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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다음날은 바로 10월 1일이다. 평명(平明)에 안무사와 서산, 태안 군수가 붙잡아 옥에 가둔 동교(東敎) 두목 30여 인을 모두 군막(帳垈)에 붙잡아 들여 꿇어 앉혀 놓고 좌우로 무사(武士)와 역졸(力卒)을 나열하고 참살 형을 집행할 때이다. 이 사정을 듣고 일반 교도가 풍운과 같이 수만명이 집합하니 그 대세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관아로 돌입하야 일편으로는 안무사와 서산, 태안 군수를 일체로 붙잡아 때려 그 자리에서 바로 타살(打殺)하고, 일편으로는 동교(東敎) 두목 30여 인을 구출하여 살려 내었다.

이 후로부터 교도가 점차 단결하여 더욱 깊게 일체가 되었고, 팔도에서 동도(東道)가 모두 하나가 되어 기포하니 거대한 운동(運動)이 되었다. 이때에 예포(禮包) 대도소(大都所)는 목소리(木巢里)에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으로 교도를 파송하여 10여 읍의 군기를 몰수하고 탈취하여 각 도소(都所)에 모아 유치케 하였다. 대도소(大都所)의 비용은 각처 관내 부호(富戶)가 의연금을 스스로 내어 2, 3천금(千金) 혹 1, 2만금(萬金)을 헌납하였고, 백미(白米)와 백염(白鹽) 수천석을 기부하여 수십만 금과 백미와 소금을 다수 적치(積置)하였고, 군속이 없다고는 해도 관내 하의 거포(巨包)는 12포고 기타 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각 포에서 도회소(都會所)를 설정하였으나 목소리 대도소에서는 10여 일 사무(事務)에 우리 도(道)의 운수(運數)가 이미 열린 때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운세는 세상과 더불어 동귀(同歸)하여 물외지인(物外之人)과 모산지배(募散之輩) 수천만인(數千萬人)이 우리 도(吾道)에 새로 들어왔으나 도를 닦는 마음은 만에 하나도 없고, 다만 불법 행위만 생각하여 억지로 사채(私債)를 받거나 억지로 묘를 파내고 심지어는 말과 곡식을 가지는 것으로만 일을 삼으니 이를 양민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다른 것은 그러하고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이와 같이 다수 모집하면 법률(法律)이 특별히 있는 것이 무리를 이끄는 근본이거늘 이는 고사하고 하나의 권리도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이와 같음으로 서기(書記) 10여 인을 두고 주야로 신입자의 불법(不法) 행사(行事)를 금지하기를 10여 일 밤을 새며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조금도 효력도 없었다.

동 11일 미명(未明)에 홍주 군수 이승우가 일병(日兵) 3백 명과 병정 수백 명과 유회군(儒會軍) 수천 명을 거느리고 목소 대도소 대진(大陣)을 공격하였다. 2~3시간에 이르도록 서로 싸우다가 교도가 먼저 크게 패하야 사방으로 흩어지매 저 무리들이 이기고 이겨서 오래 추격하여 대도소 사무실까지 돌입하여 닥치는 곳마다 몰수하고, 불을 질렀다. 하지만 교도의 후세(後勢)를 알지 못한 고로 바로 퇴거하였다. 병서(兵書)에서 이르기를 대(大)로써 소(小)를 이기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로 말하였으나 교도는 수수만명(數數萬名)이로되 군율이 아직 없고, 병사를 사용함이 미숙함에 불구하고 대전(大戰) 2~3시간 동안에 교인은 한 사람도 상해를 입어 죽은이는 없었으나 저 무리들은 2명이 죽고 3명이 중상(重傷)을 입었다.

지금 이후로부터 동도(東道)의 대세가 점점 물러나서 철거 일편이 되어 사방으로 패주하여 모여 있었다. 충남의 유회(儒會)가 대치(大致)하여 동도 신자(信者) 외에 신입 교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회도로 들어가는 고로 이 세상의 사람은 전부 유회가 되어 외국인과 합세하여 멸륜(滅倫) 패상(悖常)을 일삼으니 천도(天道)를 오로지 닦은 군자(君子)가 어찌 생활을 감히 편히 얻을 수 있겠는가?

각 처 관내인 소위 교중(敎中)의 대소 두령을 자의로 유회군 진영으로 잡아다가 임의로 참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교도 수백만 호가 일체 어육(魚肉)이 되어 일시에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고로 일반 교도의 소원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충남의 동도(東道)를 한 곳에 모아 다시 일어서야 후회가 없게 하자고 하나 천만 번 생각하여도 좌우가 어려운 처지로되 부득이 깨려고 하여도 할 수 없었다.

동 15일에 포군(砲軍) 10명과 두령 3, 4인을 거느리고 해미, 서산, 태안의 동도 진영에 들어가 전후 사실을 말하고, 하나의 진영으로 합세하니 오십여 만 무리가 되었다. 이 때 본인은 10월 15일에 태안군 북면 신두리 선산에다 모친의 장례를 안장하였다. 본인은 수일을 머물고, 동 22일에 태안군 동면 역촌리(驛村里)에 머물고 있는 동도 대진소(東道大陣所)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23일에 해미군 구밀리(舊密里)에서 대진(大陣)이 유숙한 후 다음날 24일 행군하여 하오 4시(申時) 경에 해미 승전곡(海美 勝戰谷)을 지날 때, 일병 4백명과 병정 5백명, 유회군 수천 명이 길에 복병(伏兵)하였다가 일시에 돌출하여 양진(兩陣)이 서로 접전하였다. 이 때에 일한병(日韓兵) 10여 명이 중상을 당하니 저 무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대패하여 도주하는 고로 군량미와 군복(軍服)을 다수 습득하였다. 곧바로 면천군(沔川郡)으로 가서 유숙하고 25일에 행군하여 덕산군(德山郡) 구만리(九萬里) 뜰에서 유진(留陣)하고, 26일에 예산군 금평면(今坪面) 신례원(新禮院) 뒤뜰(后坪)에서 유진할 시에 충남 동도는 전부 다 와서 모였으니 총수가 백여만 명 가량이나 되는 거대한 대중이 되었다.

대진을 모집하였으나 군율이 없고 법령(法令)을 준수하지 않는 이러한 오합지중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리니 상암장께서 속속히 탈신(脫身)할 주의(注意)를 몰래 정한 후에 즉시 진중(陣中)에 명을 내렸으나 우리 동도의 교진(敎陣)은 저 무리의 군졸과는 같지 않았다. 충남의 모든 접과 포중이 모두 이곳에 모였으니 다음날 법소(法所)에 들어가서 장석(丈席) 분부를 봉승하여 잘 처리하라고 군령(軍令)을 대진 중에 전하고 유진(留陣)하였다.

이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여 심복한 교인 2~3인을 거느리고 밤새도록 대진을 순회할 시에 한 구역을 지나며 들은 즉 어떤 접중에서 서로 논의하되, 아까 예포 대접주가 명을 내리기를 내일 대진을 거느리고 법소에 들어가기로 작정하였다 하니 만약 이 진(陣)이 열흘만 충남 등지에 없는 경우에는 충남도 가(家)의 노약자는 한 명도 살 수 없을 테니 내일 새벽에 우리가 먼저 주장하여 진중에 호령하되, 부모처자를 생각하는 교인은 길 아래에 모이고, 부모처자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움직이지 말라 하자고 약속을 정함을 들은즉 땀이 등을 적셨다. 밤새도록 전전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다음날 아침 재차 규정을 정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홍주군수 이승우가 유회 장두(長頭) 김덕경(金德景) 등 10여 인으로 하여금 군토병(郡土兵) 수십 인과 유회군 4~5천명을 나누어 보내 예산군 신례원 앞 영현(永峴) 상봉(上峰)에다 대진을 설치하고, 교진을 향하여 사격할 때 대포 수십 문으로 일시에 쏘아서 몰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군율이 없는 교진이라도 10여 군(郡)에서 군기(軍器)를 모았으니 어찌 소수로써 큰 교진을 이기겠는가? 양진(兩陣)이 반나절 동안 큰 전투를 하여 적군의 일등(一等) 장두(長頭) 6, 7인과 적군 7~8백명을 모두 몰살 소멸하니 기타 뒤따르던 적군 5~6천 명은 공격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다.

27일 오후에 진이 행군하여 동군 역촌 후평(後坪)에서 유숙하고 익일 즉, 28일이 대신사주(大神師主) 생신기도일(生辰忌禱日)이라 덕산군 역촌 후현(後峴)에서 유진하며 기도하고, 다음날 29일에 바로 출발하여 홍주군 북문 밖 향교촌 후현 등지에서 유진하였다. 홍주성 성문을 부수려고 요지처에다 대포 수천 개와 단철(端鐵) 수만 개를 일시에 발사하여 공격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이 성은 만 개의 대포로도 뺏지 못할 곳이었다. 성내에서는 토병(土兵)과 유회군이 응성대전(應聲大戰)하고, 교진은 성 밖에서 서로 교전할 때 양진에서 큰 소리로, “너희 두목 괴수를 줄줄이 참수하여 본진에 바치면 너희 무리에게 크게 상을 주고, 일반 창생(蒼生)은 무죄로 방면하여 모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 해 주겠다”하며 양진이 피차처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싸우는 소리가 천지에 요동하고, 해도 빛을 잃었다.

다음날 오시(午時)에서 미시(未時)경부터 시작하여 해시(亥時)에 이르기 까지 이와 같이 서로 접전하였으나 성을 부수지 못하고, 힘만 다 써서 소진할 뿐이었다. 교도 2~3인이 저 무리에게 해를 당해서 교진이 부득이 해자시(亥子時)경에 후퇴하였다. 이날 밤은 그믐 날 저녁[2월 29일]으로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우를 당하였으나 사생(死生)은 재천(在天)이요, 모사(謀事)난 재인(在人)이라 일렀으니 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여 덕산 다락뫼 앞에 이르렀을 때, 유회군 수명이 단철(端鐵)을 한 방 쏘니 그 소리를 듣고 거대한 교진이 일시에 해산하여 도주하는 것을 보니 어찌 한심하고 가련치 아니하리오.

본인이 혼자서 두루 방황하다가 개천가에서 한 사람을 만났으나 모르는 사람이라 헤어져서 이 개천, 저 개천을 건너 가다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났으나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 사람이 말하길, “이곳은 내가 익히 아는 곳이라”하며 덕산(德山) 가취산(加取山) 방향으로 가라고 일러 주었다. 이 개천, 저 개천을 건너다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본즉 대접주 박상암장(朴湘菴丈)이 분명했다. 그 때부터 본인이 상암장 옷을 붙잡고 동반하였다. 두루 방황하다 길을 잃고 덕산 역촌 등지에 당도하여 자세히 본즉 이곳은 유회 근거지라 상암과 본인이 크게 놀라 곧 바로 봉정이 주점 뒤로 용봉산(龍鳳山)에 올라 바라보니 북편 깊은 곳은 곧 목바리 안산(案山)이라 빙여로 내려가다 서 있는 바위, 누워 있는 바위 2개가 있었다. 누워 있는 바위 밑을 환도로 더 파고 상암을 은신케하고, 서 있는 바위 밑에는 본인이 은신하였다.

주석
평명(平明) 아침해가 돋아 밝아올 무렵.
예포(禮包) 대도소(大都所)는 목소리(木巢里)에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예포 대도소를 설치했던 목소리[목소 혹은 목시로도 불림]는 현재 삽교읍 성리(城里)로 『지명총람』(한글학회, 1974)에 따르면,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으로서 토성이 있으므로 성미 또는 성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장촌면의 현교리와 예산군 거구화면의 목소리를 병합하여 성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주민들은 예전에 미류나무가 동리를 빙 둘러 서 있어서 목소(木巢)란 지명이 붙었다고 하며, 옛날 장촌면 소재지로 100여 호 이상의 큰 마을이었고 시장도 섰으나 왜정 때 철도가 삽교로 나는 바람에 면소재지도 뺏기고, 시장도 뺏겨서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목소리는 안목(안목시)과 외목(외목시)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안목과 외목 사이의 뜰에 예포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조부 때부터 목소리에 살고 있다는 박상진(79세)은 동리 어른들로부터 “옛날 내목과 외목 사이에 있는 뜸에 동학군이 크게 진을 치고 있다가 안개가 짙어 관군이 오는 것을 몰라서 크게 희생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지금도 예포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자리에서는 당시 전투의 정황을 증거 하듯이 종종 철환(鐵丸)이 발견된다고 한다. 당시 목소리에는 그 수는 알지 못하지만, 근방 동학군은 전부 모였다고 할 만큼 많은 수의 동학군이 모였으며,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에 관군이 집집마다 가택 수색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 희생되었고, 일부는 “절구통에 들어가 삿갓을 쓰고 숨어서 요행히 살았다”고도 한다. 동리 문영수(64세)는 “조부(문종서)님이 동학난 때 홍성전투에 참가한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전사한 것으로 여기고 조부님이 집을 나간 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본문의 기록을 토대로 하면, 1894년 10월 1일 태안성을 공격한 후 태안·서산·홍성·예산 일대에서 기포한 예포의 동학군은 모두 목소리에 집결하여 대도소를 설치하고 10여 일을 머물렀으나 동년 10월 11일 홍주군수 이승우에게 기습을 당하여 패함으로서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소리 전투는 동학농민군에 맞서 토벌작전에 나선 반농민군(관군·유회군·일병 연합)의 입장에서 보면 태안과 서산 관아를 빼앗긴 이후 처음으로 거둔 대규모 승리였다.
예포 동학군이 목소리에 대도소를 설치한 것은 이 지역에 동학의 교세가 강했던 점도 있지만, 태안·서산·홍성·해미·덕산·당진·예산·온양·아산의 중간에 위치하여 지리적인 요충지였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소리에서 1리 정도를 가면 삽교읍 하포리 막골[막동리]인데, 막골은 바로 천도교 제4대 교주를 지낸 춘암 박인호의 고향이다. 박인호는 29세 무렵까지 막골에 살았다고 한다. 현재 하포리에는 춘암 박인호의 유허비가 서 있다[각주 13번 박인호 참고].
군토병(郡土兵) 토병(土兵): 토민(土民) 중에서 뽑은 병사.
유회군 수명이 단철(端鐵)을 한 방 쏘니 그 소리를 듣고 거대한 교진이 일시에 해산하여 도주하는 것을 보니 어찌 한심하고 가련치 아니하리오. 이승우(李勝宇)는 갑오년(1894)에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홍주성을 수성하고, 동학교도들을 진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충남 각지에는 초토사 이승우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본문의 이승우 청덕비(淸德碑)는 아산시 도고면 향산리 용호원에 있는 것으로, 전면에는 招討使李公勝宇淸德碑라 쓰여있고 4련시로 공적을 칭송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광천에는 당시 광천·목소리·합덕에서 전공을 세우고 관작리 전투에서 전사한 중군 김병돈의 전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부상(負商)들이 전적지인 광천구장대에 세운 부상감의비(負商感義碑)가 있다. 현재 이 비석은 광천읍에서 대천으로 가는 가로변으로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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