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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문장준 역사 文章峻 歷史
일러두기

* 태안군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의뢰하여 〈문장준역사〉를 번역하였는바, 태안군의 승인을 받아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탑재함

문장준 역사

포덕 64년(1865) 3월 4일

이 역사자(歷史者)인 남평 후인 문장준은 강성군(江城君) 20세손으로 충청남도 서산군 원북면 방갈리(防葛里)에서 탄생하였다.

마침내 포덕 35년(1894) 갑오 2월을 당하여 상암(桑庵) 박희인(字 德七)께서 천도(天道) 동학(東學)을 전수하여 그때부터 포교에 활약하였다. 이때 태안 군수는 신백희(申伯禧)이고, 김경제(金景濟)라고 하는 사람은 본래 태안 사람으로 정부에 붙어 안무사를 자원하여 내려왔다. 9월에 태안 군수 신백희 등이 일심 합력하고 태안, 서산, 해미 3읍 동학 교도를 모두 귀화시키려고 작정하였다. 만약 그러하지 않다면 두목을 다수 참살할 것이니 어찌 진압하지 못하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병정과 관군을 파견하였다. 그 중 대수두목(大首頭目) 30여 명을 이곳 등지의 괴수라 하여 잡아다 엄형에 처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때 적의 기세가 구름처럼 거대하여 나라에 망조가 들었고 3읍 관내 접중(接中) 위난(危難)이 만만시(萬萬時) (이하 5자 망실).

우리 교중(敎中)의 사기(事紀)도 시시각각으로 위급한 때였다. 본포(本包) 박희인이 말하기를, “일반 두령의 생사가 시급한 경과(經過)와 오교(吾敎)를 금명간 공격할 계책이 있는 까닭으로 기포(起包)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 본포에서 ‘징’을 울리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응하며 일제히 우리 포(包) 관내는 일시에 전광(電光)과 같이 모이며, 한편으로 각처에 갇힌 두목을 일일이 방출하기로 약속하니 9월 그믐이었다. 그 때 방갈리 문장노 집을 위시하여 밤에 각처 두목 몇 사람이 모의하던 중 급보를 접한 접주 장성국(張聖國)은 이화면(梨北面) 포지리(浦芝里)에서 밤에 횃불을 들고 갯벌 10리 길을 달려 원북면 방갈리 접주 문장노 집에 와서 사방에 치보하였다.

모인 교도들은 장성국, 문장노, 김군집(金君執), 최맹춘(崔孟春), 접사(接司) 조응칠(曺應七), 문재석(文在錫), 문구석(文龜錫), 도집(都執) 문장준(文章峻), 이광우(李廣宇), 이하 문장권(文章權), 문준보(文俊甫), 문성렬(文聖烈), 강인성(姜仁成), 안인묵(安仁黙), 안현묵(安玄黙), 김성칠(金成七), 김공필(金公弼), 강운재(姜雲在), 김가열(金可烈), 문장의(文章儀) 외 수십인이 모인 가운데 이치봉(李致奉)을 북부대장(北部隊長)에, 안현묵을 기수대장(旗手隊長)으로 정하고 기치를 들고 행진하여 각처의 도인이 세를 합하여 교인 수백명이 1차로 태안읍으로 운집하니 다음날은 10월 1일었다. 10월 3일까지 방갈리 방면에서 수천명이 태안으로 운집하였는데, 총살로 전사한 사람이 가장 많은 지방이다.

안무사, 서산, 태안의 양 군수가 민권 옹호의 기치 하에 가두었던 모든 두령을 일제히 참수할 상황을 보고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도중(道衆) 수백만 인이 집합하여 민권(民權)의 대세를 대파하고 한편으로 옥에 갇힌 모든 사람을 석방하였다. 이로부터 견고한 도중은 날마다 더욱 창궐하여 탐관학리(貪官虐吏)의 난폭한 정사를 정정할 뜻으로 동 22일에 본포 대접주 박희인씨가 도중을 인솔하여 태안에 이르러 날마다 단속하였다.

다음날에 해미에 진을 치고 동 24일 여미로 옮겨 주둔하다가 불의에 홍주로부터 파견한 관군과 전투하여 관군과 민보군을 대파하였다. 면천으로 출발하여 대중이 유숙하고 다음날 덕산에 이르러 예산군 신례원에 진을 치고 도중을 살핀즉 수백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때 대접주 박희인씨가 진중에 하명하여 우리가 여기에 모였으니 장석(丈席)의 명령을 받들어 선후책을 도중(道衆)에게 설명하고 진을 치고 머물렀다. 이날밤 박희인씨는 지인 세 사람과 밤새도록 진에 머물면서, 사방에서 불철저(不徹底)하고 부도덕한 논의와 불합리한 어지러운 말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보이니 어떻게 하면 바로 잡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새벽에 홍주 초토사 이승우(李勝宇)와 동모한 김덕경(金德京)이 이끌고 온 관민군(官民軍) 수천 인을 예산 신례원으로 파송하여 대규모로 진을 치고 도중(道衆)을 향하여 무수히 포를 쏘았지만 견고한 도중이 조금도 동요치 않았다. 양 진영이 크게 싸워 관군을 대파하고 다음날 도중을 인솔하고 덕산 역촌에 옮겨 주둔하니 다음날은 즉 10월 28일이다.

대신사(大神師)의 생신(生辰) 기도식을 거행하고 다음날에 홍주로 출발하여 북문 밖에 진을 치고 머무르며 대세를 살핀즉 너무 견고하였다. 부득이 관군과 전투하였지만 대패하여, 대세가 이미 기운 것으로 판단하고 목욕리(沐浴里)에 퇴거하였다.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하늘과 땅을 분간할 수 없어 도로에서 방황하다가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서산에 돌아오니 곳곳에 민보군(民堡軍)이 봉기하여 도중을 침해하여 교인 수백 인을 이끌고 덕산을 지나 천신만고 끝에 해미, 서산을 무사히 지나 태안 본가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수일을 보내다가 11월 15일에 민권(民權)이 크게 창궐하여 민보군의 대진이 돌입하여 체포되었다.

민권의 기치 아래 엄형(嚴刑)을 내리고 서산으로 이송되었으며, 동 7일에 해미 수영(水營)으로 잡혀가 상황을 살핀 즉, 동지 모씨(某氏)가 옥에 있었다. 혹독한 추위와 기갈(飢渴)로 고생하던 중 씨 또한 옥에 10여 일 동안 갇혀 있어 추위와 배고픔을 참지 못하였다. 이때 영장(營將)은 이범서(李範緖)였다. 동월 23일에 천우신조로 많은 옥수(獄囚)를 일일이 엄형 취조한 후 일제 석방하였다. 이후로는 맡은 바 생업에 충실하라는 지도를 듣고 귀가할 때 무리한 지목(指目)으로 본영(本營)에 물금표(勿禁表)를 사지(司持)하고 동족(同族) 문장권(文章權)씨와 같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3일 동안 유리걸식하여 천행만고 끝에 본가에 돌아왔다.

갈수록 심해지는 민군(民軍)의 지목을 면치 못해 당시 민보군 우두머리 한 장사(韓長史), 조화경(趙化京), 김문옥(金文玉), 유성칠(柳星七) 몇몇 개인의 수중에 생살(生殺)의 권한이 있으니 어찌 목숨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미리 피하여 목숨을 보전함이 상책이라 하고 지인(志人) 김선여(金善汝), 김성칠(金成七), 강운재(姜雲在), 김명필(金明弼), 김황운(金黃雲) 등과 식솔들을 대동하고 배를 타고 망명할 때 뒤에서 민보군이 추격하였다. 이때 바람으로 큰 파도가 일어 안전하게 건너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망망 창해를 무사히 지나 서천 개주(介州)에 도착하여 6일 동안 머물렀다. 다시 경도(鏡島)로 가다가 바람이 크게 일어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에 이르러 생사가 경각을 다투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천사(天師)의 은혜로 안면도 중장역(中場驛)에 이르러 생계를 꾀하였다. 며칠 머무르며 살피다가 수배가 다시 나온 고로 바로 배를 타고 황해도로 향하니 보름이 지났다.

주석
문장준 문장준은 태안 갈두리[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출신으로, 1984년 3월 예포 대접주인 상암 박희인을 통해 동학에 입도했다. 갑오년 기포 당시 육임의 직임 중에 도집(都執)을 맡고 있었다. 방갈리 접주인 문장로[8촌 간]의 접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장준의 증손인 문형식(70세)에 따르면 “조부님은 갑오년 이후 태안에서 배를 타고 피신하여 이리 저리 떠돌다가 광덕산 만복골[천안시 광덕면 광덕4리] 등지에 피난했다가 효자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문장준이 효자리에서 살던 집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장준은 효자리에 살다가 인근의 간양리로 이사하였으며, 1923년에 노환으로 작고했다. 문장준의 간양리 집에는 아직까지 증손인 문형식, 고손인 문희남(43세)이 살고 있다.
방갈리 갈두리는 본래 태안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원북면 방갈리(防葛里)로 되었다. ‘갈머리’, ‘갈마리’ 혹은 ‘갈말’ 등으로 불렸으며 방갈리의 주된 마을이었으나 마을 대부분이 태안화력발전소 부지로 편입되어 현재 옛 마을의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갈두리 곤자막골에서 유골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안종열(79세)에 따르면,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갈두리에는 70여 호가 살았으며, 남평문씨를 위시하여 순흥안씨, 밀양박씨, 창녕조씨 등이 많이 거주했다. 자연마을로는 갈머리를 포함하여 곤자막골, 도장골, 개근너, 유골, 장구섬, 목계, 민어도 등이 있다.
갈두리는 태안지역 동학운동의 기포지이자 이원면 포지리와 함께 초기 전교지로 알려져 있다. 갑오년 당시 기포를 모의했던 곳은 곤자막골로 현재 태안화력발전소 연수원 공원 자리이다. ‘태안지역 갑오동학농민혁명 자료집’에 의하면, 서산 지곡면에 살고 있는 최형순(崔亨淳)이 1890년 이원면 포지리에 와서 동학을 전교한 이후로 1893년에는 상암 박희인 대접주가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방갈리의 조운삼(曺雲三)을 비롯하여 문장로(文章魯), 문구석(文龜錫) 부자를 입도 시켰으며, 갈머리 문구석의 집과 가시내 조문필(曺文必)의 집에서 동학교도들이 비밀리에 모여 동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때부터 태안의 동학세력은 날로 약진하여 기포 전야까지 태안군내 전 지역이 동학일색이 되었다고 한다.
문장노 집 문장로는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갈두리[갈머리] 출신으로, 갑오년 당시에는 방갈리 접주로 활동하였다. 홍성전투에서 패한 이후 안면도, 광천, 공주, 천안 광덕산 등지로 피신 생활을 하였고, 한일합방 이후 충남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 정착하여 생활하다 1919년 사망하였다. 장남인 문구석은 갑오년 봉기 후 방갈리에 은신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문병석은 천도교 예산교구장을 역임했으며, 예산, 아산, 당진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문장노의 손자인 문원덕은 1964년 ‘동학정신선양회’를 조직하고 충남지부장에 취임하였다. 문원덕은 갑오동학운동의 현창사업과 선열의 바른 역사를 세우고 알리는 사업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 서산․태안․당진․예산․아산 등지에서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순국한 이들을 찾고, 후손들의 증언을 기록한 ‘갑오동학혁명 당시 순도자명단’과 ‘갑오동학혁명군 순국자명단’을 작성하였다. 또한 1965년에는 ‘제1회 갑오동학혁명군 위령제’를 개최하고, 1978년에는 태안 백화산에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갯벌 10리 길을 달려 접주 장성국(張聖國)이 포지리(浦芝里)[이원면]에서 밤에 횃불을 들고 방갈리[원북면]로 건너왔다는 10리 갯벌 길을 이 지역에서는 보통 ‘감길’이라 부르며 흔히 ‘감 건너 간다’고 한다. ‘감길’은 갯벌의 단단한 곳만을 골라 길로 이용한 것으로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길이지만, 선명하게 길의 형태가 나 있었다고 한다. 이원면 포지리 굴향[구렝이]에서 죽도[대섬]를 거쳐 원북면 방갈리까지 감길을 통해 비교적 쉽게 오갈 수 있었는데, 조금과 사리에 따라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현재는 태안화력발전소가 들어서고 방조제가 축조되어 옛 길의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다.
조응칠(曺應七) 태안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자료[‘동학참여자 후손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조응칠(曺應七)의 족보상 이름은 석순(曺錫順)이고 원북면 방갈리 태생이다. 갑오년 기포 당시 육임의 직책 가운데 접사(接司)를 맡고 있었고,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숨어 다니다가 그해 12월 2일 원북면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문재석(文在錫) 위 자료에 따르면, 문재석(文在錫)은 문장노 접주를 통해 동학에 입도했으며, 자(字)는 성재(聖在)이고, 갑오년 기포 당시 23세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태안 백화산에 피신해 있다가 그해 11월 16일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문구석(文龜錫) 문구석(文龜錫)은 문장노의 장남으로 상암 박희인을 통해 동학에 입도했으며, 갑오년 기포 당시 접사(接司)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태안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자료집’에 따르면, 문구석은 기포 후 홍주성 전투와 서산 매현전투에서 패한 후 방갈리 자택에서 은신 하던 중 부친을 검거하기 위해 찾아온 일본군과 관군에 붙잡혔다. 이들이 부친의 행방을 묻고 고문하자 큰소리로 “아버지 대신 내가 죽겠으니 나를 잡아 가라”고 사정하자 뒷산에 숨어 있던 문장노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길로 가솔을 데리고 도피하여 생명을 부지하였다고 한다. 문구석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형벌 끝에 갑오년 11월 16일 22세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사후인 1913년 구암 김연국으로부터 구룡암(龜龍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안현묵(安玄黙) 안현묵(1875~1963)은 방갈리 기포 당시 기수대장을 맡았다. 순흥안씨 판관공파 후(后) 절충공파(折衝公派) 파보에는 안현묵이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홍성전투에서 부상 당한 사실을 기재해 놓았다. 안현묵의 손자인 안종열(79세)씨에 의하면, 고조인 완복(完福) 때 이원면 관리 마방에서 원북면 방갈리 권자막골[곤지막골]로 이주해 왔으며 동학에는 현묵과 인묵 형제가 참여 했다고 한다. 권자막골은 현재 태안화력발전소 연수원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안씨와 문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해미 수영(水營) 원문에는 해미 수영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수영은 보령에 있었다.
풍찬노숙(風餐露宿) 한데서 바람과 이슬을 피하지 아니하고 먹고 자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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