙자하여 자신의 사욕을 채우며, 역졸(驛卒)에게 비밀 감결(甘結)을 내려 전 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지나치게 거두고 토색질을 하도록 한 것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농간을 부려 나라의 곡식을 빼돌려 팔아서 이익을 꾀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길거리에 널려있으니, 이 난을 최초로 조성한 자는 조필영(趙弼永)입니다. 그는 균전사(均田使)라는 직책으로 몰래 자신의 집안을 살찌우려고 나라의 토지를 농간하고 백지징세(白地徵稅)를 일삼아 백성들이 그 고통을 입은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창석(金昌錫) 또한 난을 조성한 자 중의 하나입니다. 난은 고부(古阜)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고부에서 난이 발생하도록 조장한 것은 전 군수(前 郡守) 조병갑(趙秉甲)입니다. 그는 갖은 방법으로 수탈을 일삼으며 못하는 짓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 난을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었으면 당연히 잘 살펴야 하는데도,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도리어 탐학을 일삼으며 꺼져가는 불길에 부채질을 하여 그 난을 재촉한 자는 이용태(李容泰)가 아니겠습니까? 전 감사(前 監司) 김문현(金文鉉)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탐욕을 부려서 난을 조성한 뒤에 또 그들을 위무하지 않아 난을 야기하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자극하여 난을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난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적의 깃발이 나부끼자 짚신을 거꾸로 신고 창황히 도의 경계를 넘어 달아나서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였으며, 조경묘(肇慶廟)경기전(慶基殿)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감사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그러고도 신하의 분수를 지닌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 여러 고을의 수령에 대하여 신은 일일이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만, 그 중에 난의 기미를 보고 산으로 달아난 자도 있고 혹은 화를 피하여 관할 지역을 벗어난 자도 있으며 심지어는 공무를 핑계로 감영에 몸을 의탁한 자도 있습니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리고 전 영광군수(前 靈光郡守) 민영수(閔泳壽)는 양식을 배에 싣고 바다로 도망친 죄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이를 엄중하게 추궁하지 않고 새로운 관직을 제수하는 명령을 먼저 내렸으니 이는 틀림없이 전하께서 깊이 헤아려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은 지나친 것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자는 김문현이 의리를 잊고 살기를 도모한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비록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그 해독으로 곪아터지게 하는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에는 변하지 않는 법이 있고 법에는 죄에 해당하는 규율이 있으니 신이 어찌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이 난이 있은 이래로 사람들은 모두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이 정도(正道, 儒敎)가 밝혀지지 못하고, 공의(公議)가 행해지지 못하며, 사사로이 올린 것들이 곧 법과 선례가 되고, 외교와 통상을 신중히 하지 않고, 과거를 통한 관리등용이 문란하고,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토목공사를 지루하게 끌고, 경연(經筵)을 오래도록 폐하고, 경비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사치가 성행하고, 민고(民庫)의 징수를 지나치게 하고, 분세(分稅)를 새로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명목들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아버지가 위급한 병에 걸렸는데 자식으로써 서둘러 약을 올리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물으면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겉으로 드러난 증세를 다스리는 방법을 바로 쓸 수가 없으며 원기를 보하는 처방을 천천히 논의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애타는 자식의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아! 신이 말하는 대증요법은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이 비록 우활한 유생의 평범한 말이지만 위급함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빨리 애통하게 여긴다는 조서(詔書)를 내려 뉘우침을 보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십시오.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요(堯)와 순(舜) 같은 도를 지니고도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말하신 적이 전혀 없으며 탕왕(湯王)과 무왕(武王) 같은 덕을 지니고도 자신을 낮추려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며 허물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책하여 성덕(聖德)을 더욱 빛내었습니다. 하물며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고자 하면서 실제적인 정치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한갓 듣기 좋은 형식적인 말들만 늘어놓는다면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런 백성들이 어찌 믿고 복종하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백성들을 애통히 여기는 뜻이 문장에 가득 넘쳐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정책에서 드러나며 통렬히 자책하고 성덕을 보여주어 털끝만큼이라도 감추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마치 다시 빛나는 해와 달처럼 우러러보고 자애로운 부모처럼 신뢰하며 전하의 건강을 축원하여 적어도 돌아가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날 것입니다. 당(唐)의 번진(藩鎭)들이 사납게 발호하였으나 황제의 조서(詔書) 한 장을 받들고는 교만하고 사납던 자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하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빨리 진휼을 실시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안정시키십시오. 신이 듣기에, “재물을 모으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을 나누어 주면 백성들이 모이므로, 어진 사람은 재물을 나누어 주어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자기 몸을 망치면서 재물을 늘린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재물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잃는다면 재물이 있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옛날 왕도정치를 행한 임금들의 정치에는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하면 반드시 내탕고(內帑庫)를 여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국가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서 재물을 나누어 구제하는 일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근래에 전하의 마음은 한결같이 매일 남쪽 하늘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생업을 잃었으며 농사일은 때를 놓쳤습니다. 난리를 피하여 살려고 도망친 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데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고생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전쟁터에 따라 나갔다가 죽은 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 처자식이 울부짖으며 애통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인하여 잠자리가 편하시겠습니까? 음식이 맛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정사를 시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신이 바라건대, 특별히 담당 관리에게 명하시어 빨리 창고의 곡식을 나누어 주어 흩어져 돌아다니는 무리들을 불러 모으고 저들의 생사여부를 탐방하여 골고루 진휼하여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들판에 널려있는 시신들도 모두 거두어 묻어주어서 까마귀밥이 되지 않도록 하여 저들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전하의 마음을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절실하게 씀씀이를 절약하고 재물을 소중히 여긴 뜻이 본래 백성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면 민심을 결집시키는 데 이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만약 국가재정이 부족하고 창고의 비축분으로 계속 잇대기가 어렵다면 내탕의 재물이라 할지라도 수량에 관계없이 특별히 나누어 주시어 지극한 정성과 사심이 없음을 보이신다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선조(宣祖)께 아뢰기를, “내탕의 재물을 담당 관리에게 맡기고 사유물로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잘 판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궁궐의 금령을 더욱 엄하게 하여 간사한 자들을 근절하십시오. 신이 듣건대, 정호(程顥)가 자신의 임금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하루 동안 훌륭한 사대부를 만나는 시간이 많고 환관과 궁녀들을 가까이 하는 시간이 적으면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환관과 궁녀들은 궁궐을 청소하고 좌우에서 시중드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혹 조심하지 않고 소홀하게 대하거나 지나치게 가까이 한다면 전하께 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역사가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무축(巫祝, 무당)과 같은 올바르지 못한 무리들과 여항(閭巷)의 천한 기녀들을 어찌 존엄하며 깊고 은밀한 곳에 출입하도록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를 우려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환이 있는 때에 만약 혹시라도 간사한 무리들이 연줄로 결탁하여 은밀하게 살펴서 궁중의 기밀과 전하의 비책을 밖으로 누설한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더욱 엄격하게 방비하여 간악한 싹을 근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자(朱子)의 봉사(封事)에 “덕이 있는 자를 채용하고 음악과 여색을 경계하며 경건한 자를 가까이하고 기예에 능한 자를 멀리하십시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부의 말이 외부로 나가지 않게 하고 외부의 말이 내부로 들어가지 않게 하며 뇌물을 통하지 않게 하고 청탁이 행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임금이 집안을 다스리는 도리입니다. 전하께서 잘 판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바른말을 구하는 길을 크게 열어 여러 사람들의 계책을 받아들이십시오. 신이 듣건대, 천하에 아무 일이 없으면 공경(公卿)의 말도 기러기의 깃털처럼 가벼우나 천하에 일이 발생하면 필부의 말도 태산(泰山)처럼 소중하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쓸 만한 것은 채택하고 쓸 수 없는 것은 버리면 됩니다. 말하는 자에게 죄를 주지 않으며, 그들의 말을 막지 않고 듣는 목적은 여러 훌륭한 계책들을 널리 구하여 한 가지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언로(言路)가 막힌 지가 오래되어 사대부들이 입을 다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설령 재주를 지니고 지략을 품은 선비와 의리를 흠모하여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신하가 있더라도 전하께서 어떻게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한 고조(漢高祖)가 직언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다면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그들의 재주를 펼칠 수 없었을 것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덕이 없었다면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자신들의 충성을 바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잘 판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구원병의 도움을 믿고 군사방비를 늦추지 마십시오. 신이 생각건대, 큰 나라는 약자를 구하는 의리를 가지고 있고 작은 나라는 원조를 요청한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국가를 재건(再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적국이 침략하여 대거 밀고 들어와서 팔도가 거의 함락되고 어가(御駕)가 피난을 가서 국가의 존망이 위기일발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여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저 남도의 소요는 보잘것없는 도적들의 장난이며 한 집안에서 창을 잡고 싸우는 것에 불과하므로 나라 안에서 군대를 불러 모아서 저들을 토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노비 중에 교만하고 횡포한 자가 있으면 자신이 직접 다스리면 되지 힘 센 이웃사람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상국(上國, 청국)의 군사를 움직여서 하찮은 적들을 상대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승전소식을 알려올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군비를 더욱 정비하여 철저하게 자강(自强)의 계책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니, 오로지 타인의 도움에만 의지하여 걱정 없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군제(軍制)는 유명무실하여 장수된 자는 정면 공격과 기습공격 및 임기응변 등의 전술을 알지 못하고 병사들은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방법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어 군비가 더욱 소홀해져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보잘것없는 적으로 인하여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즉각 소탕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시일을 끌다가 종국에는 상국에 원병을 요청하여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만약 이보다 더 위급한 일을 당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막겠습니까? 현재의 계책으로는 빨리 장수를 선발하여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병법에는 “임금이 장수를 가려 뽑지 못하면 자신의 나라를 적에게 주게 된다”라고 하였으며, 공자는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싸우게 한다면 이는 그들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잘 판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다섯 가지 일은 신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며, 나라 사람들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 것은 신의 죄이지만 알고서 바로 실행하는 것은 전하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시원하게 결단을 내려 빨리 시행하도록 명하시기를 매서운 우뢰나 단단한 금석처럼 하셔서 온 나라 사람들이 그 명령은 틀림없이 시행될 것이라고 믿도록 하십시오. 그런 뒤에 한편으로는 그들을 타일러 인(仁)으로써 회유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소탕하여 법으로써 잡아가두십시오. 그러면 도적을 따라 구차하게 연명하는 백성들은 감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감화되면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또 분수를 어기고 교화를 따르지 않는 도적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우면 부하를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부하를 의심하는 도적들이 근본을 생각하는 백성들을 회유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자기들끼리 원망하여 틈이 벌어진 무리들은 오래 지속되기 힘듭니다.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괴의 머리가 고가(藁街)에 걸려 천벌이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나머지 무리들은 무기를 버리고 농사에 전념하라는 교화에 귀의할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병이 나은 후에 몸조리하는 것이 어려우며, 난을 평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난을 평정한 뒤에 제대로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신은 병의 원인을 찾아서 한 번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의 원인은 물론 한 가지가 아니지만 그 근본은 단지 ‘사(私)’라는 한 글자에 있습니다. 사의(私意)가 제거되지 않으면 공도(公道)가 행해지기 어려움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옛날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로서 인심이 윗사람을 따르지 않기를 바라던 적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옛날 주자(朱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말하기를, “총명하신 폐하께서 어찌 반드시 성품이 곧고 명석하며 공정한 사람을 얻은 뒤에야 천하의 일을 맡길 수 있음을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항상 이러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비루한 사람들이 자리를 훔치도록 용납하는 까닭은 단지 한 순간 사심에 가린 것을 제거하지 못하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과 특별히 총애하는 부류들이 모두 법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품이 곧고 명석하며 공정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보상(輔相)으로 삼는다면 나의 일을 방해하고 나의 사람들을 해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발할 때 우선 이러한 사람들을 배척하여 도외시한 다음, 평소 감히 정색하여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을 뽑습니다. 또 그 중에서 지극히 어리석어 결코 임금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자들만 선발하여 벼슬자리를 주며, 반드시 현인군자들이 전혀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든 다음에야 그만둡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전에 이 글을 세 번씩이나 읽고나서, 이것이 만세토록 귀감이 될 만큼 절실함에 감탄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를 거울삼아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이 현자를 생각하셔서 성품이 곧고 명석하며 공정한 사람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그에게 일을 맡겨 성과를 이룩하도록 하고, 은(殷)의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믿고,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劉備)가 제갈공명에 의지하였듯이 그에게 두 마음을 갖지 않고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사의(私意)가 제거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제거되며 공도(公道)가 행해지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며, 모든 법도가 바르게 되고 온갖 교화가 새로워질 것이니 국운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비는 방법이 원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큰 근심은 성덕(聖德)을 계발시키고 많은 어려움은 나라를 흥성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재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은 하늘을 바라보고 전하를 우러르니 격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비답(批答)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모두 다 알았다. 이 논의가 사실이라면 모두 듣기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간혹 확실하게 지적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모두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해당 도(道)의 관찰사에게 알아보고 즉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연이어 장주(章奏)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공론(公論)이 들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백성들을 가렴주구하여 원망을 산 것에 대하여 논한다면 책무를 저버린 죄로 징계해야 할 것이다. 전 호남전운사(前 湖南轉運使) 조필영(趙弼永)에게 찬배(竄配)의 법을 시행하라”고 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초기(草記)에, “지금 부사과(副司果) 이설(李偰)이 올린 상소의 비지(批旨)를 보니, ‘이 논의가 사실이라면 모두 듣기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간혹 확실하게 지적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모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가 올린 소본(疏本)을 가져다 보니, 조필영, 김창석, 조병갑, 이용태, 김문현, 민영수 및 여러 고을의 수령을 논핵(論劾)하였는데, 김문현, 조병갑, 이용태, 조필영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깊이 통찰하셔서처분을 이미 내렸으니, 이제 다시 아뢰어서 재가를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 균전사(前 均田使) 김창석이 백지징세(白地徵稅)한 것이나 민영수가 양식을 배에 싣고 바다로 도망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논의가 준엄하고 여론이 더욱 들끓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령들 가운데 난의 기미를 보고 산으로 달아난 자도 있고 혹은 화를 피하여 관할 지역을 벗어난 자도 있으며 심지어는 공무를 핑계로 감영에 몸을 의탁한 자도 있는데, 이들은 성명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관계된 것이 매우 엄중하니 모두 해당 관찰사가 철저히 조사하여 조속히 보고하게 하여 품처토록 하겠습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주석
전운사(轉運使) 세곡(稅穀)의 징수·운송·수납을 관리하기 위하여 1883년(고종 20)에 설치된 전운서(轉運署)의 책임자이다. 납세자에게 부담하던 운반비[船價]의 증가와 전운서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은 전운사의 혁파를 주장하였으며, 곧이어 실시된 갑오개혁으로 세금이 금납화 되면서 혁파되었다.
감결(甘結)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리는 문서 양식으로 내용은 상급 관청의 지시와 명령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암행어사도 임무 수행과 관련해 수령에게 발급할 수 있었는데, 이때 관인(官印) 대신 마패(馬牌)를 문서의 여러 곳에 날인 하였다.
균전사(均田使) 토지의 등급과 과세를 조정하던 양전(量田)을 담당한 관리이다.
백지징세(白地徵稅) 세정(稅政)의 문란으로 빚어진 불법 징세(徵稅) 방법으로 전정(田政) 폐해의 하나이다. 실제로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가전적(假田籍)을 만들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한 것이다.
조경묘(肇慶廟)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의 성관인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과 시조비(始祖妃)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전주(全州) 경기전(慶基殿) 경내의 북쪽에 있다.
경기전(慶基殿)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이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 부성이 점령되려 하자 영정을 위봉사(圍鳳寺)에 안치하였다가 그해 7월 17일 다시 전주로 옮겨 왔다.
경연(經筵) 임금이 정기로 경전과 정무에 필요한 내용을 공부하는 기구로써 경연관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민고(民庫) 관아의 임시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해마다 군민(郡民)으로부터 거둔 곡식과 돈 따위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분세(分稅) 잡세(雜稅)의 일종으로 물건 값에 따라 세율을 정하여 받았다.
내탕고(內帑庫) 조선시대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던 어고(御庫)이다. 내수사(內需司)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내탕고는 곧 내수사를 지칭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다.
고가(藁街) 한(漢) 장안(長安)의 거리이름으로 반역자나 적괴를 참수하고 그 머리를 걸어두었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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