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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왜구를 논하고 아울러 사간을 사임하는 상소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06월 20일
일러두기

중국을 배반하지 말고 왜구를 물리치라고 청하는 상소[請勿背中國斥絶倭寇疏][1894년 6월 20일에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되돌려 주었으며, 21일에 왜적이 대궐을 침범하였다.]

≪결락≫

적이 도성을 핍박하여 임금이 위태롭고 욕을 볼 때는 바로 신하가 목숨을 바칠 시기입니다. 그런데 신은 그동안 두 번이나 대간(臺諫)이 되어서도 한 마디 말도 진술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가볍습니다. 과거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은 언관의 직책에 있지 않았지만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서 왜국의 사신을 참하고 중국에 아뢰라고 청하였습니다. 신의 조상인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는 재랑(齋郞)의 직책에 있으면서 능침에 곡을 하고 물러나와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상소를 올려 친정(親征)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자주(自主)를 하라고 추궁하는 것은 길을 빌려달라는 계책보다 더 흉악하며 포위된 성에서 곤욕을 치르는 것은 빈(邠) 땅을 떠난 치욕보다 더 심합니다. 그런데 신은 한 마디 말을 꺼내어서 국가의 체모를 높이고 적의 간담을 꺾지 못하여 현신(賢臣)을 배반하고 조상을 망각하였으니 어찌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아! 차마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의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고 강제로 변혁을 시키려고 하니 이는 진정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치욕입니다. 그런데 끝내 중국을 배척하라는 말을 제멋대로 글로 적어 어려움 없이 통지하고 재촉하며 위협하니, 이 지극히 흉악하고 무도한 행동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저들의 속마음은 마치 폐나 간을 보는 것처럼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저들은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여 겉으로는 마치 우리를 돕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 자주를 권하여 겉으로는 마치 존중하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들을 고립시키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강해지고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 저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유혹하여 우리가 협조하지 않자 위협하고, 위협하여 자신의 뜻이 실현되지 않자 감히 들어보지도 못하고 따를 수도 없는 주장을 늘어놓으며 이렇게 우리들을 핍박하지 않습니까?
아! 저들의 속마음은 전하께서도 통촉하시는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을 배반할 수 없고 저 적을 따를 수 없음은 분명할 뿐만이 아니라 어리석은 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중국은 여러 세대를 섬겼으므로 분의(分義)가 이미 정해져 있으나 저들 적(賊)은 조종(祖宗)의 원수로서 만세토록 보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중국은 우리를 정성으로 대우하였으므로 우리는 중국에 공경하게 예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저들 적은 대대로 동쪽에 이웃하면서 항상 우리를 침략하여 욕보였습니다. 의리로 따져보면 이와 같습니다.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상황을 염려하므로 설령 우리를 친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우리를 존속시키려고 하지만, 저 적은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므로 겉으로는 우리를 돕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없애려고 합니다. 중국은 여전히 강력한 진(秦)의 군대와 같은 형세이고 저들 적은 지백(智伯)처럼 반드시 패망할 조짐을 갖고 있습니다. 일의 형세를 살펴보면 이와 같습니다.
갑신년(甲申年, 1884)의 사건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 저 적은 우리에게 원수이고 중국은 우리에게 은인입니다. 위로는 진신(縉紳, 사대부)에서부터 아래로는 종, 아녀자, 어린이, 귀머거리, 절름발이에 이르기까지, “차라리 중국을 섬기다가 망할지언정 저 적을 추종하여 살지는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징험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그밖에 또한 이해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중국은 우리의 전장(典章)과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을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두었습니다. 그래서 300년이 지나도 우리나라의 풍속은 예전과 같았으며 우리의 위상은 자연히 높아졌습니다. 저들 적은 우리의 법도를 바꾸도록 하고 우리의 관직제도를 바꾸도록 하였으며 우리의 학규(學規)를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자신들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여 우리의 위상은 자연히 낮아졌습니다. 만약 이남규(李南珪)가 논한 것처럼 한결같이 옛 법규를 따른다면 이름은 비록 남에게 예속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주(自主)인 것이며, 만약 저들의 말을 따른다면 이름은 비록 자주이지만 실제로는 남에게 예속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어 잘 살피십시오.
아! 지금 논의하는 자들 중에서 어떤 이는 중국이 우리를 병탄하려는 형세를 갖고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일본이 우리를 병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사람들을 동요시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신이 밝혀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강대한 이웃나라 사이에 끼어서 국세가 미약하여 스스로 떨치지를 못하였습니다. 신라와 고려 이후 비록 명목적으로는 복속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실제로는 자주를 상실하지 않았으며 다른 나라를 공격할 힘은 없었으나 스스로를 다스리기에는 넉넉하였습니다. 기풍이 그러하였으며, 인심이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중국이 약한 나라를 겸병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수(隋)와 당(唐)의 전철을 다시 밟지는 않을 것이지만, 일본이 의롭지 못한 욕심을 품는 것은 임진년의 교훈이 여전히 어제 일 같습니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며 다른 염려는 확실히 없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지난날의 법규를 바꾸지 않고 자강(自强)의 방도를 힘써 강구하는 것뿐입니다.
아! 저들 적은 바다의 섬에서 자립하여 대대로 악한 짓을 일삼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우리나라가 중국과 땅을 접하고 있어서 중국을 침략하고자 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방패막이가 되고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하면 중국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을 미워하여, 두 나라를 이간질해서 서로 도와주지 못하도록 도모하였습니다.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전수해온 심법(心法)입니다. 지난 임진년에 우리나라가 왜군을 인도해 침략한다는 소문이 명나라에 유포되자 신종(神宗) 황제의 성스러운 덕으로도 여전히 우리에게 의심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변명하여 아뢴 뒤에야 그 일이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그 때보다 더 심각하니 또 어떻게 그런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겠습니까? 신은 생각이 여기에 미쳐서는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면서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그러나 도대(道臺) 원세개(袁世凱)가 우리나라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우리가 결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저들이 평소 교활하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다 알았을 것이니, 다만 이를 믿고 스스로 위로할 뿐입니다. 신은 전에 원세개가 올린 글 가운데 “전하의 나라 내부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살릴 방도를 찾는다”는 말이 있음을 보고 오늘날의 변고가 있을 것임을 예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왜국을 꺼려서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옥균 일당 중에 목숨을 보전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사방의 적들과 내통하며 재앙의 기틀을 빚어 왔으며 김옥균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더욱 이를 갈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난리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는 공자가 말한, “계손(季孫)의 근심이 전유(顓臾)에게 있지 않고 집 안에 있다”는 것이니 통탄함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지금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고 있어서 『춘추(春秋)』 한 권을 읽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평소 소중화(小中華)로 칭하면서 홀로 선왕의 옛 제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하루아침에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로 바뀐다면 이는 한결같이 이어져 내려온 천리(天理)를 전하에게 이르러서 끊어버리는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나라와 중국은 국가의 존망을 함께한다는 것이 의리와 상황으로 보아 필연적입니다. 폐하께서는 성지(聖志)를 굳게 가지시어, 간사한 자들에게 미혹되지 마시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가려지지 마시고, 말만 떠벌리는 자들에게 절대로 동요되지 마십시오. 정부를 엄히 단속하시고 저들 사신들을 물리치며, 빨리 사신을 청국에 파견하여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알리며, 또 각국에 통지하고 팔도에 조문(詔文)를 내려 깨우치십시오. 그런 뒤에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쳐 죽기로 각오하고 싸운다면 구원병이 반드시 이를 것이고 의병이 일제히 일어날 것이니, 저 일시적으로 날뛰는 적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전하께서 재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석
재랑(齋郞) 당시 이귀는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었다.
행재소(行在所) 국왕이 궁궐과 도성을 떠나 지방으로 행행할 때 행궁(行宮) 또는 이궁(離宮)에 도달하기 전에 머물던 중간 휴게소이다.
길을 빌려달라는 계책 임진왜란 때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빈(邠) 땅을 떠난 치욕 주(周)의 고공단보(古公亶父)가 훈육(薰育)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빈(邠)에서 기산(岐山)의 아래로 옮겨간 일을 말한다.
지백(智伯) 춘추시대 진(晉)의 대부(大夫)로 진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으나 한(韓), 위(魏), 조(趙) 등의 세경가(世卿家)의 연합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진은 한, 위, 조의 3나라로 분리되는데 이때부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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