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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홍주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여덟 번째[與洪牧書八]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현재의 계책은 첫째는 군사를 잘 선발하는 것이며, 둘째는 성보를 수축하는 일 뿐입니다. 군사를 잘 선발한 뒤에야 토벌을 할 수 있고 성보를 수축한 연후에야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군사는 정예(精銳)가 중요한 것이지 많은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1만 명의 군사를 징발하는 것이 수천 명을 소모(召募)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은 옛 사람이 군사의 선발을 중요시하였던 이유입니다. 쳐다보면서 공격하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우나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것은 계란을 누르는 것처럼 쉬우며, 평지의 견고한 성은 산성의 우뚝함보다 못하니, 이것이 옛날 사람이 성보를 수축하였던 이유입니다. 최근의 일로써 살펴보면 관군들은 모두 훈련받지 못한 병졸이며, 유병(儒兵)들은 모두 조련 받지 못한 백성들이니, 이는 시장사람들을 몰아서 전투를 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행히 적도들도 모두 시장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군의 숫자가 많고 적의 숫자가 적으면 적이 패하고 아군의 숫자가 적고 적의 숫자가 많으면 적이 승리하였으니, 승패의 운명은 단지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었지 군사의 강약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예산(禮山)에서의 패배는 적의 숫자가 많고 아군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침략해 올 때 관군들은 숫자는 많으나 겁을 먹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고, 왜병(倭兵)들은 숫자는 적지만 끝내 그들의 힘을 다 발휘하였으니, 군사의 훈련 상황이 이처럼 현격합니다. 비록 한 번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이를 이웃나라에 알려서는 안됩니다. 이런 군사들로는 토비(土匪)를 토벌하는 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외적의 침략을 막는 데 쓸 수 있겠습니까? 식자들이 이를 개탄하고 걱정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군사의 선발문제가 시급한 까닭입니다.
적을 방어하는 방법으로는 성을 축조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근래 여러 고을이 방어를 하지 못하고 함락된 것은 비단 계책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홍양은 방어할 성을 가지고 있지만 통제하며 연락할 곳과 험준한 의지처가 없으며 평지의 넓은 벌판에 사방은 탁 트여있습니다. 가령 적도(賊徒)들이 수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해처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외부에서 구원하는 길을 차단하여 싸움을 걸어오지 않고 오랜 시일을 버틴다면 승패의 운명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행이 이 적들은 장기적인 계책이 없으며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바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러한 성으로 토비는 혹 방어할 수 있으나 외적의 침략은 결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보의 수축이 시급한 까닭입니다.
병사를 선발한다는 것은 옛날 선봉(先鋒)을 선발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 사람은 “선봉을 선발하지 않는 군대는 반드시 패한다”고 하였습니다. 과거 당 태종(唐 太宗)이 정예병사 수천 명을 선발하여 검은 군복에 검은 갑옷을 입혀 좌우의 두 부대로 나누어 항상 선봉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송(宋) 대의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유기(劉錡) 등은 수하의 군사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적을 만나면 반드시 승리하였던 이유는 그들이 모두 정예군사였기 때문입니다. 유린(劉麟)이 70만의 군대로 회수(淮水) 가에서 패하였던 까닭은 그들이 민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선봉이란 무엇입니까? 천하의 사람들은 겁약한 자가 10분의 9를 차지하고 용감한 자는 1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평소 같은 대오로 편재되어 있으면 똑같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강한 적을 만나면 겁약한 자는 먼저 무너지고 용감한 자 역시 달아나지 않을 수 없어 세찬 물결처럼 서로 이끌어서 모두 무너지니, 비록 용맹한 장수가 몰아붙이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관군과 유병(儒兵)의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씩씩하고 용감한 자를 가려낸다면 100명 중에서 10명을, 1,000명 중에서 100명을 뽑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연호(沿湖)의 여러 고을에 명을 내려 유학(幼學), 한량(閑良), 공사(公私)의 천민(賤民), 관속(官屬), 재인(才人), 승도(僧徒), 피장(皮匠)을 막론하고 용감하고 튼튼한 자를 모집하도록 하십시오. 또 그들이 각각 여러 명을 천거하도록 하되, 고을의 크기에 따라 100인, 50∼60인 혹은 20∼30인을 선발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들에게 면천(免賤)을 시켜주어 그들의 신분을 높여준다거나 혹은 많은 상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주고, 일일이 불러서 만나보되 먼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다음으로 그들의 힘을 시험하고 또 그들에게 무예를 가르치십시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수천 명의 정예 병사를 얻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선봉으로 삼아 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하는데 사용하신다면, 옛날의 배외군(背嵬軍)도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은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위장술을 쓸 때나 사용하지 어찌 적과 부딪혀서 그들을 함락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전투는 상황이 승리를 결정짓고 군사는 사기에 따라 그 쓰임을 나눕니다. 형이 이를 유념한다면 군국(軍國)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성보를 수축하는 것은 곧 옛날의 병법에서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들판을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맹자(孟子)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는 땅의 형세로 인한 이로움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아성(亞聖)의 재주로 전국시대에 늙어가면서 어찌 후세에 교훈으로 남길 만한 견해가 없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바다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으며 산천의 형세가 험난합니다. 그래서 군사작전에서는 공격하여 탈취하는 데는 불리하고 방어하는 데는 유리합니다. 방어하는 방법은 산성만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 적들이 창졸간에 들이닥쳐 팔도가 거의 함락되었으나 선산(善山)의 백성들은 금오성(金烏城)을 수비할 수 있었으며, 문화(文化)의 백성들은 구월산성(九月山城)을 수비하였고, 권원수(權元帥, 權慄)는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지켰으며 학관(學官) 안정란(安廷蘭)은 유민들을 데리고 인천산성(仁川山城)을 수비하였습니다. 산성의 효력에 대한 과거의 예가 이와 같습니다. 병법에 “제후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전투를 한다면, 그 땅이 곧 산지(散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혼란한 시기에 백성들이 모두 난을 피하여 흩어져 달아나 마을은 텅 비고 인적이 끊어지기 때문에 전투상황은 더욱 고립되어 관군은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의지할 만한 험준한 지역을 만들어두었다가 변란이 발생하면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데리고 옮겨간 뒤, 식량을 운반하여 들판을 비우고서 적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도망가지 않고 의지처를 가지고 공사(公私)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지킬 것이니, 비록 백만의 강적이 있더라도 하나의 작은 성보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지 않습니까? 대체로 홍양 인근에는 성보를 만들 만한 곳이 적지 않습니다. 진(鎭)으로 삼아서 홍양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는 월산(月山)만한 곳이 없고, 가까이 있으면서 도와줄 수 있는 곳으로는 용봉(龍鳳)만한 곳이 없습니다. 이 두 곳은 실로 홍양의 요충지이니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마치 도성의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은 곳입니다. 만약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면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두 지역에 성보를 수축하는 공사는 바로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임무입니다. 또 여러 고을에 명을 내려 옛 성보가 있는 곳은 그 터를 기반으로 수축을 하고, 성보를 쌓을 만한 곳은 적절함을 살펴서 새로 만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관아는 지킬 수 있는 방도를 가지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성보는 곳곳이 서로 바라다 보이도록 많이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들은 홍양에 대하여 마치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고 자제가 부형을 지키는 것처럼 성세(聲勢)가 서로 응하고 명령이 통할 수 있으니 성공의 계책으로 이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형이 이를 유념한다면 군국(軍國)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아! 형은 지금의 시대가 어떤 시대라고 생각합니까? 모기는 피부를 깨물지만 쥐는 달게 여기며, 여우는 얼굴을 바꾸지만 고래는 머리를 내밀지 않습니다. 어진 군자가 이러한 때를 만난다면 어찌 감히 운명에 맡기고서 덤덤히 아무런 걱정이 없겠습니까? 만약 형이 난리를 만나 피할 길을 도모하여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고 집안을 보전할 마음이라면 그뿐입니다. 그렇지 않고 제갈공명이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나 악무목(岳武穆)이 등에 글자를 새겨 국가의 은혜에 보답한 일을 자임하며 천하에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한다면, 군사가 없으면 토벌할 수가 없고 성이 없으면 지킬 수가 없으니 군사를 선발하고 성보를 수축하는 것이 실로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군사제도가 해이해져서 와해될 근심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 일을 맡은 사람들은 혼미하여 알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통곡과 눈물이 나오고 미친 듯이 울부짖게 됩니다. 미치광이의 말도 가려서 받아들이는 형의 도량으로 만약 나의 의견을 선택하여 쓸 뜻이 있다면 이른바 정예 병사를 선발하고 성보를 수축하는 사업이 하기 힘든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간절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사항은 군율을 엄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군대제도는 반드시 일정한 규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써 감싸는 것은 오기(吳起)가 종기를 빤 것이고, 법으로서 결단하는 것은 제갈량이 친구를 처형한 것입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군율을 엄격히 시행해야 합니다. 군율을 엄격히 시행하는 것은 과감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군율을 엄격하게 하지 않고 오로지 은혜만을 위주로 한다면 군사들은 나를 적처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그들을 위험한 전쟁터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더라도 말을 듣겠습니까? 곽자의(郭子儀)가 관대하게 군사들을 다스린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가 같지 않고 상황이 다릅니다. 형은 다시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주석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유기(劉錡) 모두 남송(南宋) 대의 장군으로 금(金)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유린(劉麟) 송(宋) 대 유예(劉豫)의 아들로 자는 원서(元瑞)이다. 아버지를 따라 금(金)에 항복하였다.
배외군(背嵬軍) 남송(南宋) 대 금(金)의 침공을 막아내었던 악비(岳飛)의 친병(親兵)과 특부수대를 말한다.
산지(散地) 군사들이 그곳 지리에 익숙하므로 쉽게 흩어져서 도망갈 수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악무목(岳武穆)이 등에 글자를 새겨 송(宋) 나라의 명장인 악비(岳飛)가 간신 진회(秦檜)의 무고에 의해 체포되어 옥사(獄死)하였는데, 국문을 받을 때 악비의 옷을 찢어 보니,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기(吳起)가 종기를 빤 것이고 오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위(衛)나라 사람이며 병법가이다. 위(魏)의 장수가 되어 진(秦)을 공격할 때 병사 가운데 등창이 난 자가 있었는데 오기가 그것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치료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등창을 빨아준 장수를 위하여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릴 것이라고 하며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제갈량이 친구를 처형한 것입니다. 촉(蜀)나라의 제갈공명은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자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싸우다가 패한 부장(部將) 마속(馬謖)을 그 전날의 공과 두터운 친분에도 불구하고 울며 목을 베어 전군의 본보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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