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 올리는 글[上政府書]
저는 피눈물을 흘리며 두 번 절하고 여러 상공(相公) 합하(閤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생각건대, 지금 국운이 불행하여 임금의 안위가 실오라기에 매달린 것보다 더 위태롭고 종사(宗社)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신하된 자가 일각이라도 살려고 도모하여 이미 천지간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일전에 소장(疏章)을 작성했으나 미처 올리기 전에 갑자기 이 변란을 만나 올릴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천만 번 생각해도 일이 종묘사직에 관계되므로 도리상 비통함을 참고 원한을 품으며 팔짱을 끼고 묵묵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몽매함을 무릅쓰고 글을 올리니 여러 합하께서는 심기를 평온하게 하여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 차마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 적은 남의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고 강제로 변혁을 시키려고 하니 이는 진정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치욕입니다. 그런데 끝내 중국을 배척하고 자주독립을 하라는 말로 위협하였으며, 심지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우리의 궁문을 불태우고 우리의 임금을 협박하며 모수(毛遂)와 조말(曹沫) 같은 도적의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감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저들 적의 음모와 흉계는 논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간사한 주장은 청국을 따르면 위태롭고 왜(倭)에 붙으면 안전하다고 하며 성총을 어지럽히고 충언(忠言)을 차단하며 오늘날의 재앙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에, 청국을 배반할 수 없고 저들 적을 따를 수 없음은 분명할 뿐만이 아닙니다. 청국은 여러 세대 동안 복종하였으므로 분의(分義)가 정해져 있으나, 저들 적은 조종(祖宗)의 원수로서 만세토록 보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청국은 우리를 정성으로 대우하였으므로 우리는 청국에 공경하게 예를 갖추었으며, 저들 적은 대대로 동쪽에 이웃하여 있으면서 항상 우리를 침략하여 욕보였습니다. 의리로 따져보면 이와 같습니다. 청국은 순망치한의 상황을 염려하므로 설령 우리를 친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우리를 존속시키려고 하지만, 저 적은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므로 겉으로는 우리를 돕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없애려고 합니다. 청국은 여전히 강력한 진(秦)의 군대와 같은 형세이고 저 적은 지백(智伯)처럼 반드시 패할 조짐을 갖고 있습니다. 일의 형세를 살펴보면 이와 같습니다. 갑신년(甲申年, 1884)의 정변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저 적은 우리에게 원수이고 청국은 우리에게 은인입니다. 최근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에서 귀머거리와 절름발이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차라리 옛 약조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새 법령을 따르며 살지는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징험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그밖에 또 이해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청국은 우리의 전장(典章)과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을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두었습니다. 그래서 300년이 지나도 우리나라의 풍속은 예전과 같았으며 우리의 위상은 자연히 높아졌습니다. 저 적은 우리의 법도를 바꾸도록 하고 우리의 관직제도를 바꾸도록 하고 우리의 치국 방침을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자신들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우리의 위상은 자연히 낮아졌습니다. 만약 윤긍주(尹兢周)가 논한 것처럼 빈 지위만 차지하고 있거나 이남규(李南珪)가 논한 것처럼 한결같이 옛 법규를 따른다면 이름은 비록 남에게 예속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주(自主)인 것이며, 만약 저들의 말을 따른다면 이름은 비록 자주이지만 실제로는 남에게 예속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입니다.
아! 저 적은 바다의 섬에서 자립하여 대대로 악한 짓을 일삼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우리나라가 중국과 땅을 접하고 있어서 중국을 침략하고자 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방패막이가 되고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하면 중국이 우리를 보호하여주는 것을 미워하여, 두 나라를 이간질해서 서로 도와주지 못하도록 도모하였습니다.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전수해온 심법(心法)입니다. 지난 임진년에 우리나라가 왜군을 인도해 침략한다는 소문이 명국에 유포되자 신종(神宗) 황제의 큰 덕으로도 여전히 우리에게 의심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변명하여 아뢴 뒤에야 그 일이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며 지금의 사정은 과거의 사정보다 더 심각합니다. 만약 죄를 추궁하는 군대가 대거 쳐들어온다면 장차 무슨 말로 변명을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청이 밖에서 공격하고 왜가 안에서 공격하여 안팎으로 적을 맞이하면 손을 쓸 수도 없이 바로 멸망할 것입니다. 통곡하고 통곡합니다.
오늘날 의론하는 자들은 “적이 이미 도성까지 침입하여 사태가 이처럼 위급하여 비록 저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저들의 명령을 준수하여 임금이 재앙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럴듯한 것 같으나 단지 궁녀나 환관들의 충성에 불과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마음을 굳게 가지시고 한결같이 엄히 막는다면 저들이 비록 불량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형편상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령 저들의 말을 따르고 저들의 법령을 준수하여 주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정치를 회복하고 한(漢)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성세를 이룩하더라도 일단 저들의 입을 거쳤으므로 그 빛은 신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조종(祖宗)이 남기신 제도를 허물고 저들 이적(夷狄)의 풍속을 따르겠습니까?
아! 지금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고 있어서 『춘추(春秋)』 한 권을 읽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평소 소중화(小中華)로 칭하면서 홀로 선왕의 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로 바뀐다면 이는 한결같이 이어져 내려온 천리(天理)를 우리 전하의 시대에 이르러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대신(大臣)된 자가 어찌 천하 만세의 주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또 몸이 오싹하고 가슴이 섬뜩합니다. 바라건대 여러 합하께서는 사람이 보잘 것 없다고 하여 그 말을 버리지 마시고 명나라 의종(毅宗)의 공렬을 주상께 진달하여 힘쓰시도록 하고, 제갈공명이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는 것처럼 스스로 맹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면려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