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14 상소 부서[卷十四 疏 附書]
왜구를 논하고 아울러 사간을 사임하는 상소[論倭寇仍辭司諫疏][1894년 6월 15일에 두 번째로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되돌려 주었다. 당시 도승지는 김명규이다.]
신이 전에 소장(疏章)을 하나 올린 뒤에 해도(該道)에서 조사하라는 비답을 받았으므로 직접 뵙고 아뢰어 품처를 하기 전에는 의리상 감히 다시 아뢸 수는 없습니다. 일본군대가 성에 들어온 이래로 분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문을 닫아걸고 두려워 웅크리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대간(臺諫)의 직책에 연거푸 임명하시니 신은 진실로 놀랍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삼가 일전에 내리신 전교를 읽어보니 “내가 덕이 없어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였다”라고 하시고, 또한 “담당 관리가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대각(臺閣)의 신하들은 입을 다물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니 더욱 송구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근자의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도적들의 노략질은 지나치게 심하고 사설(邪說)은 횡행하고 있어, 불행히도 주자(朱子)가 말한, ‘밖으로는 이웃나라의 근심이 있고 안으로는 사악한 도적들이 있어서 밤낮으로 협공하는’ 상황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의 교린(交隣)의 법으로 꾸짖어도 적도들은 복종하지 않고 선왕(先王)이 오랑캐를 물리친 의리로 타일러도 시정배들은 도리어 비웃으니 한 줄기 갈대와 같은 신의 힘으로는 거기에 맞설 수가 없습니다. 근세의 이른바 개화(開化)는 세계 각국의 공통 사항이며 교섭은 각국에서 모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자주(自主) 여부는 질문거리가 되지 못하며 국가의 풍속과 정법(政法)은 각자의 규율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런 이유 없이 군대를 움직여서 남의 나라 도성을 핍박하고 밤을 틈타 궁성을 넘으며 군대를 배치하고 포위하여 지키니 이것이 과연 공법(公法)에 있는 것입니까? 일부러 불화의 꼬투리를 찾아 비리를 추궁하며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하여 제멋대로 바꾸고 고치는 것이 과연 약조에 기재된 것입니까? 저들이 잘못되었고 우리가 올바르다는 사실은 분명할 뿐만이 아닌데도 도리어 우리의 기운은 날로 저하되고 저들은 날로 높아지며, 우리들의 세력은 날로 위축되고 저들은 날로 방자해지며, 잘못된 자들은 더욱 기세를 떨치고 올바른 자는 더욱 위축되고 있습니다. 저들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우리는 임시방편만 세우고 있으며, 저들은 우리를 협박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럭저럭 지내는 것을 묘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 40여 일 동안 저들은 이미 거만하게 스스로를 강대하다고 여기면서 우리를 이웃나라로 대우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습니까?
처음에는 5개 조항이었던 것이 27개 조항으로 늘어났는데, 이 27개 조항이 또 몇 백 개의 조항으로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연거푸 속임수를 쓰니 그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담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공법과 약조(約條)의 내용을 직접 거론하여 맹약을 어긴 저들의 죄를 성토한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모두들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오로지 순종하며 목전의 무사함만 바랍니다. 임시방책으로 때우는 것을 묘책으로 여기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완곡하게 말하는 것을 상책으로 여깁니다. 심지어는 서로 시무(時務)를 견강부회하여 자신의 주장을 꾸며서 성총을 어지럽히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몰래 이득을 취합니다. 공경사대부(公卿士大夫)들이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모두 두려워서 감추기만 하고 아무도 이를 언급하여 국가의 체모를 높이고 임금의 치욕을 갚으려는 자가 없으니 이러고서도 국가에 신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를 매우 애통하게 여깁니다.
신은 이른바 27개 조항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종횡으로 뒤섞여서 파악하기가 곤란하였으나 그 요지는 우리를 세력으로 위협하고 이익으로 유혹하여 우리 선왕(先王)의 법을 파괴하여 저들 이적(夷狄)의 풍속을 따르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이 말하는 관직제도를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이 말하는 재정의 개편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말하는 법률재판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말하는 군비와 경찰 및 교육행정 등의 각종 사무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외적인 것들입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결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의 머리를 깎게 하고 우리의 복장을 바꾸게 하더라도 그것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아! 그것을 따르자니 의리상 그렇게 할 수가 없고 따르지 않자니 세력으로 저들을 대적하기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신은 본디 어리석고 미천한데다 군사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 번 생각하여 얻은 한 가지 견해를 하늘의 뜻에 질정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증험해 보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이치가 2가지가 있으며, 일의 형편을 참작해 보아 저들이 반드시 물러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2가지 있으니, 전하를 위하여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지금 천하에 피비린내가 풍긴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짐승과 새의 발자국이 세상에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옛 성인들이 남기신 제도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나 오직 한 줄기 약한 빛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습니다. 하늘이 보호하고 아끼심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뜻에 질정해 보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아! 저들은 본래 우리와 원수지간으로 멀리는 임진년의 난을 일으켰으며 가까이는 갑신년의 변고를 야기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저들과 강화를 맺은 것이 비록 기미(羈縻)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여론의 공분은 끝내 가시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최근 항간에서는 비록 어리석은 일반 백성조차도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하며 팔뚝을 걷어붙이고 손바닥을 치면서 울분을 토로하고 욕을 합니다. 심지어 귀머거리와 절름발이까지 모두 기세를 올리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고자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증험해 보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저들이 지금 우리들의 허약함을 업신여겨 감히 의롭지 못한 욕심을 내어 우리들이 대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갑자기 우리의 도성으로 침입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국들이 틀림없이 남의 일 보듯 하지 않을 것이며 각국 공사(公使)와 맺은 조약이 아직 파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쉽게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저들은 일을 경솔하게 처리한 실수를 면하기 어려우며 스스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일의 형편을 참작해 보아 저들이 반드시 물러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저들은 더운 여름에 군대를 움직였으므로 이미 전투의 금기를 어겼으며, 저들 병사들은 우리의 풍토에 익숙하지 않아 병에 많이 걸렸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비록 피폐하다고 하지만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실패한 일은 고금에 널리 알려진 것 입니다. 저들이 오래도록 머물면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소득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반드시 물러갈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저들을 배척하고 굳게 막으면서 싸워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곧 군비를 많이 들이지 않고도 앉아서 극악한 도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옛 사람이 조정에서 전투의 승리를 거둔다고 하는 것이니 또한 훌륭하지 않습니까?
아! 관석(關石)과 화균(和勻)이 모두 왕의 창고에 있으며, 문왕(文王)의 계책과 무왕(武王)의 공렬이 해와 별처럼 빛납니다. 관록(官祿)과 전장(典章)이 여기에 있고, 재부(財賦)와 법률(法律)이 여기에 있으며, 병제(兵制)와 거규(擧規)가 여기에 있습니다. 큰 벼리와 세세한 조목들이 모두 자세하게 갖추어지고,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대를 이어 전하에게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옛 법을 이어받아 이를 잘 실천하면서 바꾸지 않는다면 외국이 어떻게 업신여겨 침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훌륭한 법과 좋은 규정도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기므로 융통성 없이 옛 것을 지키기만 하고 바꾸지 않는 것은 훌륭한 계승방법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잡는 재주와 국운을 영원히 유지해달라고 하늘에 빌 뜻을 가지고, 즉위하신 이래 경계하고 삼가며 걱정하고 힘쓰시면서 나라를 중흥시키고자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인물을 등용하지 못하여 아직까지 이루신 것이 없습니다. 안으로는 백성을 수탈하는 신하들이 많고 밖으로는 외교를 담당할 사신이 부족합니다. 뇌물을 써서 임금의 은총만 얻으려고 하고 기이한 물건과 노리개로 오직 아첨만을 일삼습니다. 외국과 국교를 맺었으나 새로운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며 제도를 바꾸었으나 공연히 옛 법제만을 어지럽혔습니다. 재부(財賦)에 관하여 말하면 탁지(度支, 호조)와 혜국(惠局, 선혜청)은 한갓 이름만 남았으며, 법률에 관하여 말하면 금오(金吾, 의금부)와 경조(京兆, 한성부)가 담당하는 직무가 무엇입니까? 군제(軍制)에 관하여 말하면 장신(將臣)들은 자리나 채우고 있으며, 학규(學規)에 관하여 말하면 문임(文任)이 격식만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등용하자고 누가 주장하였으며 관청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는 것을 누가 주관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시키는 대로 대답이나 하고 문서나 봉행할 뿐입니다. 방백과 수령들은 재물을 탐하는 것이 습속이 되어 각 관청의 업무는 자연히 소홀해졌으며 이렇게 쇠퇴함이 오래 지속되어 폐단은 이미 고질이 되었습니다. 적국이 내정에 간섭함에 이르러서는 치욕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옳은 것을 아뢰고 잘못된 것을 바꾸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은 대신의 일이며, 훌륭한 자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서 세상의 풍속을 맑게 하는 것도 대신의 직무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훌륭한 정치를 하였던 임금은 반드시 유능하고 도덕적인 인물을 구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스스로 성헌(成憲)을 잘 따랐으니 어찌 성덕(聖德)이 부족함을 걱정하였으며, 담당관리가 각자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였으니 어찌 대간(臺諫)들이 직언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아셨으면 이와 같이 하지 않으신 것이 전하의 약이 되며, 담당 관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면 이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관리들의 약이 됩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심하면서 힘써 개선하도록 노력하신다면 난세를 계기로 치세를 이룩하는 조짐과 재앙이 바뀌어 복이 되는 기미가 단지 마음 한 번 바꾸는 사이의 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임시방책을 강구하는 것은 우리 전하에게 달려있으며, 시의에 맞추어서 바로잡는 것은 우리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경장(更張)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직접 경장하고 징벌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직접 징벌합니다. 바로잡고 개혁하는 것을 누가 감히 그르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지금은 저들이 감독하며 독촉하고 있습니다. 조처할 일이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법을 고치는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지시를 받들라고 하고, 우리가 우리의 폐단을 바로잡는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라고 합니다.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한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며 총재관(總裁官)의 임명 또한 잘못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저들의 입을 거치자 그것은 바로 빛을 잃었으며 도리어 천하 만세의 비웃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밝고 지혜로우신 전하께서 가려지는 바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내정을 다스리고 외적을 물리치는 방법은 다름이 아닙니다. 먼저 내부의 사악한 도적을 제거한 뒤에 이웃 도적의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재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은 또 생각건대, 현 시기에 논사(論思)의 직책을 맡을 관리는 특히 신중하게 선발해야 하니 결코 신과 같은 자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안효제(安孝濟)와 권봉희(權鳳熙)를 감등(減等)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번 일은 공의(公議)가 오래도록 막혀 전하께서 후회하실 일이 있을 것 같아 이러한 권여(權輿)의 조치가 있었습니다. 대각(臺閣)의 신하로 있는 자들이 전하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그 아름다움을 받들어서 사면을 청할 겨를도 없는데, 도리어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여 이렇게 형식적인 말로 논계(論啓)하였으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대각의 여러 신하들이 관례에 따라 신의 이름도 거기에 함께 집어넣었습니다. 신은 병으로 누워 있다가 나중에 이 소식을 들었으나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이렇게 어리석고 못난 신이 어찌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바치고 임금의 허물이 없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상소를 올리려고 할 때 특별히 체차(遞差)를 받았으니 신은 더욱 감격하고 부끄러워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견마(犬馬)처럼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심정을 이길 수가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