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1897) 1월 3일에 상암장과 함께 출발하여 함창군(咸昌郡) 내은재 선생주댁에 도착하여 해월신사(海月神師)를 뵙고 인사를 드리는데, 선생님께서 “너는 마땅히 먼저 와야 했다” 하시고 방금 이삿짐 옮기는 일을 하고 속히 돌아오고자 하기로 너의 집도 이쯤에서 어느 곳이라도 이사하라 하시고 장석(丈席) 경시문(敬示文)을 주시며, 몇 마디의 말로 대강 분부하시었다. 다음날 아침 갈목리로 돌아갔다. 같은 달 16일에 해월신사 선생님댁은 음죽면(陰竹郡) 앵산동(鶯山洞) 충의포(忠義包)로 이사하여 안접(安接)하셨다.
16일에 본인이 장석(丈席) 경훈(敬訓)과 경고문을 봉승하고 출발하여 각처 관내에 장석경훈과 경고문을 반포하고 상암장댁 이사하실 의무를 조처하기로 약속하고 길을 떠나 문장준과 동행하여 2월 5일에 천안 대계 강연홍씨댁에 당도하여 하룻밤을 자고 강연홍씨와 길을 떠나 8일에 보은 갈목리 상암 어르신댁에 도착하여 2일을 머물면서 이삿짐을 꾸렸다.
2일 11일에 상암의 큰형과 동생분, 한윤화씨는 그 집에 계시게 하고 상암장의 식솔만 길을 떠날 때 강연홍, 본인, 한윤화씨, 문장준, 고창억 5~6인이 출발하여 보은 새터로 늘근이 시강터로 그 고개를 올라서서 날씨를 살펴보니, 흰 무지개가 6~7겹을 에워 해를 꿰뚫고 지나감이 오전에 시작하여 이른 저녁때까지 있었다. 청주(淸州) 청천(淸川), 칠보 고개를 넘어 청안으로 해서 음성의 단골 주점에서 머무르고, 다음날 남면 감우재를 넘어 무기 장터, 충주 관말로 하여 충주 외서촌(外西村) 솔박리에 당도하여 상암댁의 이사를 끝마쳤다.
상암장께서 다음날에 출발하여 20리 떨어진 앵산동(鶯山洞)에 도착하여 해월신사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니 이사할 때에 아무 일 없이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상암도 아무 사고 없이 이사를 했다는 말을 자세히 전하여 말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물론 매사가 처변이 어려우며 각처의 두령이라도 주접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너의 집에 먼저 도착하게 하여 2~3인씩만 안내하라”는 분부를 받들고서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팔도 두목으로 선생님을 뵙고자 오고가는 일이 있는 교인들은 이 솔박이 박상암댁에서 머무르게 하고 기회를 보아 여쭈어 본 후에 오고가도록 조처하였다.
3월부터 시작하여 교첩(敎牒)을 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홍주 김낙철(金哲洙)씨의 큰아들 동식(東植)씨를 서기(書記)로 김일택(金一澤), 고창억(高昌億) 두 사람은 고용(雇傭)으로 삼고 함께 살았다. 이때에 전라도(全羅道) 김낙철, 김경제, 주문상, 허진(許鎭), 임윤상 제씨(諸氏)가 와서 교첩을 각 수천 매씩 글씨를 쓰는데 혹 3~4일, 혹 4~5일씩 머물면서 장석의 답도 이후 떠나갔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수많은 두목이 혹 5~6인, 혹 3~4일씩 와서 머물고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이후 떠나갔다.
1897년 3월 15일은 구암장의 혼례일(婚禮日)이다. 선생님께서 결혼식 10일 전에 기약하여 혼함(婚函)을 서산군(瑞山郡) 갈치리(葛峙里) 김종희(金鍾喜)씨 집안으로 본인에게 명하시어 먼저 보내시기에 본인이 명령을 듣고 길을 떠나 10일에 서산 갈치리 김종희씨댁에 입납(入納)하였다.
3월 23일의 예포(禮包) 충남도의 도 각처로 포중(包中) 규모(規模)를 다시 세워 정하여 수모 두령에게 6개의 직임을 나누어 정하고 교첩을 각 관내로 다수 내보냈다. 그 때에 본인이 해미, 서산, 태안, 안흥(安興), 대산(大山) 다섯 읍(邑)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며, 본인의 둘째형 석훈(錫勳)씨는 동해(東海) 본포교장(本包敎長)으로 해미, 서산, 태안의 모든 기관을 주관하였다. 동해(東海) 접주 이용신(李容信)씨, 관송포(貫松包) 접주 문장로(文章魯)씨, 굴향 이원면(梨園面) 접주 문장준(文章峻)씨, 대산(大山) 접주 이원영(李元榮)씨, 서산(瑞山) 접주 이계화(李桂化)씨, 궁사(弓射) 접주 문동하(文東夏)씨, 서면(西面) 접주 변봉호(邊鳳浩)씨, 북포(北包) 접주 이광우(李廣宇)씨, 예산(禮山) 접주 곽기풍(郭基豊)씨 이와 같은 여러분이 비밀리에 서로 만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잠된 기운을 인도하였다. 4월 22일에 상암 어르신의 둘째 아들 정규(廷奎)가 탄생하였다.
4월 5일에 해월신사선생께서 아무개 두령으로 천일(天日) 기념식을 베풀게 하시며 말씀하시길, “제수(祭需)를 나를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은가? 벽(壁)을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은가? 내가 천리(天理)를 보니 나를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다. 지금으로부터 나는 비록 조상의 기제(忌祭)라도 나를 향하여 베풀 것이다. 천사(天師)와 조상, 부모는 가까이에 있고, 멀리에 있지 않다.”라고 하시었고 “천리와 성령도 생각이 가까우면 나에게 있고, 생각이 멀면 구만 리 멀리 높은 하늘 밖에 있는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신중하고 신중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로부터 나를 향하여 베푸는 법[향아설위법]이 시작되었다.
1897년 6월 20일에 서산군 마산면 송정리(松亭里) 본인 큰집에 들어가 부친을 뵈옵고 다음날에 태안군 북면 동해리 큰조카 관승의 집으로 갔다. 1894년부터 가산을 탕진한 이래로 본인의 처자를 큰조카 관승에게 맡기고 부탁하여 머무르게 할 때이다. 같은 달 19일에 본인의 둘째 딸 계승(桂承)이 태어났다.
7월 8일에 김창희씨와 같이 길을 떠나 11일에 충주 외서촌 솔박리 상암댁에 도착하였다. 7월 21일에 본인이 정양진, 김용세(金容世)와 같이 구암장댁 말을 끌고 온양 바느실 송배헌(宋培憲)의 집으로 가다가, 천안 월말 앞 도랑 홍수(洪水)에 말이 빠져 수십 보 떠내려가 천신만고 끝에 말을 끌어내어 놓고 말에 실은 짐을 끌러 보니 짐 속 물건은 기름종이로 싼 고로 크게 손실이 없었다. 온양 쑥 고개를 넘어 오목내에 당도하니 홍수가 크게 일어 강을 건널 방법이 없는 고로 김용세씨가 물을 헤엄쳐 하나씩 붙들고 헤엄쳐서 말까지 건너 온양 바느실 송배헌씨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 때는 송배헌, 김기태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을 때이다. 윗분들부터 문안을 드리고 이야기를 나눈 후에 박상암장이 지휘하신 바 구암장께서 모일에 재행길을 내려올 때에 들어오실 거라는 말씀과 구암장께서 소실을 두어야 살림을 하겠으니 그 일도 주선하고 모든 일을 준비하란 말씀을 전하였다.
수일 후 구암과 상암 두 어르신이 함께 온양 바느실에 도착하시기에 구암장께서 예산 김동연의 모친(母親)을 소실로 취하고 회초(晦初)에 집안 식솔들을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본인은 올해 봄부터 시작하여 도습증(道濕症)으로 몸이 편하지 못하여 솔박리에 머물면서 어르신들과의 통신과 관할 구역 내의 일이 잘 되도록 힘을 쓰고 처리하였다.
7월 23일에 본인이 경고문(敬告文)을 받들어 가지고 태안 관내에 널리 퍼뜨렸다. 오는 8월 일은 해월선생 사모님의 산달인 고로 산모가 먹을 미역 1수(手), 절찬(節饌), 홍합혜(紅蛤醯), 건포(乾脯) 등의 물건을 조의숙, 정양진 두 사람과 함께 지니고 8월 11일에 솔박리 상암댁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에 상암 어르신과 본인이 해월신사 선생님댁에 들어가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미역 1수(手)와 홍합과 절찬(節饌), 그리고 돈 50냥을 드리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되, “6~7월 전부터 아픈 곳이 있어 음식을 먹는 것이 불편하고 간혹 하혈(下血)의 낌새가 있었다”고 하시었다. 그날로 물러감을 말씀 드리고 솔박리로 왔다. 18일에 이계화(李桂化), 유양후 두 사람이 들어와서 모든 일을 본인과 며칠 동안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9월 10일에 해월신사 선생님댁은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전거런리(全乞焉里)로 살림을 이전하여 자리를 잡았다. 구암장댁도 그 이웃에 집을 정하고 무사히 이사를 마치셨다. 김낙철(金洛喆)씨는 유학(儒學) 훈장(訓丈)이라고 거짓으로 일컬으며 머물렀다.
1897년 9월 22일 박상암댁은 식솔들과 함께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다부리(多富里)로 이사할 때 본인과 곽기동(郭基東), 이계화, 김일택(金一澤), 김동식(金東植) 제씨(諸氏)도 함께 출발하여 다부리 새로 정한 집터로 23일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10월 16일에 문장준(文章峻), 변필삼(邊弼三), 문장희(文章喜) 세 사람이 홍합혜(紅蛤醯) 10여 기(器)와 생복(生鰒) 100여 수(首)며 생낙지 10여 개와 생굴 7~8기(器)와 건어포(乾魚脯) 3~4종류를 접중에서 구해와 다부리 상암댁에 가지고 왔다. 18일에 본인으로 하여금 생복 50수와 생낙지 5개와 생석화 3기만 우선 선생님댁에 들여보내고자 하기에 본인이 짊어지고 출발하여 50리 떨어진 원주 전걸언리에 도착하여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에 돈 50냥과 생물(生物) 여러 종류를 드리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몹시 추운 겨울에 어찌 이러한 것을 구하였느냐”고 하시었다. 다음날에 즉시 물러나와 다부리로 갔다.
같은 달 27일에 상암장과 본인이 함께 출발하여 전걸언이에 도착하여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돈 30냥과 제사에 쓰일 물품인 생물(生物)과 건포물 몇몇 종류와 홍합혜 4~5그릇을 하나하나 드렸다. 그 저녁에 닭이 운 후 제사를 받들어 행하고 음복한 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고기 종류는 기운(氣運)에 크게 이롭지 못하고, 물고기 종류는 다만 먹는 맛이 입이 즐거울 따름이다.” 하시고, “물론 어떤 음식이든 입맛에 맞아야 원기(元氣)에 보호가 된다. 어떠한 물종이든지 몸에 이롭고 해가 됨을 논하지 말 것이다.” 하시었다. 선생님께서 3~4달 병환으로 입맛을 잃으셔서 원기를 크게 잃으셨다. 그래서 피마자 잎을 구하여 그 채소로 입맛을 계속 이어나가게 하시고 그 때에도 제사 자리를 배치하는 것을 나를 향하게 하는 이체(理體)를 말씀하셨다. 아침을 먹은 후 인사를 드리고 다부리 집으로 물러나왔는데 집에서도 제사를 올리고 제사 음식을 음복하였다.
11월 3일에 반찬거리 몇 종류를 바치러 가는 길에 본인으로 4~5일씩 서로 교대하였고, 좌우간 모든 일을 본인으로 오고 가며 연락케 하였다. 해미, 서산, 태안 관내 각처로 신선한 생어(生魚), 생복을 구하지 못하여 온 것을 통지하였다. 같은 달 11일 포(包) 중에서 생복과 생굴과 생낙지를 구해왔기에 다음날 상암장과 본인이 함께 가서 전걸언리에 도착하여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생복과 여러 가지 물건을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본인에게 생복을 요리하라 하시어 몇 개를 요리하여 내오니 달게 드시었다. 그 때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되, “노인의 밥상도 밥그릇을 만족하지 않게 함은 옳지 않다.”라 하시며, “굴죽이 참 맛이 좋구나” 하시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 그 분수가 모두 있다. 유생(儒生)과 농민(農民)의 의복과 음식에 등급이 이에 모두 다르니라. 선비는 포목(布木)이라도 8~9승(升)의 가는 베를 입고 음식 그릇은 조금 적게 조처하는 것이 분수요, 농민으로 일꾼은 옷도 5~6승의 베를 입고, 음식 그릇도 조금 높고 크게 하는 것이 각기 직분이니 매사를 분수대로 다른 사람과 사귀거니와 분수를 잘 지킬지어다. 사람마다 자기 분수에 지나치면 역시 그 명(命)을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었다.
그 때에 전라도 접중(接中)에 규모(規模)를 말씀하실 적에 상암이 알리기를 기왕에 의암성사(義菴聖師)께서 저를 보면서 여차여차하다 말하기에 그리 알았다고 하온대,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며 말하기를, “도(道)가 선생의 도이지 아무개 아무개 저들의 도라더냐? 내가 가르쳐 주지 아니하여도 될까?” 하시며 걱정하셨다. 선생께서 올 봄부터 시작하여 교첩을 다시 세우시되 날짜를 완전히 정하기를 3월 이후 8월까지는 ‘3월’이라 하고 9월 이후 2월 까지는 ‘9월’이라 하여 봄과 가을의 시기를 나누어 풀이하셨다.
선생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두목(頭目)이라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아느냐? 두목은 그 포중(包中) 심부름꾼이다. 만일 너희 두목이 한가하고 나태하면 아무 일도 못하느니라. 어떤 향례(享禮) 시와 절사(節祀) 시에 수백 사람이 아침 저녁을 일체로 먹게 할 때에 두목이 어디 앉아 한가히 나태하면 그 수많은 사람을 누가 분별하여 먹게 하며, 몇몇 층으로 먹을 때에 내게 당하면 어느 겨를에 몇 숟가락에 얼풋이 선듯 먹고 나서야 차차 그 그릇 범절을 이용하여야 차례를 잃지 아니하며, 혹 난리를 당하여 수백만의 진영 가운데에서 그 영(令)을 내리고 통솔하는 사람이 처리하는 수단이 명백하여야 그 수만 군병(軍兵)이 한 사람도 어느 때까지를 기약함이 없이 모두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었다.
12월 24일에 해월신사 선생께서 의암성사 선생께 대도승통(大道承通)을 전하여 줄 때는 마침 구암이 강원도 접중에 잠시 나가있을 때이다. 선생님께서 분부하기를, “구암이 본래 우매한 사람이나 너는 침착하여 성질이 너그러운 대장부이다. 항상 용서하여 나의 선생의 본뜻을 말하고 모든 일을 너희 두 사람이 서로 의논하여 온 세상에 덕을 베풀어 세상 사람들을 널리 구제하라.” 하시고 누누이 당부하셨다고 하였다.
12월 28일에 상암 어르신이 원주 전걸언리에 들어와서 선생주를 찾아뵈어 인사를 드리고 옆에서 모시고 새해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