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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수일 후 11월 3일에 본인이 발정하여 예산 종경리 장석준씨 댁에 도착하여 장씨의 양당께 상암장의 문안을 전하고 시운시변을 서로 담화 후 주장(主長)이 계신 집이 매우 가난하여 지나갈 도리가 없다는 말씀을 하니 장씨의 모친께서 백미 1말 대금(代金) 돈 한 꿰미, 윤성공(尹聖公)의 부인께서 백미 1말, 김춘근(金春根)씨가 백미 5되를 주어서 이것을 가지고 다음날 천안 곡도에 당도하여 상암장께 일일이 말씀드린 후 양식으로 보용했다.

동 16일에 본인이 주인 한씨와 상의하고 대두(大豆) 2되와 남초 10파(把)를 동리(洞里) 박건여(朴建汝)에게 매득(買得)하여 가지고 출발하여 예산 두물나루머리에 당도하여 종경리 사는 토병(土兵) 이기(李奇)에게 곤욕을 당할 때, 동리에 사는 김춘근(金春根)의 부친이 말하여 무사히 종경리 장석준씨댁에 당도하였다. 그 때에 상암장의 부인이 그 아들 천진(天鎭)을 거느리고 와서 머물고 있는지라 만나 뵙고 주장(主丈)의 문안을 세세히 말씀드렸다. 그 때에 본인이 노독이 자심하여 윤씨댁에서 3일을 유련하고 남초와 대두(大豆)를 천안군 대골까지 왕래하여 방매하여, 일부는 백미와 통침 민어로 교환하여 가지고 노로지 포구를 건너서 덕흥을 거쳐 신창 금반양 주점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다음날 천안 곡도 주인댁에 당도하여 민어(民魚) 몇 수를 방매하니 장사하는 증거가 되었다. 그 후로 주인집에 공장인(工匠人)의 연장이 갖추어져 있기에 본인이 그 연장을 가지고 모반 2개와 초롱 2개며 두리반을 고쳐서 제조하여 쓰게 하고, 짚신을 제조하야 방매(放賣)도 하며 지내니 그럭저럭 12월 25일이다.

생각한즉 남의 집에서 과세(過歲)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고 정초(正初)에 지낼 계책도 난처하기에 상암장께 말씀을 고하고, 예산 종경리 장석준씨댁에 도착하였다. 여독으로 생긴 병이 재발이 되어 걷는 것이 어려웠다. 여러 분을 만나서 상암장의 어려운 근경을 말씀하니 윤씨 부인 박경운(朴鏡雲)씨께서 백미 1말, 장석준 대부인께서 백미 5되, 김춘근씨가 백미 1말을 주시기에 받아 놓고, 여독이 낫지 않아서 떠나지 못했다. 이날은 갑오년(1894년) 12월 그믐이다. 윤씨댁에 머물렀으나 지목이 심하여 윤씨도 합덕리(合德里)로 폐화차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때 형편이 타지에서는 해를 보내지 못하겠기에 부득이 하오(下午)에 발정하여 30리 거리인 신창 금반양, 이춘보(李春甫) 주점에 일몰 후 도착하여 섣달 그믐에 차가운 등(燈)에 의지하여 송구영신(送舊迎新)하였다.

이날은 을미년(1895) 정월 초1일이다. 이날 미명에 주인 춘보씨의 차자가 병으로 인해 죽은지라 하는 수 없어 주인과 본인이 함께 수습하여 출빈(出殯)하고, 다음날 짚신 한 켤레를 제작하여 안주인을 주고 주인과 서로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였다. 3일에 본인이 발정하여 천안 죽계리에 당도하니 신정 초라 사람들이 모두 깨끗한 설빔으로 바꿔 입어 본인의 형용(形容)은 피난민의 상태를 면하지 못하였다. 마침 역인(驛人) 부상(負商) 한 명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수상한 자이다” 하며 무수히 힐난할 때에 그 동리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곡도서 왔다가 가는 사람이라” 말한즉, 저 부상이 더 말하지 않고 보내주어 본인은 곡도재 한씨 댁에 도착하여 상암장을 뵙고 주인과 기쁘게 상대하여 금번에 내왕(來往)한 일이며 거처마다 인심이 변한 형편을 세세히 담화하였다.

그럭저럭 머물다가 16일에 태안군 관송리(貫松里) 사는 조성순(曺成順)씨가 내왕해서 상암장과 본인이 상봉했다. 조씨를 대하여 우리 도(道) 운로(運路)며 닥쳐올 결과가 어떠한지 등을 대강 담화하였다. 조씨는 신도(信道)라 이곳 형편을 관찰하고, 즉시 출발하여 근동 각 마을로 다니며 식량을 구걸 동냥하여 몇 두승(斗升)을 가지고 오기를 2, 3차 하였다.

2월 초2일에 본인이 예산 종경리 장씨 댁에 도착하여 담화 후 주장 계신 곳의 극히 어려운 정황을 이야기하니 박경운(朴鏡雲)씨께옵서 백미 2말, 석준 대부인께옵서 백미 1말을 주시기에 받아가지고, 동 5일에 천안 곡도재 주인댁에 당도하여 상암장께 사정을 세세히 전해 주었다. 본인이 해미, 서산, 태안 등지로 가서 그 곳의 인심 형편을 탐문하고자 하는 생각을 상암장께 말씀 드리자 상암장이 말씀하시기를, “해미, 서산, 태안 관내(管內)가 무인지경이라 사망자 수천 명이요, 몸을 다친 사람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본시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믿음이 있는 자가 많았는데, 이처럼 극히 어려운 세상에 있으면서 우리 도의 진리와 장차 다가올 결과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마음을 다시 정하고 경고문(敬告文) 한 장을 제술(製述)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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