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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을미년(1895년) 2월 13일에 본인이 경고문 글줄에 차례를 매겨 놓고 그 사이를 갈러 종이 노끈을 비비여 대님을 매고 떠날 때에, 상암장께서 가는 길의 어려움을 재삼 당부하시고, 본인도 천심(天心)을 다시 정하여 지목 중에도 무사히 왕래하기를 천사성령 전에 빌고 출발하야 예산 종경리 장석준댁에 유숙하였다. 다음날 출발하여 해미 군장동 이억기 주점에 유숙하고, 2월 15일 발행하여 서산군 술왕치(述枉峙) 주점에 이르렀을 때에 태안 소근진 사는 박광우(朴光宇), 박광옥(朴光玉) 양씨를 상봉하여 담화 후 세 사람이 석반을 먹고 함께 발행하여 40리를 갔다.

태안군 원서면(遠西面) 신천리(新川里)에 이르러서 해시(하오 9~11시)경에 양인을 작별하고, 본인은 독행하여 북이면(北二面) 동해리(東海里) 큰집에 심야 5경에서야 도착하니 인적은 고요하나 다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 아래 중형댁에 이르러 두루 주저하다가 가만히 음성을 내어 인기척을 내자 중형 형수씨가 본인의 음성을 듣고 나오시어 인도하여 부친 전에 배알하온 후 대소댁(大小宅) 세 형수씨와 중형과 조카들이며 모든 권속이 재생상봉(再生相逢)하였으나 중백씨는 돌아가셔서 오지 못했으니 슬픈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본인의 중백씨 석승씨는 갑오년에 서산 접주로 ●●으로 빈곤한 교인에게 조(租) 몇 석과 포백목(布白木) 수십 필을 내어 의자(衣子) 일건(一件)에 따라 정조(正租) 몇 두(斗)씩을 먼저 급여한 소치로 인동의 부자 김익수(金益水)의 승기자(勝己者) 염지(厭之)로 갑오 11월에 유회진에 붙잡혀 가서 갑오 11월 16일에 바로 포살을 당하고 경가탕산(傾家蕩産)하였다.

재차 생각하고 마음을 정해서 부친과 형수씨를 위로하고 좌우를 바라보니 처자(妻子)가 없기에 묻자, 대답하기를, “수철리(水鐵里)로 갔다”고 하였다. 그럭저럭 곧 날이 밝았다. 평명 후에 본인의 처자가 와서 내외가 상봉하였다.

수일을 숨어서 머물며 배팔귀(裵八貴) 모친과 3, 4인만 만났다. 그 때에 본읍에 사는 이제화씨는 세금을 걷기 위해 본면에 온 장교로 동학교에 결심이 선 자이다. 본인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보고는 담화 후 갔다. 신자 4, 5명을 만나 담화하고 노끈으로 가지고 온 경고문을 연속하여 낭독하며 시운시변과 곧 다가올 결과를 담화하며 모든 일을 본인의 중형 석훈(錫勳)씨께 전래하여 인도케 조치하고, 수일간 입었던 옷을 갈아입었다. 그 때에 부친께옵서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미 운수(運數)에 관계된 사람이다. 어서 가서 맡은 일을 성공하여라. 이 곳에 오래 머물면 오히려 근심이니 자주 왕래하여 궁금하지나 않게 하여라” 하셨다. 본인이 부친의 가르침을 황송히 봉승하고 떠날 때 중형께 다시 고(告)하기를 “이 문자로 선악(善惡) 인심(人心)을 가리게 하시어 비밀리에 전해 보게 하옵소서” 부탁하였다.

갑오년(1894년)에 집안에서 논을 팔아서 남은 30냥을 받아 지니고, 즉시 발행하여 4일만에 천안 곡치 한윤화씨 댁에 도달하야 상암장과 주인과 기쁘게 상봉하고 각처 인심 형편이며 본인의 대소가(大小家) 일을 일일이 설명 후 가지고 온 30냥을 상암장께 납상(納上)하였다. 그 중 얼마는 한씨댁 한식 제사 때에 보용하도록 급여하였다.

3월 3일에 본인이 동군(同郡 )하죽계리(下竹溪里) 한윤화씨의 백씨(伯氏) 윤흥(允興)씨댁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길에서 예산에 사는 김기태(金基泰)씨와 처 연홍(淵弘) 두 사람을 상봉한 고로, 즉시 상암장께 인도하여 4인이 상대한 후에 제반사를 격론하여 합도운로(合道運路)며, 곧 다가올 결과를 세세히 담화하니 비유하건대 옛날 주문왕(周文王)이 강태공을 만나볼 때인들 이보다 더 했겠는가?. 여러 시간 담화한 후에 갔다.

3월 보름 사이에 경암장의 경문(敬文)을 가지고 또 출발하여 해미 군장동에 이르러 곽기동씨를 만나 이야기하고 곧 태안군 동해리로 가서 부친을 뵙고 각처에 비밀을 통기하여 모모(某某) 두령(頭領)을 만나고 경통문자(敬通文字)를 일일이 돌려보게 하였다.

을미 3월 12일은 서산 중형수께서 유복자 의승을 낳았다. 머무른 지 수일만에 소간사를 경론하고 본인의 가산물(家産物)을 판 돈과 답가(沓價)로 남겨둔 돈 60여 냥을 지니고 25일 사이에 천안 곡도재에 도착하였다. 상암장과 주인께 대하여 금번에 무사히 왕래한 형편과 사실을 세세히 말씀 드린 후 금번에 연원댁(淵源宅)을 귀정(歸正)할 뜻으로 본인에게 남은 가산을 방매한 전문(錢文)이 있으니 어느 곳에 집터 1좌(座)를 매득(買得)하라고 말씀드렸다. 이때 주인이 말하기를 하죽계촌(下竹溪村)의 자기 백씨가 거하는 곳에 초가 1좌가 있는데, 가격은 21냥이라고 하였다. 이에 씨와 본인이 즉시 내려가 21냥으로 계약하였다.

4월 초5일에 천일(天日) 기념예식을을 한윤화씨댁에서 봉행하였다. 그때에 변천여(卞天汝)씨와 성치문(成致文)씨와 김성내(金聖來) 3명이 왔다. 조성선씨가 예산 종경리의 장석준(張錫俊) 집에서 상암장 부인을 조석준씨 대부인과 같이 모시고 4월 10일에 천안 곡도재 한윤화씨 집에 도착하여 상암장 부부가 상봉하였다. 3일을 머물다가 을미 4월 14일에 상암장께서 처음으로 천안 하죽계리에 신설한 살림으로 조처하였으나 지목이 심하여 처변하기를 박상암이 성을 인동 장씨라 처변하였다.

5월 3일에 상암장께서 강원도로 출발하셨다. 그때 이래로 상하통신(上下通信)과 연원댁 신설 살림에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다. 본인이 홀로 있으면서 좌우를 돌아봐도 상의할 곳도 전무하오매, 이같이 우매한 식견으로 어찌 감당하겠는가? 이때부터 상암장의 산림을 조성선(曺成善)이 같이 살며 주간하게 하였다. 조성선씨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마음이 천하를 뚫는 도인이었다. 연원댁에서 여름 내내 지내는 동안 다른 곳과 서로 의논할 길이 없어, 인가에서 보리겨를 구하여 겨수제비로 10여 일을 지냈다. 성선씨가 항상 식상(食床)에 대하여 좋은 안색으로 좋다고 하며 산림을 유지하게 하였다.

5월 10일에 상암장의 경고문을 봉승하고 태안(泰安) 접중(接中)에 들어가 각처의 두령에게 비밀 통기하여 서로 만나 경문을 돌려 널리 알려 교(敎)의 운로(運路)가 융화(融和)되어 다시 크게 되었다. 그때 김병두(金秉斗)씨를 만나 담화하고 좌우연맥(左右連脉)을 널리 통보하기로 약조를 정하였다. 각처 두령 몇 사람이 노자 20금(金)을 모아 주기에 가지고 출발하여 수일 만에 천안 죽계 연원댁에 이르러 양식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6월 초에 강연홍(姜淵弘)씨 편에 경암장께서 모처를 비밀 통기하려 하기에 본인이 즉시 강원도로 출발하여 안성, 여주 양화 나루를 건너 지평 용머리로 하여 강원도 홍천군 남면 고대리 김우범씨 집에 도착하였다. 상암장을 뵙고 소간사와 전후사실을 세세히 말씀 드린 후 상암장께서 말하기를, “장석(丈席) 문안(問安)을 근래에 비밀리에 듣되, 봉상지도(奉上之道)가 불성설(不成說)이다.” 이에 사세가 시급하니 왕래 일자를 정하여 예산, 해미, 서산, 태안 접중(接中)에 일일이 통기하며 이 경고문을 돌려 보게 한 후 돌아오라 하셨다.

본인이 응낙하고 경고문을 지니고 17일에 출발하여 예산 등지와 서산, 태안 등지까지 경고문을 반포하며 진의지사(眞議之事)를 주선하되, 일이 미비한 까닭으로 약조한 기한에 위반이 되어 무한 근심하였다.

7월 5일에 박덕화, 박응호, 곽기동 3명이 본인과 동반하여 강원도 홍천 고대 김우범씨댁에 도달하여 상암장을 뵙고 담화하였다. 본인이 지난 번 관하(管下)에 통신과 조직은 먼저 조처하였으나 상의한 일이 미비한 까닭으로 기한을 어기게 된 말씀을 세세히 담화하였다. 본인이 곽기동, 박응호 양씨와 3사람이 우선보씨 집과 건은다리 오봉운(吳奉云) 양씨 집에 왕래하며 며칠을 머물렀다.

이보다 앞서 7월 20일에 정선 관동(關東) 접주 이원팔씨가 장석으로부터 박상암장께 들어가 나를 바로 들어오게 하라는 분부를 전하고 해당 지역의 노정기(路程記)를 비밀리에 전해 주었다. 다음날 바로 출발하여 인제군 유목정리(楡木亭里) 최영선(崔永善)씨댁을 방문하여 이르자 해월 선생주께서 기뻐하시고 내당에 들어오기를 청하여 바로 들어가 승안(承顔) 배알하였다. 선생주께서 손을 잡고 기뻐하며 너를 도통(道通)하게 할 것이다 하고 그간에 어떻게 폐화(蔽禍)하였느냐 하시고 전후 받은 곤란과 지난해 12월 그믐 저녁에 이곳에 왕림하신 후 지금까지 문 밖에 나가지 않고 백일(白日)을 보지 못했으니 이는 천옥(天獄)이다. 이와 같음으로 천사극념(天師極念)이 재난(在難)이요, 무안(無顔)한 까닭으로 우리 도(道)를 많이 구하였다. 너도 깊이 생각하라 하시고 일시간이지만 많은 교훈을 세세히 설화하였다.

동 7월 15일에 본인이 경고문을 가지고 수일만에 천안 죽계리댁에 이르러 강원도로 왕래한 말씀을 설화하고 바로 예산과 서산, 태안 등지로 20일에 들어가 경고문을 반포 통지하온즉 그때로부터 각처에 침잠(沈潛)되었던 운수(運數)며 선생도덕(先生道德)이 화려하게 회복(回復)되었다.

상암장께서 18일에 장석(丈席) 문안차 발정하여 인제 느릅정이 최영선씨댁에 이르러 해월신사주(海月神師主) 전에 승안 배알한즉 그때에도 신사주께서 짚신을 만들어 매일 2~3켤레씩 이르니 한달이면 7~8죽(竹)에 이른다 하시며 도리강(道理講)은 1시간이나 설화하셨다. 대략 전문 20냥을 바치고 다음날 인사드리고 고대 김우범씨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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