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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을미(乙未)년 8월 본인이 홍천 고대 김우범 집에 도착하여 상암장을 뵙고 본인이 공주, 천안, 예산, 덕산, 홍주, 결성 산외(山外) 5~6군과 산내(山內)의 해미, 서산, 태안 3군 인심과 형편이며 각 관내 규모를 일일이 담화하였다. 며칠을 주인댁에 유숙할 때 상암장 동생 덕화씨가 수토(水土)를 이기지 못하고 황달병에 걸렸다가 약을 쓰지 않고 저절로 나았다.

해월선생주의 문안을 자세히 들은 후 동 6일에 본인이 경고문을 봉승하고 즉시 출발하여 천안 죽계댁에 이르러 상암장 문안을 설화하고 한윤화씨 대부인께 가서 뵈옵고 상암장의 문안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고 예산으로 해미, 서산, 태안 관내에 들어가 경고문을 반포하게 하고 일이 급하여 본인이 속히 천안 죽계댁에 당도하여 절일(節日)을 지내고 가산(家産)을 조처하였다. 즉시 출발하여 18일에 본인이 강원도 홍천 고대 김우범씨 집에 도착하여 상암장께 왕반(往返)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린즉 상암도 지난 일을 자세히 설화하였다.

수일을 머물다가 9월 2일에 경고문을 봉승하고 출발하여 천안 죽계 연원댁에 이르러 가사를 분별(分別)하였다. 예산, 해미, 태안 관내에 들어가 경고문을 비밀리에 반포하였다. 같은 달 13일은 본인의 모친 소기일(小忌日)로 원근 친척과 각처 제씨가 도착하였다. 지목에 구애되어 이웃집에 숨어 있다가 틈을 타서 왕래하며 교중 규모를 일체 준행케 지도하였다.

20일 이후에 출발하여 27일에 홍천 고대 김우범씨 집에 도달하여 상암장을 뵙고 장석 문안을 자세히 물은 후 접중사를 세세히 담화하였다. 다음날 구암장과 의암장 두분께옵서 우범가에 이르러 상봉한즉 의관과 의복이 심히 초췌하여 군색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수일을 같이 머물 때 본인이 짚신을 제작하매 구암장께서 신발 수장하는 본의를 가르치시기에 들었다.

10월 9일에 경고문을 봉승하고 출발하여 천안 죽계댁에 이르러 문안 말씀을 드리고 산내 접중에 들어와 문자를 일일이 반포하고 규모를 단속한 후 접중에서 봉상물 석화혜(石花醯) 6~7기(器)와 조기 3속(束), 노자를 같이 준비하여 곽기동씨가 높은 지게에다 부상(負商)처럼 꾸며서 지고 11월 6일에 전량진과 3명이 출발하였다. 천안 죽계댁에 이르자 초겨울 얼음으로 격강(隔江)되어 엷은 얼음을 3명이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너 곡수 장터로 지평 넙우내 주점에 유숙하였다.

11월 9일 식전에 맹렬한 동풍(東風) 한기(寒氣)를 무릅쓰고 밤골 이선달(李先達) 주점에 도착하매 서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반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용머리 장터, 골운을 지나 새터 고개로 해서 홍천 남면(南面) 걸은다리 김서울의 집에 유숙하였다.

10일에 향화대(香花垈)로 알미봉 후령을 넘어 고대 김우범씨 집에 도착하여 상암장을 뵙고 가지고 간 물건을 놓아두었다. 머무르며 세세히 담화하며 세말(歲末)이 멀지 않은데 사상(事上)의 변(變)이며 피차가 심히 빈곤함을 서로 담화하였다. 본인이 말하기를 속속히 도달하리라 하고 경고문을 봉승하고 바로 예산과 산내(山內) 포중에 문자를 일일이 반포하고 다소의 찬비(饌費)가 대략 이루어진 고로 본인이 바로 예산 김기태씨와 발행하여 천안 죽계에 당도하여 유숙하였다. 12월 5일에 강원도 김우범씨 집에 이르러 좌우사를 상암과 담화하였다.

을미년 12월 7일에 상암장, 이원팔씨, 김기태씨, 본인, 주인 김우범 도합 5명이 출발할 때 석화젓 남은 것 4~5기(器)를 가지고 출발하여 인제군 유목정 최영선씨 집에 도착하였다. 주인 최씨가 선생주께서 엇그제 어디로 행차하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때 인가의 황교인이 다른 곳으로 떠나감을 듣고 기장떡을 만들어 6~7그릇을 가지고 온 고로 모두 포식하였다.

을미 12월 12일에 주인 김우범과 5명이 모두 출발하여 충청도로 향하였다. 14일에 충주(忠州) 용당리(龍堂里)로 한어미 고개를 지나 마을에 당도한즉 주점이 없고 날이 저물었다. 동네 두수인(頭首人)을 방문한즉 정씨였다. 나그네가 날이 저물었는데 주점이 없으니 매식(買食)과 숙소를 청하였다. 정씨가 한 노파를 불러와 조석을 대접하라고 지휘하였다.

다음날 출발할 때 동네 사람이 말하기를,“어제 대취원 장터에서 수백 명의 일한병(日韓兵)이 시장 노변을 아래, 위로 막고 억지로 머리를 깎는다”는 말을 듣고 큰 길을 피해 작은 길로 괴산군으로 청주 지경내 주점에 유숙하였다. 다음날 출발하여 괴산 삼거리로 청주(淸州) 앞으로 보은(報恩)으로 향하다가 중간에서 사기를 대강 설명하고 뒷날 보은 바람부리 김치양씨 집으로 1월 보름내로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3사람은 보은으로 갔다.

김기태씨와 본인은 같이 청주 골운으로 새터 고개를 넘어가는 다리 장터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출발하여 천안 풍서평(風西坪) 죽계 상암장댁에 이르러 말씀을 전하였다. 김기태씨는 예산으로 향하여 사기를 주선하고 본인은 내산으로 들어가 사기(事機)대로 주선을 모든 곳에 비밀리에 반포하였다.

본인은 서산 송정 큰집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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