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사에게 보내는 편지[與洪牧]
형은 나의 편지를 받고 맑은 바람을 쐬지만, 나는 형의 편지를 받고 도리어 화기만 끓어오릅니다. 나의 학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 뿐이니 한탄스럽고 부끄럽습니다. 형은 어제의 더위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것도 시원한 물결로 여겨졌습니다. 만약 먼저 자신의 덕을 밝혀서 백성들을 새롭게 하여 더러운 것들이 날마다 제거되고 깨끗하고 맑은 것들이 날마다 생겨난다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정신은 상쾌해지며 답답한 것들이 자연히 사라져서 맑고 시원한 경지로 높이 올라갈 것입니다. 어찌 침과(沈瓜)와 부리(浮李)를 부러워합니까? 밤부터 아침까지 말씀하신 내용과 보내온 편지를 반복하여 고찰해 보았습니다만 나의 의혹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른바 최(崔)가 놈이 설사 동학에 가입한 것을 믿고 징송(徵訟)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몇 년 뒤에 사대부의 나귀를 강제로 빼앗은 것은 지극히 무엄합니다. 그런데 송사(訟事)가 발생한 뒤에 여러 차례 관아의 명령을 위반하고, 아직 이 사건이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곧장 무고하다는 소장(訴狀)을 올린 것은 더욱 더 무엄합니다. 나는 지금 시대에 살면서도 옛날에 뜻을 두고 있어서 우활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것을 기회로 삼아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형이 자임하는 일이 아닙니까? 만약 소나무 가격을 정말 억울하게 많이 거두었다고 하여 추급(推給)해주라고 한다면 우리 집안도 구목(丘木)을 도둑맞았다고 소장(訴狀)을 올릴 것입니다. 송추(松楸)를 함부로 베지 못하고 기르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법률이며 사대부의 가법(家法)입니다. 소나무를 훔쳐간 대가로 돈을 낸 것의 억울함을 들어주었다면, 소나무를 잃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돌려준 억울함은 유독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이른바 소나무 값 몇 냥은 오늘은 최가 놈의 것이 되었다가 내일은 이씨(李氏)의 것이 되어 왔다 갔다 하면서 그칠 날이 없게 되니 틀림없이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호우(湖右)의 풍속은 형이 잘 알고 있듯이 최가 놈과 같이 소나무 값을 돌려달라는 소장은 천지에 널려있습니다. 형은 그것들을 일일이 들어주려고 합니까?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 집안을 편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체(事體)가 본디 이와 같으므로 우리 집안사람들과 의논하지 않고 나의 생각을 말씀드리니 깊이 헤아려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간절한 나의 생각을 서로 아끼는 처지에 감히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적으로 화해를 하고 서로 주고받았다면 소나무 값과 나귀를 찾는 일이 불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인데도, 그자는 도리어 팔을 휘두르며 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병길(秉吉)은 볼 낯이 없어서 죽고 싶은 것은 고사하고 양반이라는 이름도 남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형은 친구 이씨의 귀가 둔하다고 여기지만 나는 그의 귀가 매우 여리다고 여깁니다. 이 또한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도 이가 시려서 더 이상 이 일로 간청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잘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장에 대한 제사(題辭)를 읽어보니 형이 소송을 해결하는 방법이 참으로 교묘하더군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