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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군무참의로 추증된 김병돈 군의 공적을 기록한 비명[贈軍務參議金君秉暾紀績碑銘][서문을 겸함]

아! 차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갑오년(甲午年, 1894) 동학(東學)의 난리는 옛 기록에는 없던 변고였다. 일종의 허황된 말이 민심을 현혹시키자 몇 개월이 되지 않아 물이 불어나고 불이 타오르듯 퍼져나가서 사방의 백성들이 모두 도적이 되었다. 이때 몸 하나로 장성(長城)을 쌓고 한 손으로 무너지는 파도를 저지하며 우뚝이 홀로 서서 사악함을 물리치고 포악함을 금지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마침내 기울어진 국가를 태평한 시대로 돌려놓은 자는 오직 홍주목사(洪州牧使) 겸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李) 공 한 사람뿐이다. 그 휘하에서 그를 따라 일을 맡았던 선비들은 대부분 녹록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고 중군 증 군무참의(故中軍贈軍務參議) 김병돈(金秉暾) 군은 특히 걸출한 자였다. 군의 자(字)는 덕경(德卿)이고, 광산(光山) 김씨이며, 대대로 홍주(洪州)에서 거주하였다. 토포영(討捕營)에서 시험을 보고 병교(兵校)가 되었다가, 얼마 후 무거출신(武擧出身)이 되었으나 예전과 동일하게 근무하였다. 그는 담략이 있고 재능이 많았기 때문에 본인은 그만두고자 하였으나 토포사(討捕使)가 그를 아껴서 버려두지 않았다.
이해 여름에 동학이 점차 일어나서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였다. 방백(方伯) 이하는 모두 숨을 죽이고 앉아서 기다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초토사 공은 막 새로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날마다 적들을 잡아서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군을 특별히 차출하여 본부(本府)의 중군(中軍)으로 임명하고 성을 수축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일을 그에게 자문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적들은 ‘도에 들어간다(入道)’고 하므로 다른 부류들과는 달라서 백성과 도적을 구별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대로 내버려두어 죄를 묻지 말고 나중에 천천히 도모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자, 군은 더욱 분개하여 침을 뱉고 욕을 하며 이를 가는 것이 마치 그들과는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에 초토사 공은 군을 더욱 훌륭하게 생각하였다. 겨울에 적병들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군현을 약탈하고 장차 홍주(洪州)를 도륙할 것이라고 떠벌렸다. 이에 주성(州城)에서는 경계를 강화하고 5개 진(陣)을 설치하여 굳게 지켰는데 군은 중군영관(中軍領官)을 맡았다. 군은 또 힘주어 말하기를 “이 적들은 기세가 등등하다고는 하지만 호미와 고무래를 창으로 삼은 무리들에 불과하며 장기적인 계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무기를 들고 그들 앞에 나선다면 틀림없이 놀라서 달아날 것입니다. 군대를 출동시켜 토벌하여 저들을 쓸어버려야 합니다”라고 하자, 초토사 공은 그가 옳다고 여겼다. 10월 신해(辛亥)일에 명령을 받고 광천(廣川)의 적을 토벌하러 나가 즉시 격파하고 많은 수의 적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전에 성 중의 무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식견있는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대포 30여 문을 획득하여 공격과 수비의 바탕으로 삼았다. 갑인(甲寅)일에 목소(木沼)의 적을 토벌하고 계해(癸亥)일에 또 합포(合浦)의 적을 토벌하여 연속으로 쳐부수자, 관군은 승리의 형세를 타고 사기가 날로 높아졌다. 사람들은 모두 다투어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여 예산(禮山)의 신례원(新禮院)에 이르렀다. 이때 적병들은 흩어진 자는 합치고 도망간 자는 달려와 모두 한 곳에 모이니 그 숫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관군이 원조가 끊어져 형세가 고립된 것을 보고는 포위하여 매우 다급하게 압박하였다. 군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졸들에게 각자 살 길을 찾으라고 한 뒤, 칼을 뽑아 온 힘을 다하여 싸우자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에 말을 채찍질하여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그런데 몇 리 못가서 말이 넘어지고 추격병들이 따라와서 결국 화를 당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적들을 꾸짖었다. 이날은 바로 10월 26일 기사(己巳)일이다. 초토사 공은 이 소식을 듣고 마치 좌우의 수족을 잃은 것 같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 군에게는 70세가 넘은 어머니가 계셨는데, 어머니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들이 나라 일로 죽었으니 슬퍼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하였다. 다음 달 3일 신미(辛未)일에 마침내 적들이 크게 일어나 휩쓸면서 홍주성(洪州城) 밖에 이르렀으나, 이튿날 임신(壬申)일에 크게 패하여 해미로 달아났다. 해미의 적들이 두려워하며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관군과 유병(儒兵)들이 도비산(島飛山)까지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그리하여 내포(內浦) 일대의 여러 적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초토사 공은 군이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군에게 특별히 군무참의(軍務參議)를 추증하여 그 충정을 기렸다.
아! 위대하도다. 근래에 논자들 중에는 경솔하게 진군하였다가 패한 것이 군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인 점이 있다. 내가 그 당시의 상황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약 군이 살았더라면 적들은 틀림없이 감히 홍주로 쳐들어오지 못하였을 것이고, 홍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갑자기 패배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저들이 무리를 수습하여 예산에서 곧장 공주로 가서 남비(南匪)들과 합세하여 협공하였더라면 금영(錦營)이 함락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금영이 함락되었다면 한양이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군이 한 번 패한 것은 실로 적을 유인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하늘도 반드시 그럴 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죽을 곳에서 죽어 백성과 국가에 공을 세웠으니 매우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군에게 거듭 감동하였다.
군은 전에 부상(負商)에 들어가서 그 반수(班首)가 되어 무리들을 법도에 맞게 잘 통솔하였는데, 난리를 당하여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그 무리들이 또 군을 위하여 군의 공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고자 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상업은 변변찮은 기술이다. 국가의 풍속은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농업을 중시하였으며 상업을 천하게 생각하였다. 내가 보건대, 작년에 반란의 무리들을 따라 교화를 거부한 백성들은 모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었으며, 근자에 사대부들의 행동은 참으로 심하였는데, 이런 일을 보고 혹 부끄러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전에 초토사 공이 지은 군의 뇌사(誄詞)를 읽고 오래도록 슬퍼하였다. 지금 군의 비(碑)에 명(銘)을 지음에 새로 지을 필요가 없어 그 의미를 이어받아 명으로 삼는다. 명은 이러하다.

官欲其生 관(官)에서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賊欲其死 적은 그가 죽기를 바라니
必有以兮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네
君謂之忠 임금은 그대를 충신이라고 하고
母謂之孝 어머니는 그대를 효자라고 하니
他何更校 더 이상 무엇을 따지겠는가

주석
반수(班首) 봇짐장수나 등짐장수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뇌사(誄詞)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 공덕을 칭송하며 문상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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