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덕 54년(1913) 갑인에 구암(龜菴)과 권병덕(權秉德) 간에 처리상(處理上) 의사가 일치되지 않아 급기야 분열하여 중앙시천교(中央侍天敎)를 세웠다. 이때 양쪽의 선악을 자세히 살피다가 중앙시천교로 귀거하였다. 이로부터 각지의 도인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반신반의하였다. 이때 몇 사람과 동행하여 해미, 서산, 태안 도가를 순행하며 분열된 내용을 상세히 말하고 의심을 깨는 데 노력하였다.
주석
권병덕(權秉德)
권병덕(權秉悳, 1867년∼1944년)은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이다. 18세에 동학에 입도했으며, 1886년 청주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동학운동 때 보은에서 기포해서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북접동학교도를 이끌고 싸웠다.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여기에 입교하여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권), pp.944~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