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갑오년(1894년) 11월 1일 개동시(開東時)였다.
평명(平明)에 태안군 장작리에 거주하는 교인 두 사람이 와서 보고 말하길, “접장은 어찌할 생각이오”하기에 본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법소로 들어가서 어느 때라도 이 일을 성사한 후에 들어갈 것이오. 댁네는 어떻게 하실 것이오?”한즉 두 사람이 말하길, “우리는 영사연정 부모와 처자나 상봉하고자 합니다.” 본인이 말하길, “그러하면 들어가서 누구 집에다 기별하되 나를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전하여 달라” 부탁한즉, 두 사람은, “그러하마”하고 즉시 출발했다.
이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연속해서 그치지 않았다. 새벽에 다시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되 두 사람이 신명(身命)을 천사성령(天師聖靈) 전(前)에 맡기고 함께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며, 사생존망(死生存亡)을 염천염사(念天念師)로 성령(性靈)과 육신(肉身)을 바꾸고 독실한 믿음으로 앉아 있었다. 새벽 일출시에 어디선가 유회군 십여 인이 각자 총창(鐵槍)을 소지하고 좌우로 나열하여 짐승모리 하듯이 수색하니, 저들이 두 사람의 은신처를 멀리서 바라보고 적군(敵軍) 등이 모두 박장대소로 말하기를, “저 곳에 동학군들이 바랑 2개를 벗어 버리고 도주하였다”하여 서로가 상대하고도 무심이 지나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본즉, 지금 이후로는 독실한 믿음을 가지려는 마음이 백배나 깊어졌다. 이날 이후에도 2, 3차 이러한 수색을 벌였으나 저들은 바랑만 이야기하고 여전히 무심이 지나갔다.
상암장께서 의복이 얇고, 수일 동안 식사를 전폐하여 기운이 쇠진한데다가 겸하여 겨울철 찬비를 바로 맞으시매 한기(寒氣)를 견디지 못하는 까닭에 본인의 겉옷을 벗어 드려 잠시 한기를 잊게 하였다. 저녁에 또 유회군 7, 8인이 왕래하며 저 건너 바위 밑에 바랑을 보라 하며 내려감을 바라보고, 곧 바로 상암장께 여차여차함을 말씀 드리니 대답하시기를, “천리명섭(天理命攝)의 이치를 독실히 믿을 바이다”라 하셨다.
본인이 출생 이후 나이 33세이나 불과 50리 밖도 가 보지 못한 유아(幼兒)라 가야 할 곳을 모르는 고로 상암장을 하늘로 알고 죽고 사는 것을 결약하였다. 일몰 후 삼경(三更)에 양인(兩人)이 함께 출발하여 목발리(木鉢里) 주막 앞을 지날 때에는 칠흙같은 밤이라 지척을 분간치 못하고 겸하여 신발도 양인이 없을 뿐 아니라 갈증이 매우 심하나 사세(事勢)가 부득이 해서 걷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천신만고로 밤새도록 내왕한 거리가 불과 30리였다. 다음날 동틀 무렵에 덕산군 막동리(幕洞里) 김원향(金元享)씨댁에 당도하였다.
이날은 11월 2일이라 양인이 내실을 치우고 종일토록 은신할 때 김원필씨를 불러서 비밀리에 담화하였다. 이때는 유회가 대치하여 파수막을 각처 38개 군(郡)의 거리마다 세우고, 각 동․면․읍(洞․面․邑)과 주점과 산길(山路)에 이르기까지 파수막을 설치하였다. 해진 후에는 불빛이 충천하여 심야에도 대낮과 같이 밝았다. 삼경(三更) 후에 발정할 때에 김원필씨가 전문(錢文) 몇 관(貫)과 요기할 엿을 나눠 주기에 요기할 엿뭉치만 싸가지고 출발하였다. 양인이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장석준씨댁으로 향하여 이날밤 오경(五更)에 당도한즉, 그때에 상암장의 형수와 그 부인이 장자(長子) 문규(汶奎)를 업고 대흥군 조정빈(趙正彬)씨가 배행(陪行)하며 왔다. 그날밤에 상암장이 형수씨와 그 부인과 상봉하여 담화하였다. 이날 밤에 조정빈씨가 바지, 저고리와 주의(周衣)며 의관까지 벗어 상암장과 바꿔 입었다. 곧 바로 출발할 때에 장석준씨 대부인이 가는 길에 요기할 것과 전문 18전을 주시기에 받아 지니고, 상암장과 동행하여 예산 뒷산 금조산(金鳥山) 상봉(上峰)에 올라 이날밤을 묵었다.
다음날은 3일이다. 새벽에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예산군 장대(場垈)였다. 크게 놀라서 이산저산 응봉고봉(應峯高峰)으로 방향없이 일직선으로 가니 마을 길에 도착하였다. 마을 입구에서 신창(新昌) 유동(柳洞)에 머물고 있던 우리 포 일진(一陣)을 상봉하니, 그들 여러 명이 상암께 묻기를, “사세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니 상암장이 대답하기를 “지금 법소로 가서 사태를 관찰한 후에 조처하리라” 하시고, 양인은 신창 느랑이 동네에 들어가 그 아래 수꼴 동리에 가서 불문곡직하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숙박을 주인께 청하고 담화하며 유숙하였다.
다음날은 11월 4일이다. 새벽에 출발하여 답동리(畓洞里)에 도착하였다. 답동리 성감역(成監役)은 상암장의 유교(儒敎) 선생이다. 성감역씨를 상봉 예필하고, 객실에 들어가 조반을 요기하였다. 본인은 상중(喪中)이라 상립(喪笠)을 고쳐 입고, 정오에 발행(發行)하여 열망이고개, 예산읍 무덤이고개로 하여 공주 답동리(答洞里)에 도착하였다. 답동리 김상인(金喪人)은 김낙서(金洛西)씨 재종(再從)이다. 김상인씨 집에 당도하니 바깥채에 들어가게 하여 거기서 유숙하였다.
다음날은 11월 5일이다. 조반 후 주인께 치하하고 발정하야 문암리(門岩里)를 지나 금계산(金鷄山)에 올라 상봉에 이르매 금천리(錦川里)로 어떤 사람이 올라오기에 천안 곡도(曲道)재를 물어본즉, “저 건너 동남편(東南便) 대령(大嶺)을 넘어 산방리(山房里)에서 곡도재 찾아 보라”하기에 산방리 대령을 넘어 천안군 남면 곡도 한윤화씨 댁에 이르렀다. 방문하니 한윤화씨가 근동에 출타 중이라 이르는 고로, 동리(洞里) 박대길(朴大吉)씨를 불러 한윤화씨 대부인께 주인을 찾아뵈려고 왔음을 알리라 하였더니 객실로 들기를 청하였다. 일몰에 주인 윤화씨가 집으로 돌아왔다. 윤화씨는 상암장과 친밀한 벗이라 반가이 인사 후 저녁을 먹고 저녁에 시운시변과 다가올 결과가 어떻게 성공할 것인지를 서로 논의한 후 일시 피화(避禍)하기를 청하자 윤화씨가 흔열(欣悅)히 응낙(應諾)했다.
다음날은 11월 6일이다. 상오(上午) 오시(五時) 새벽에 주인이 담배 걸대칸에 객실방을 조성한 보 위의 고미다락에 볏짚으로 만든 거적 하나를 펴고, 머리는 볏단으로 바람을 막고, 타인 이목이 볼 수 없도록 꾸몄다. 이 날부터 시작하여 상암장과 본인이 누다락에 올라가 앉았다. 이곳이 본래 좁고 낮아서 반은 앉아 있고 반은 눕고, 머리는 들 수 없었다. 상암장과 동거한지 5~6일에 이르니, 곧 11일이다. 이날 저녁에 청산(靑山) 접주(接主) 황도원(黃道元)씨가 도착하여 저녁을 먹은 후 주인 윤화씨와 4인이 전후 사실을 담화하였다.
누다락 위 협소한 곳에서 3인이 수삼 일을 동거하니 객실방의 천장에 바른 흙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에게 지목을 받을 것이 걱정되었다. 주인 윤화씨는 구(舊) 동학인으로 근동에서 유명했다. 이 마을 아래 동리인 죽계리는 560호 대촌으로 유회 근거지였다. 그곳 소모관(召募官) 홍참판(洪參判)이라 하는 자가 주인 한씨가 유회에 들어가는 것을 불허하였다. 그래서 한씨가 부득이 2, 3차 유회에 동참하게 해 줄 것을 누누이 요청해서 회표(會標)를 얻어 왔다. 이 때 소모(召募)에서 명을 내려서, ‘가까운 시일에 예산 대접주 박모(朴某)가 공주 산방리(山防里), 천안 광덕산 등지까지 거쳐간 종적(踪跡)은 있으나 거처하는 것을 모르니, 공주 검천리(檢川里) 유회와 본회군(本會軍)으로 합세하여 태화산(泰和山)과 광덕산이며 산 주변의 각 동리 가가호호를 일일이 수색하여 잡기로 약속하였다’는 말이 있음을 들었다. 주인 한씨도 염려가 무궁할 뿐 아니라 이곳에서 3인이 이러 하다가는 함께 지낼 수도 없을 것이고, 도리어 해(害)를 당해서 붙잡혀 죽을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각자 흩어져서 떠나기로 약조를 정하였다. 그날밤에 3인이 발정(發程)하니 이 날은 11월 15일이다.
삼경때에 황씨(黃氏)는 공주 산방리 산길로 향해 가고, 우리 두 사람은 주인에게 호두 1말을 얻어 가지고 태화산 상봉을 넘어 공주 검천리로 내려가서 해 돋을녘에 문암리(文岩里) 앞에서 유회군을 만나서 무수히 질문하기에 이 날 16일은 온양(溫陽) 시장이 열리는 날이라, 본인이 말하길, “호두를 팔러 간다”고 이르니, 저들이 대답하기를, “댁(宅) 등이 매우 수상쩍으나 지나가는 것을 허락한다”하기에 바로 공주 신상면 덕암리로 가서 추동리(楸洞里) 박성근(朴成根) 주점에 도착하니, 유회 군막 보발군(步發軍)들이 마침 아침을 먹으려고 들어왔다. 주인 성근(成根)씨가 크게 놀라며 묻기를, “주장(主長)께서는 도대체 이곳을 어떤 곳으로 알고 왕림하셨습니까? 이는 땔나무를 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며 “그저께 공주 접주 김건제(金建濟)도 여기 접중에서 체포되어 천안군으로 이송되었으며, 더구나 4, 5일 전에 홍주 군수 이승우가 충남군에다가 방을 붙여 놓기를 예포 대접주 박모를 잡아 바치면 만금중상(萬金重賞)을 내리고 청주 병사(兵使)를 하사할 것이다 하고 용모를 그려서 각 군의 면면촌촌(面面村村) 거리마다 수천만 장을 붙였습니다. 이러한 물욕지세(物慾之世)에 사람들이 모두 천행(天幸)으로 주장(主長)을 잡으려는 욕심이 충만하니, 주장은 돌아보지 말고 다음 장소로 속히 날듯이 도망가소서”하며 간곡히 권고하였다.
한시도 머물지 말고 가라고 하기에 조반을 먹고 즉시 출발하여 작별하니 박성근씨가 유회 삼통표(三統標)을 끊어 주었다. 덕암령을 지나 소리절령을 지날 때에 예산 항곡리(項谷里) 소모관(召募官) 이남규(李南圭)의 유회군 2명을 가던 길에서 만났다. 수상한 안색이 보이고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러 죽을 힘을 다해 도망해서 방산현(方山峴) 상봉을 넘어서 사방을 바라본즉 가야할 바를 몰라 하는 수 없이 문암, 탑산이를 지나 돌무덤이 고개를 넘어 내려왔다. 이 때 상암장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시운시변(時運時変)이 이와 같은즉 광제창생(廣濟蒼生)하자 함이 광살창생(廣殺蒼生)이 되었으니 나 혼자 살수도 없거니와 살아서 무엇하리오”하였다. 또 갈증이 심하여 산에 잠시 멈추어 서서 말하시기를, “도(道)라는 것은 수(水)인데, 도운(道運)이 이러하니 물도 없구나”하며 무한 탄식하며 산 아래 평지에 이르러서 습기가 있는 곳을 손으로 파니 물이 나오는지라 상암장이 물을 3번 마셨다.
양인이 둑에 앉은 후 상암장이 본인에게 말씀하기를, “접장은 무죄한 사람이라 생활할 것이니 모쪼록 생계지책(生計之策)을 강구하라. 현재 사세로는 본인은 유죄자라 함께 일을 하면 아무리 무죄라도 어찌할 수 없으니 피차간 절박한 마음은 있으나 이곳에서 각자 흩어져서 유죄자는 죽고, 무죄자는 생활하는 것이 천리(天理)에 당연한 바라, 접장은 본인을 생각지 말고, 즉시 생계지책을 구해서 생활하거든 예산 종경리(宗敬里)와 덕산 막동리에 가서 이러한 소식이나 전하여 주기를 바라노라”하였다. 주머니 속의 부시 쌈지와 거울과 빗까지 모두 주며 말하기를 “내가 어느 곳에서 죽은 줄만 알면 저 무리가 내 머리를 베어다가 승전하였다 할 것이니 내 어찌 타인의 손에 악사(惡死)할 리가 있겠는가?”하고 자결코자 하기로 본인이 대답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천사(天師)의 간섭이 이와 같이 밝거늘 어찌 단언을 이와 같이 하시는 지요. 도저히 불가한 말씀입니다. 하물며 또 우리 두 사람이 생사고락을 함께하여 이곳까지 왔는데 어찌 혼자만 살기를 꾀하리오. 망령되이 말씀 마시고 천안 곡도재 한씨댁으로 가시오면 상암장 한 분은 피화하실 것이며 본인은 이곳에서 장사치로 내왕할 터이오니 그리로 가십시다”하고 애걸하오매 상암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세상 천지에 어떤 사람이 살고 싶지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으리오만은 하늘 밑에 중방 드렸느냐 하던 말이 이제와 본즉 중방을 이같이 총총이 드렸으니 어디로 갈 수 있소” 하며 무수(無數) 힐난(詰難)하였다.
이때에 돌무덤이 동리로 어떤 포군(炮軍) 한 사람이 단총(單銃)을 메고 올라오다가 묻기를, “어떤 사람인데 하필 이러한 곳에 있는 것이오” 하거늘 본인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천안 죽계리 사람인데 덕산 등지에 부득이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되돌아서 발정(發程)하였더니 오다가다 소식을 들은즉, 이제 가는 것은 불가하다 하기로 이 마을에서 주저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 대답하여 말하길, “본인은 온양군 송악동리(松岳洞里) 사람인데, 아직은 도로가 불편하니 수일 후 왕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며 해가 지고 있으니 이곳에서 지체말고 본가로 되돌아가기를 권하여서 죽계리로 가는 직로(直路)를 묻자 그 사람이 송악리 후령(後嶺)을 함께 올라가서 남쪽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건너 동리는 북실리(北實里)라 그 뒤의 태령(泰嶺)을 바라보며 자세히 보고 살펴 가라고 인도해 주고는 용두원(龍頭阮) 주점 앞 도로에서 그 사람과 작별하였다.
양인은 북실리 후령 상봉으로 올라 천안 갈치로 향하였다. 달빛은 명랑하여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이 놀라 스스로 겁을 먹고 나뭇잎 사이로 걷는 길은 숨어 다니는 행적을 드러내어 걸음을 걷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층암절벽(層巖絶壁) 수목삼림(樹木森林) 사이로 천신만고 끝에 태화산(泰和山) 상봉을 올라 좌우를 바라보니 곧 죽계리와 많은 촌리(村里)가 눈 아래에 펼쳐져 무릎을 꿇고 앉아 보는 것처럼 지척으로 보였다. 삼림 중에서 띠풀에 의지하여 양인이 은신하여 눈을 붙이다가 한밤중 5경에 상풍한기(霜風寒氣)가 냉랭하여 몸이 떨리고 잠을 이룰 수 없는데, 아랫마을의 닭 우는 소리는 창창하였다
행장을 찾아 본즉, 다만 호두 몇 개뿐이라 상암장께 드리고 말씀 드리기를, “본인은 평명 전에 곡도재 한씨댁에 내려가서 사기(事機)대로 말씀하겠으니 상암장은 이곳에 계시다가 일몰 후 삼경에 내려오십시오” 하고 즉시 출발하여 장산 줄기를 타고 내려가서 곡도재 성황 고개에 도착하니 이미 평명이라 마을 사람들이 문 밖에 왕래하였다. 곡도재 한씨 댁에 도착한즉 이날은 갑오년(1894년) 11월 17일이다.
그저께 함께 출발했던 황도원(黃道元)씨가 그날 산방이 고개 산길로 가다가 큰 호랑이를 만나 크게 놀라 병이 나서 되돌아 와서 머물고 있었다. 본인이 처변이 난처함으로 주인 한씨에게만 상의하고 약조하기를 오늘 밤에 출발하여 경기도로 가겠다고 겉으로만 꾸며 빈말을 하고 이날 짚신을 만들었다. 석식 후에 주인께 좋은 말로 작별하기를 청하니 황씨도 부득이 2경 초에 바로 발정하였다. 본인은 다시 주인댁으로 들어가서 상암장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이날 밤 5경에 상암장이 도착하여 석반 후 3인이 담화하고 유숙하니 11월 18일이다. 상오(上午) 2시경에 첫 눈이 내렸다. 이날 미명에 상암장은 높은 누다락에 올라가 은신 폐화(蔽禍)하였다.
한씨 대부인께서 수양모(收養母)로 결정이 되었다. 본인이 조반 후 주인께 담배 10파를 매입해서 짊어지고 발정할 때에 상암장이 덕산 막골 김원필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기에 노끈으로 비비어 대님을 매고, 주인 한씨의 유회표를 가지고 추운 날씨와 눈보라를 무릅쓰고 발정하야 80리 떨어진 예산군 신암면(新岩面) 종경리 장석준씨댁에 도착하여 장씨 양당(兩堂)께 문안하고, 석반 후 김치덕(金致德)씨에게 덕산 합덕원(合德圓) 봉(封) 유회보발표(儒會步發標)를 구해 달라고 청했다. 표를 구하니 11월 20일이다. 조식하고 덕산 막동리 김원필씨댁에 당도하니 김씨는 출타 중이라 그 댁 노인과 머슴 두 사람이 말하기를 “어디서 어떤 일로 오셨오”하기에 본인이 대답하기를, “예산 종경리 사람으로 원필씨를 보려고 왔습니다”하니 노인이 더욱 의아해 하며 말하기를, “아무도 모른다”하고 고용인들이 본인을 유회 소모소(召募所)로 붙잡아 보내기로 상의하며 무수히 힐난하는 때에 원필씨 대부인이 문 밖에 나와 사정을 묻기에 본인이 은밀한 곳으로 나나서 금월 초 2일 박상암장과 함께 왕래한 사람이고 그 어른의 서간이 있다하고 노끈 편지를 풀어 폭을 이어 낭독한 후 바깥채에 나와 유숙하였다.
다음날은 21일이다. 조반 후 발정할 때에 윗마을 굴량리(倔良里) 소모 유회군 3~4명이 와서 성화같이 붙잡아서 유회소로 가서 형벌을 내리려고 할 때에 천안군 유회표와 공주 유회 삼통표며, 홍주 합덕원 봉표(封標)를 합해서 3장을 꺼내 보이고 말하기를, “타처의 회표(會標)를 이와 같이 가지고 있으니 이 회에서도 표를 지급해 달라”고 하였다. 유회장은 항곡(項谷) 이남규(李南圭)의 가까운 친척으로 대답하여 말하기를, “과연 수상함이 없으니 가라, 이 회표 3장 중 원봉표(圓封標)는 충남 등지에서는 무난히 왕래하는 표라” 말하는 고로, 그제야 심중에 의심을 없애고 풀어 주어 곧 바로 서산 등지로 출발하였다.
이날은 북풍이 크게 불어 백설이 날려서 다니는 행인이 없었다. 눈보라를 뒤로하고 구만리(九萬里) 뜰에 당도하니 동서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첫 방문지는 대천리(大川里) 장대(場垈)를 지나 쇠저골에 당도하니 석양이라 설풍을 무릅쓰고 해미 군장동 이억기(李億奇) 주점에 유숙하였다. 다음날 22일에 발정하여 서산 율지(栗之) 주점 앞에 이르러 벌말에 거주하는 이성돌(李聖乭), 김영근(金永根) 두 사람을 만나서 본인의 대소가(大小家) 형편을 물었으나 주위 이목 때문에 자세히 묻지 못하고 읍(邑) 중에 들어가니, 변난 후 시장(市場)이 처음으로 열렸다고 하였다.
곧바로 서산군 서면 장천리(障川里) 조순일(曺順一)씨 집에 당도하여 조씨의 양당(兩堂)께 배례한 후 본인의 대소가며 이곳 형편을 자세히 물어보고, 지금 사세를 물어보니, 주인이 대답하여 말하길, “이곳 해미, 서산, 태안 3읍은 이루 말할 수 없고무인지경이라 언제나 안정되리오” 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주인이 말하길 이곳에서는 유숙치 못할 테니 다른 곳으로 가기를 청하기에 즉시 출발하여 수현(秀峴)의 대문(大門) 주점에 이르러 청하기를, “본인이 저녁은 마을에서 먹었고, 명일 조반 후 출발할 것인데 유숙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주인이 대답하기를, “그러하면 하룻밤 유숙하라” 하였다. 이곳은 면회(面會) 소재 집이라 보발군 십여 명이 밤새도록 파수를 서고 있어서 그 군인 등과 바깥 형편을 서로 묻고 답하며 술과 음식을 권하기도 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이 날은 11월 23일이다.
태안 시장도 난리 후 처음으로 열려서 장사치들이 내왕하였다. 조반 후 값은 남초로 내고, 남초파(南草把)를 짊어지고 회정(回程)하 나가다가 수현(秀峴) 성황현(城皇峴)에서 태안군 북면 두응리(斗應里) 이오능(李五能)씨를 만나보고, 서산군 표지리(票之里) 가는 길에 다시 이성돌(李聖乭), 김영근(金永根) 양인을 만나 본인의 중백씨(仲伯氏)가 작고한 일, 태안에 사는 중형(仲兄)도 불행하다는 말, 당질(堂姪) 재승(在承)도 다리가 절각(絶脚)되어 앉아 걷지도 못한다는 말, 대소가산(大小家産)이 풍비박산에 무인지경된 말을 자세히 들었다. 정신이 암암하여 혼미한 중에 팔순 노친(老親)의 사생존망(死生存亡)과 어린 조카들, 두 형수씨가 객지에서 고생할 일을 생각하고, 부친 성품에 생존하시기 만무(萬無)한 일을 두루 헤아리니 울격(鬱隔)한 심사를 진정치 못하였다. 혼몽(渾蒙)한 중에 드는 생각이 이곳은 사지(死地)라 부친이 생존하셨더라도 금번에 내가 들어가 부친을 뵈어도 부친의 마음을 위로함은 고사하고 함정에 빠지는 것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 몸이 부친 앞에서 없어지면 도리어 부모에 불효할 바요, 불초(不肖)한 이 자식이 살아서 어린 조카들을 인도하여 선영과 조상의 기일이며 부모의 향화(香火), 금화(禁火), 금벌(禁伐)을 인도하여 교육함이 자식된 도리요 이 몸이 없어지면 천지간의 막대한 불효란 생각이 용출하기에, 천사성령 전에 기도하고 다시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고 출발하여 천안 등지로 가다가 그 날에 서산군 남당리(南堂里) 주점에 유숙하였다.
24일에 출발하여 덕산 쇠재 주점에 유숙하고, 다음날 예산 종경리 장석준씨 댁에서 또 유숙하고, 익일은 11월 26일이라 발정하여 예산 두물 나루머리에 이르러 태안 소근진 사는 김광빈(金光彬)씨를 만나 담화하니, 김씨가 말하길, “나는 서울서 내려오는 길이라” 말하기에 본인이 김씨에게 부탁하길, “태안 두능리 본인의 처남 최윤남(崔允南)에게 나의 소식을 전하여 달라” 말하고 작별하여 신창 금반양(金盤陽), 온양 소일로 해서 천안 곡도치 한윤화씨 댁에 당도하여 상암장께 무사히 왕래한 말씀과 본인의 대소가 형편이며 거처마다 형편을 세세히 들은 대로 말하고, 머물다가 그 때부터 본인은 장사하는 사람으로 알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