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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이 때는 병신(丙申)년 정월 보름 후에 접중에서 근근이 주선한 봉상(奉上) 전문(錢文) 몇 관(貫)을 지니고 출발하여 천안 죽계댁에 도착하여 김기태씨와 한윤화씨 세 명이 출발하여 보은 바람부리 김치양씨 집에 당도하였다. 주인과 담화하고 숙박한 후 다음날 24일에 상암장이 도착하여 뵙고 담화 후 4명이 동반하여 말티 고개를 넘어 말티 주점거리로 갈목리 이원팔댁에서 유숙하였다.

정월 28일에 장석의 분부를 받들어 경통문자(敬通文字)와 연원장(淵源丈)의 경고문 1장을 같이 봉승하고 김기태씨와 본인이 출발하여 천안 죽계리에 도착하여 좌우사를 대강 설화하고 예산으로 해미, 서산, 태안 접중에 들어가 각처 두령을 만나보고 장석의 분부한 경문(敬文)을 일일이 반포하였다. 또 연원댁 가역(家役)을 조처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 후 서로 의무를 권면하였다. 그때 각 두령이 약간 주선이 되었기에 20일 이후에 출발하여 25일에 천안 죽계댁에 도착하여 상암장댁 가솔(家率)의 이사할 짐을 단속하였다.

다음날 이사를 위해 출발할 때 그집은 강연홍씨가 유숙하게 하고 이사할 때는 강연홍, 한윤화, 박응규, 본인 합 4명이 출발하여 3일에 보은 갈목리 이원팔씨 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날은 2월 29일이다. 새로 지은 집에 이사하여 입택(入宅)하였다.

본인은 이곳 연원댁 가사(家事)도 살피며 머물렀다. 그 때 본인이 강연홍씨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서로 교대로 내왕하여야 통신이 자주 될 뿐 아니라 살림에 낭패가 없을 것 같으니 아무쪼록 약속을 어기지 말고 교대로 왕래하기를 약조하였다. 본인이 말하기를 이 달 25일 내로 형께서 왕래하셔야 절화(絶火)를 면할 것이오니 그리 알고 조치하옵소서 하고, 본인은 상암장과 거하며 비밀리에 장석과 연락하였다.

3월 10일 대신사 기도 향례에 강연홍, 곽기풍 두 사람도 내왕하여 참석하였다. 그 때에 장석의 입의경문(立義敬文)이 있는 고로 강연홍씨와 곽기동 두 사람에게 맡겨 출발하였다. 4처 접중이 비록 호수(戶數)가 천여 호에 가깝지만 통신이 불편할 뿐 아니라 아울러 위험하고 지목이 있는 고로 믿음이 있기가 어려웠다.

이보다 앞서, 3월 20일 후에 서산, 태안 관하에서 두령 김병두, 안응조 두 사람을 보내 봉공(奉公)의 예로써 각처에서 성심껏 출력(出力)하여 의연금 90꿰미와 건어 물종 얼마를 모아 가지고 가다가 중간에서 신창 금반양 점에 유숙하다가 도둑을 만나 전할 물건을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중상까지 당하였다. 이 주점에서 수일을 치료하고 바로 돌아갔다. 본인은 신설한 가역도 살필 뿐 아니라 노독으로 신기(身氣)가 불편하게 지냈다. 본인과 약조한 강연홍씨도 그믐이 지나가도 오지 않았다. 두 곳의 일이 모두 낭패를 당하였다.

4월 7일에 전량진이 와서 김병두, 안응조에게 고하고 돌아왔다. 신접 살림에 식객은 20명에 가까웠다. 식량과 식염을 한달이 넘도록 마련할 길이 없어 어찌 곤란함이 없겠는가? 식량과 식염이 모두 떨어졌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매일 조석에 쑥과 수리취에 수수가루 1승을 섞어서 10여 일을 먹었고 결국에는 식량이 그도저도 떨어져 맨 수리취로만 장도 식염도 없이 곡식을 끊은 것이 6일에 이르렀다. 6일 저녁은 바로 4월 16일이다.

석양 때 전라도 구덕노(具德老)씨가 관하(管下) 두 사람을 이끌고 이르거늘 상암장 부인과 그 형수씨께옵서,“집에 앉아 있는 우리는 염려치 아니하나 멀리서 오셨는데 식사 대접을 못했으니 어찌하리오”하셨다. 마침 그때 이원팔씨 부인께서 콩죽 한자박이를 가져와서 저녁을 손님과 같이 반 그릇씩 고르게 나누어 먹었다. 그날 일몰 후에 김기태와 서봉여 두 사람이 온 까닭에 이웃집 서정삼 집에서 백미 2되를 빌려와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다. 김기태씨가 돈 37냥을 가지고 왔다.

다음날은 17일이다. 식전에 상암의 계씨(季氏) 덕화(德化)씨를 안도리에 보내 백미(白米)와 소금을 사다가 아침밥을 지어 먹은 후에 근근이 지냈다. 그 때 최춘남씨가 수양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곤란을 같이 하였다. 이때도 세상 인심에 음해(陰害)가 많았다. 신설한 가옥 3칸 앞뒤 툇마루를 만든 것이 풍설에 8~90칸을 빨리도 건축하였으니 반드시 이 집주인이 동학 대두목이 아니면 소위 거부(巨富)의 가옥이라는 소문이 외지에까지 떠들썩하여 보은군에서 관인을 두세 차례 보내 알아보고 돌아갔다. 그 때 마침 장석(丈席)의 입의경문(立義敬文)이 계신 까닭에 본인이 경고문(敬告文)을 봉승하고 서봉여씨와 같이 출발하여 각 관내에 반포하였다.

4월 29일이다. 상암장이 김기태와 병행하여 장석 문안차 들어왔다. 그 사이에 선생주댁이 충주 마루택리[충북 음성군 금왕읍 구계리]에서 매우 위험하여 창동리로 몰래 거처를 옮기심을 듣고 바로 창골리에 이르러 선생주 전(前)에 승안 배알하였다. 선생님께옵서 크게 걱정을 하시며 너는 어떻게 처변을 하였기에 가족을 모아 가산을 신설하자마자 너의 집 소식을 들이니 가족이 모두 굶어죽는다는 말이 날마다 끊이질 않기에, 신현경에게 명하여 금 50냥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현경이가 왼쪽 다리에 독종이 매우 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일피일하고 아직 미루고 있으니 너는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상암장이 고하기를 가역에 세속의 음해한 말과 해미, 서산, 태안 접중에서 오다가 중간에 도적을 만나 중상까지 당하고 돌아간 말씀을 자세히 상달한 후, 기태가 전 37꿰미를 가지고 온 고로 바로 조치하였으니 과히 염려 마소서, 선생주댁이 정을 베푸시니 황송하고 황송하다고 고하였다. 이에 “너희들은 천리 자연의 이치를 잘 알지 않느냐? 이번에 너의 집 식구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된다는 낭자한 풍설의 지목(持目)을 감당하게 하신 바라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4월 29일에 본인이 보은 갈목이 상암댁에 도착하여 관내에 제반사를 조처한 일을 세세히 말씀드렸다. 5월 1일에 이원팔씨께 노정(路亭) 지으러 상암장과 본인이 선생주 전에 함께 갈 때 석화혜(石花醯) 5그릇과 건어포 몇 짝을 올구망태에 담아 짊어지고 보은 삼거리로 멍애목이 앞, 동관암현, 상주 갈령, 송천을 지나 청계사 앞, 동북간 십리장곡으로 올라가 고대 산막리에 당도하였다. 선생주 전에 문안 배알하고 석화혜와 포를 올리고 다음날 하직하고 갈목리로 물러나왔다.

5월 6일에 상암장과 본인이 출발하여 천안 죽계동과 곡도재 한윤화씨댁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다음날 출발하여 온양군 바느실리 김성도씨와 이대순씨를 방문하고 신화경씨 집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홍주군 대접주 김영필씨가 그 관하 김철수, 김재희 두 사람과 같이 와서 만났다. 김영필씨가 상암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피화하였는지 몇 마디를 설명하고 김철수, 김재희 두 사람은 본인의 관하 수두목으로 매사를 모두 이 두 사람에게 맡겼으니 오늘부터 시작하여 예포 대접주장께 도의 종지(宗旨)와 운로(運路)가 좋고 좋지 않음이며 좌우 대소사를 영영 무궁히 전탁하오니 특별히 가족처럼 생각하여 만사여의(萬事如意)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본인은 그날 출발하여 해미, 서산, 태안 관내에 들어가 수모(誰某) 두령을 비밀리에 통기하였다. 5월 25일에 김병두, 문장희, 김종희 3사람을 인도하여 상암장께 상봉케 조처하고 본인은 각처로 왕래하여 규모를 지휘하고 건포(乾脯), 건합(乾蛤) 몇 건을 모았다. 수모 두령을 상암장께 승안 후 본인은 서산, 태안 관내를 6월 3일에 들어가 각 포를 순회하고 바로 봉상물 몇 건을 가지고 문장준, 변필삼 두 사람으로 하여금 보은 갈목이 상암댁에 이르게 하였다. 같은 달 10일에 본인이 선생주 행차소에 발정하여 조개젓 5그릇과 찬수(饌需) 건포 등 6~7조를 올구망태에 넣어 지고 산역군과 같이 무리에 수건을 두르고 상주 높은터 산막에 들어가 선생주 전에 승안 배알 후 전문 30냥과 제반 찬물을 올리고 다음날에 배티 갈목리에 당도하였다.

이와 같이 행차소 선생주(先生主) 전(前)에 왕래하기를 한 달에 2~3차례, 혹 3~4차례씩 출입할 때에, 혹 의관을 입고 혹 수건도 두르고 본인이 내왕하였고, 혹 연원장[상암 박희인]도 그렇게 하시며 두 사람이 선생주 전에 문안차로 상주 높은터 산막에 역시 비밀리에 왕래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896년) 7월 8일이라. 홍주인 김영필씨가 선생주 전 승안차로 보은 갈목리 상암댁에 찾아와 4~5일 머물고 있어 14일에 본인이 영필씨를 인도하여 상주 고대 산막에 입거하여 선생주 전 승안 배알할 때 선생께옵서 영필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처럼 위험한 때를 어떻게 이겨 냈느냐”고 물으시고 도의 무극지리(無極之理)와 운(運)의 무궁지수(無窮之數)며 천리의 자연함을 교훈하셨다.

다음날 배티 갈목리로 갈 때에 영필씨가 부탁하기를, “지난번 온양 바느실서도 말씀하심과 같이 저는 늙었을 뿐 아니라 몸이 불편하여 추신하기 어려우니 아주 연원을 서로 잇기를 영영 전탁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식구로 알지 말고 친가족과 같이 진정한 마음으로 생각하옵소서. 김철수, 김재희 이 두 사람을 만약 내가 연원을 계속하여 주지 못하고 뜻과 같지 않으면 남에게 못할 일을 시킨 바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리까” 하였다. 소원성취하여 주시기를 재삼 당부하시고 17일에 출발했다.

병신년(丙申年, 1896년) 8월 15일에 본인이 굴젓 몇 그릇, 절사 제물, 버선 1건을 봉해 주시기에 출발하여 선생주 전에 승안 배알 후 가져간 물종을 바쳤다. 젓과 음식이며 버선을 일일이 살펴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박아무개가 배필을 잘 얻었다.”하시고 본인에 대하여 교훈하시기를, “이 절사는 일 년 농사한 치성이라 채소도 갖추고, 과실도 머루, 다래, 보리수까지라도 갖춰 차려 올리는 일이 당연한 도리니라” 하시기에 봉승하고, 배티 갈목리에 이르렀다.

9월 5일에 경고문(敬告文)을 봉승하고 천안 곡도에 있는 한윤화씨댁에 도착하여 대추 한 말을 구해가지고 윤화씨로 동행하여 수일만에 서산군 마산면 송정리 본인의 큰집에 도착하여 부친 전에 배알 후, 태안으로 들어가 각처 두령에게 통지하여 상봉, 담화하고 경고문을 일일이 반포케 조치하였다.

9월 13일은 본인의 모친 기일이나 그 때까지도 지목 중이라 제사에 절도 못하고, 윗집 김익선의 집에 갔다가 손님이 간 다음에 들어가 수일 숨어 지내며 조개젓 한 동이를 구하고, 엿그릇을 만들어 17일 윤화씨와 함께 출발하여 천안 곡도 한씨댁에 이르러서 약소하나 정표로 한씨 대부인께 약간의 엿을 드리고, 젓 일부는 목화로 환매하여 한씨와 반반씩 나눴다. 한씨와 동반하여 23일에 보은 갈목리댁에 당도하여 왕래한 사정을 세세히 담화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896년) 10월 2일에 본인이 해미, 서산, 태안 수접주(首接主) 교첩을 받았으며, 그 때를 위시하여 각처 포중(包中)에 육임(六任) 규모(規模)로 개설하였다. 그 때에 선생주댁(主宅)이 충주 창골을 떠나 경상도 함창군내(咸昌郡內) 은치리(隱峙里)로 이전하여 거주하였다. 해월신사주께서 상주 고대 산막(山幕)에 오셔서 4월부터 11월까지 피신하실 즈음에 팔도의 아무개 두목은 다 선생주전에 먼저 문후하게 하니 박상암댁 갈목리로 먼저 도착하여 유숙하고 일일이 산중 위태한 길을 인도하는 길 안내자가 되었었다.

11월 21일에 천안 곡도재 한윤화씨 대부인께서 돌아가셨다. 12월 27일에 본인이 갈목리 상암댁에서 세찬(歲饌)을 받들어 봉하여 짊어지고 선생주댁으로 발정할 때 보은 속리 산막, 상주군(尙州郡) 쉬운섬이, 외암(渨岩) 장대(場垈)를 좌편에 두고 새터, 함창군 은재 대령(大嶺)을 넘어 내은재리로 해서 선생주댁에 도달하여 해월신사주 전에 승안 배알 후 세찬 물종 몇 건과 돈 약 30꿰미를 바쳤다. 그 때에 곁에서 모신 이는 의암성사(義菴聖師), 구암장, 송암장, 응삼, 이용구, 김낙철, 이원팔, 조경중씨 등이었다. 그날 저녁에 선생주께옵서 예전에 태백산에서 공부하신 말씀, 살림하실 때에 떨어진 질옹박을 갖고 수년을 지냈으나 질겨서 안 깨지던 말씀, 인동의 절친한 친구의 계전 2냥을 얻어 쓰고 1년을 갚지 못하였더니 두 마지기 식경을 떼어가니 분노가 마음에서 나와 분하였으나 “공은 공이오 사는 사이니 부자 형제간이라도 셈을 단 한푼이라도 소상이 주고받아야 하느니라” 하셨다.

장석(丈席)에게서 선초(先初)의 강화(講話)를 받아 육임(六任)을 정한 후에 서장옥(徐長玉)이가 자승지벽(自勝之僻)이 있는 고로, 많은 육임이 있을 시에 장옥에게 선생의 도를 위하여 잘 받들라 하였다. 신사주께옵서 의관도복하고 친히 재배(再拜)한 말씀을 하시고, “우리 도에서 사람의 마음을 제일 열복시키는 것이 주재(主宰)라” 하셨다. 그 자리에서 의암성사주(義菴聖師主)께서 말씀하시되, “일전에 서장옥이 선생주께 서신이 있다고 하였는데, 선생주 분부에 나는 볼 것이 없으니 너희들이 뜯어 보아라 하시기에 뜯어본즉 다른 말은 고사하고 “불상지견성(佛狀之見聖)이라 했으니, 불도를 숭상하라 하면서 다라니 주문 나무아미타불을 써서 넣었으며 불연(不然) 즉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다.” 하셨다. 구암장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원래 주의가 다른 바라 부족한 말을 어찌 참견하리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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