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1898) 1월 2일에 선생주께서 상암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돈이 없으니 혹 너희들은 얼마나 재산이 있느냐” 하시니 엎드려 말하기를, “금전(金錢) 백(百)이나 맡아 두고 있음은 어느 때이든지 선생님께서 쓸 곳이 있다는 지시를 몹시 기다렸습니다.”라고 말을 여쭈니, 분부하시기를, “그러한즉 너는 집을 나가 50금(金)만 빠른 시일 안에 올려 보내라.” 하시기에 답하여 말하기를, “내일 조석헌이가 올려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물러나왔다. 본인은 상암댁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1898년 1월 3일에 본인이 어르신 집으로 출발할 때에 돌아다니는 말을 들으니 지난 1일에 죽산군(竹山郡) 병정(兵丁)이 이천군(利川郡) 병정과 합세하여 죽산 보야평(普野坪) 권성좌(權聖佐) 집에 들이닥쳐 성좌를 잡아가지고 즉시 앵산동으로 가서 신정희(申正羲)씨를 또 붙잡아 아울러 이천군에 들여보냈다 하였다. 교인(敎人) 몇 사람이 붙잡힌 소식도 통지하고 봉상(捧上)할 물건을 바치기로 하여 곧바로 이른 새벽에 본인이 은화 5~6금을 가지고 길을 떠나 순식간에 50리 되는 전걸언리를 오전 사시(巳時) 초에 당도하였다. 선생주전에 승안 배알 하는데, “어제 박모(朴某)가 출발할 때에 병정 등을 만나지 않았다더냐?”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박모가 출발한 이후에 권성좌가 병정 10여 명을 이끌고 즉시 구암장의 집으로 들어와 집안 사람에게 묻되, “구암이 어느 곳으로 나갔느냐?” 하니 답하여, “출타하였으나 나간 곳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전라도 김낙철(金洛喆)씨가 손님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의암성주와 구암장, 응삼(應三), 신현경(申賢景), 염창순(廉昌淳), 이용식(李容熄) 여러 사람과 선생주댁에 있었는데 권성좌와 병정 10여 명이 선생댁에 뒤를 쫒아 올라왔는데 선생주께서는 병석(病席) 중이었다. 의암성사와 구암장이 병정과 서로 이름을 말한 후에 처신하기를 주인장의 집안 조카, 누이의 아들이라 하온데 성좌도 본래 동학교인지라 가식(假飾)으로 초면 인사를 행한 후에 구암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선생주댁으로 돌아왔다.
병정 등이 안방으로 들어와 수색하면서 저들의 무리가 말하기를, “병중에 있는 노인과 부인(夫人)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하며 문서를 일일이 수색할 때에 선생님께서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시고 정심정기(正心正氣)로 천사성령(天師聖靈) 전(前)에 무위이화(無爲而化)를 마음으로 기도하시며 앉아서 일을 기다리시매 저 무리의 병정 등이 그 허다한 문벌(文閥)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겹쳐두고 낱낱히 수색한 후, 구암장댁으로 내려가 역시 수색하고 끝내는 병정의 무리가 김낙철씨를 해월선생님으로 잘못 알고 이천군으로 잡아가고 서울로 올려 보낸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본인이 자세히 들은 후, “황송한 말씀을 다 드리지 못하겠습니다.”라 말씀드리고, “선생님의 소자(小子) 천주(芊主) 박모(朴某)가 바칠 물건이 없나이다”라고 말씀드리고 금 50꿰미를 바쳤다.
선생주께서 그 때에 의암성사와 구암장과 여러 사람들에게 대하여 훈계의 말씀을 하시길, “너희들은 물론 어떤 일에 가담할 때나, 어떤 일을 언제 하던지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이치를 깊이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되, 이때의 일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지니라. 세상만사가 사람의 힘으로 못할 일은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무위이화로 감화(感化)하는 이치가 계신 바니라. 부디 이때에 이일을 명심하고 잊지 말지니라.”라고 여러 차례 당부하시었다. 같은 달 4일 이른 새벽이 밝기 전에 해월신사께서 화(禍)를 피하시려 의암, 구암 두 어르신이 모시고 출발하셨다고 한다.
무술년(1898) 1월 15일에 상암과 본인이 함께 선생님의 안부를 살피기 위하여 출발할 때에 바칠 물건인 말린 생선 몇 가지 종류와 생선알 4~5포(脯)는 삶아 익혀가지고, 남초(南草) 2파(把)와 금화(金貨)를 잘 싸서 몇 달 며칠이라도 선생님을 뵈은 후 바치기로 생각을 정하고 향하는 곳이 어느 곳인지 모르되 단 천사성령(天師聖靈)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길을 떠나 여주(驪州) 억억교(億億橋), 양화진(陽和津), 곡수장대(曲水場垈), 지평군(砥平郡), 용두리(龍頭里) 장대(場垈), 신대치(新垈峙)로 해서 강원도 홍천군 남면 향화대(香花垈) 이참봉(李參奉)의 집에서 하룻밤 머무르고 다음날에 출발하여 난미봉(卵美峯)으로 안흥치(安興峙)를 넘어 사물아치 오순지(吳順池)씨 집에서 머무르며 선생님의 안후가 어떠하신지 물어보았으나 끝내 알아낸 것이 없었다. 본인이 주인께 대하여 말하기를 다음날 식전 밝기 전에 출발하겠다고 이야기하고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 날은 즉 1898년 1월 18일이다.
이른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하고자 하는데, 주인이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먹던 칡뿌리떡이 남았다며 상을 들여오기로 음식을 조금 먹고 즉시 출발하여 오채운(吳彩云)의 집, 사물아치 주점으로 해서 후령(后嶺) 방아재를 올라 갈 때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하얀 눈이 분분이 내리더라. 지체 없이 봉우리를 올라서 내려가니 하얀 눈이 맑게 개이며 해가 동쪽 산에서 나오더라.
방아재리 용여수(龍汝洙)씨의 집안은 본래 참된 교인(敎人)이다. 그 사람의 집에 도착하니 어제 저녁 머무르던 곳에서 불과 10리였다. 주인(主人) 용씨(龍氏)를 방문하며 객실방문을 열고자 할 즈음에 상암장의 음성을 듣고 안방으로부터 의암성주와 구암장과 이용식(李容熄), 염창순(廉昌淳), 이자성(李自星) 여러 사람이 좌우로 와서 맞아 들어가 본즉 해월신사선생님께서 계신지라 즉시 들어가 뵙고 인사를 드린 후에 객지에 있는 동안 건강하고 평안하셨는지를 여쭙고 행장(行裝)에 봉하여 온 각종 건어물과 생선알이며 담배와 은화(銀貨) 50꿰미를 바쳤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이와같이 서로 만난 것은 천리(天理)가 감화(感化)된 것이며, 자연의 이치이다.”라 하시고 칭찬하시니 그 때 의암성사께서 말하기를, “느릅정이 최우범(崔禹範)씨가 여행 경비를 구해 주어 연 3~4일을 객지에서 묵으며 두루 찾아서 구하여도 그 사람이 근근이 13꿰미를 구하였을 뿐이다”라 하였다.
밤이 지나 닭이 운 후 아침을 시키어 잡수시고 이른 새벽에 선생님께서 장보교를 타시고 짐군은 짐을 지고 문밖을 나갈 적에 갑자기 천지가 아득하며, 흰눈이 흩날리며 바람이 크게 일어 선생께서 말씀하시되, “아서라. 날씨가 좋지 않은데 출발하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라고 하시기에 아주 정지하고 있는 중이라 하시었다. 구암장이 또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정하신 녹(祿)이시며, 정하신 인연은 그 명(命)이 되는 고로 천리(天理)가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자연의 이치를 베푸셔서 서로 만나게 하신 바라. 두고 보아도 오늘 다시는 눈이 오고 비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라 하셨다. 선생님께서 상암장과 본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시기에 답하여 말하기를, “소자 등은 돌아가겠습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리하여라. 소식은 자연 아는 도리가 있을 테니 그리하라.” 하시고 즉시 그 때로 장보교를 타시고 모두 길을 떠나셨다.
상암장과 본인이 그 주인 여수씨와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하룻밤을 머무른 다음날 출발하야 방아재 봉우리에 올라 상암 어르신이 본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번에 이와 같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자연지리(自然之理)를 보고 전수받았으니 홀로 있으면서도 삼가하고, 마음속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몇일만에 다부리 상암장댁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이후로 상암도 이사를 위해 집을 널리 알아 보았다.
1월 회일(晦日)에 선생님댁을 원주군(原州郡) 고산(高山) 광격면(廣格面) 송곡리(松谷里)로 정하였다. 방아재리에서 행차하신 후 속히 집터를 새로 정하고 이사하여 안접하니 그곳 주인은 진진여(陳眞汝)씨였다.
무술년 2월 4일에 임학선(林鶴仙)씨를 만나보고 이사하는 일을 상의하였더니 그 후에 원주군 서면(西面) 옥직리(玉稷里)에 상암장의 집과 구암장이 살 집 두 곳을 새로 정하여 같은 곳에 정하되 주관하는 사람으로는 임명화(林明化), 임석화(林石化) 두 사람이 되고 그때에 성(姓)을 거짓으로 칭하기를 구암장과 상암장이 평택(平澤) 임씨(林氏)로 처신하였다.
2월 회일에 여주 다부리에서 상암댁 이삿짐을 배편으로 운반하여 김동식(金東植)씨께 위임시켰더니 3월 3일에 원주 문막 포구에 도착하여 옥직리의 새로 정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안접하였다.
3월 8일의 본인이 대신주기도(大神主忌禱) 기도 제사에 쓰일 물건을 비밀리에 고산 광적 송골리에서 20리 떨어진 선생님댁에 도착하여 해월선생주를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제사에 쓰일 각종 물품을 바치고 즉시 물러남을 말씀드리고 옥직리 상암댁으로 왔다. 상암장께서 본인에게 말하기를, “금번에 관내에 들어가서 각처 규모 통신을 지휘하라” 하고 오는 천일(天日) 기념일에 속히 도착하기를 서로 이야기하였다. 3월 13일에 경고문을 받들어 가지고 본인이 출발하여 5일만에 해미, 서산, 태안 포중(包中)에 들어가 각처 두령을 만난 후에 경고문을 각처에 일일이 반포하게 하고 규모와 통신(通信) 지휘를 정하고, 주관하는 바의 일들을 바삐 깊이 살펴보았다. 관내 문장준(文章峻), 김용세(金容世), 조의숙(曺義淑) 여러 사람과 함께 출발 할 때에 제사에 쓰이는 물품과 각종 반찬거리, 건어(乾魚), 각종 포물, 은화(銀貨) 등을 봉해 지니고 4월 2일에 원주 옥직리 상암댁에 가서 접중(接中) 일의 형편을 자세히 묻고 답하였다.
4월 3일에 제사에 쓰일 각종 물품과 은화 50꿰미를 봉하여 본인에게 대신 보내기에 즉시 길을 떠나 고산 광격 송골리에 당도하여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제사에 쓰일 물품과 은화를 바치고 즉시 물러남을 고하고 옥직리로 갔다. 다음 날 식전에 전라도 흥양군 김은두와 영광군(靈光郡) 곽기룡 두 사람이 와서 도착하였기에 밥을 먹은 후에 본인이 선생님댁에 도착하여 해월신사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후에 구암장께 말씀하시되, “오늘 식전에 전라도 흥양군 김은두와 영광군 곽기룡 두 사람이 올라 왔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하니 선생주께서 구암에게 속히 내려가라 하셨다. 금번 제사는 일반(一般) 현사(賢士)가 모두 각자 자기 집에서 특별히 극진히 올리되 성경이 관련케 하라 하시며 모두 집에 돌아가게 하시고 선생님께서 홀로 앉으셨으니 어떤 대사(大事)에 거대(巨大)한 경륜(經綸)이 특별이 있으신 듯하였다.
이보다 앞서, 2월 초에 옥천군(沃川郡) 송겸수(宋兼秀)씨가 이웃 마을 박(朴)가라 하는 사람이 통사정을 하기에 교인으로 받아들였더니 그 사람은 이때에 세찰사 송경인(宋敬仁)의 문객(門客)으로 송겸수에게 친근히 믿고 따르는 체 하며 선생님을 뵙고자 여러 번 간청하였으나 겸수도 어르신이 살고 계신 집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가까운 이웃 동네의 박윤경(朴允景)씨는 본래 구암댁에 여러 차례 왕래하였음으로 윤경씨가 며칠 후면 자기 본가에 반드시 올 테니 그 사람과 함께 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게 하자고 미루어 부탁하였다.
그럭저럭 3월 말쯤에 박윤경씨가 자기 집에 내려왔다. 그 때에 박가가 소위 세찰사 송경인에게 함께 붙어서 옥천군 병정과 보은군 병정을 합세하고 송겸수와 박윤경을 붙잡아다가 삼방장(三方杖)으로 수없이 구타하며 선생님댁을 바로 대라하니 박윤경이가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리어 다니면서 선생주께서 머무르셨던 곳으로만 옮겨다니며 왔다갔다 한즉, 저 무리들이 크게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찌 빈말로써 유인하느냐”며 수없이 마구 때리니 형벌을 당하면서 4월 3일까지 여주군에 당도하였더라.
이 군에 살고 있는 임당장(林當掌)의 큰아들 정국(正國)이가 선생님댁에 자주 왕래한다는 말을 듣고 4일에 세찰사 송경인이 병정을 시켜 박윤경을 잡아 앞세우고 원주 전걸언리 임정국의 집에 당도하니, 그 사람은 그 때에 어르신댁에 들어가 있던 때이었다. 그 마을에 안가(安哥)라 하는 자는 임종국의 매부(妹夫)인대 이름만 걸어놓은 교인이라.
5일 날이 밝기 전에 저 병정 등이 안가를 잡아 앞세우고 해월신사댁으로 향하였다. 이날 5일은 천일기념(天日紀念) 제사가 있는 날인데 제사를 거행하는 곳에도 일반 두목(頭目)이며 심지어 의암장, 구암까지도 없이 다 치우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올리고 무사히 지나간 후 신현경(申賢景)과 임정국(林正國)이도 모두 길을 떠나가고 선생님께서 홀로 계신 때였다. 세찰사와 병정들이 안가(安哥)에게 가는 길 중에 임정국을 만나 붙잡아 앞세우고 선생님댁에 도착하였으니 5일 오시(午時)이다. 해월신사께서 체포가 되셔서 즉시 본군(本郡) 문막(文幕) 포구(浦口)에서 배를 타시고 여주군에 당도하셔서 하룻밤을 머무르시고 다음날에 즉시 서울로 올라가셨다.
초 5일 유시(酉時)쯤에 옥직리(玉稷里)에서는 선생님께서 체포되셨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하여 어찌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구암과 상암 두 어르신이 즉시 길을 떠날 때에 상암어르신이 본인에게 일을 위임하며 말하기를, “이번 일을 당하여 일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내 집의 모든 일을 어떠하다 못할 테니 나의 마음 내키는 대로 조치하라.”고 본인에게 위탁하고 김용세(金容世)로 여행 봇짐을 꾸리게 하고 출발하여 여주 등지로 향하였다.
본인은 그 때에 설사로 몸 상태가 편안하지 못할 때이다. 구암장은 곧 그날 밤에 집을 옮겨 이사하였고, 본인은 기운이 쇠진한 가운데 김동직, 김일택(金一澤), 고두현(高斗鉉) 세 사람과 서로 의논하여 상암댁의 이사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대책이 없으니 향할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다음날 저녁에 살림의 규모가 큰 것만 임석화씨 집에 맡기고 식경과 축농이며 이부자리를 세 사람이 짊어지고 4월 7일 새벽에 천사성령(天師性靈) 전에 우러러 마음 속 깊이 기도하고, 김동식씨는 아기 정규(廷奎)를 업고 상암 부인을 모시고 문규(汶奎)를 앞세우고 옥직리로 출발하여 구미리(九尾里) 앞, 다래촌을 지나 작두골, 좁은목이, 문막을 지나 노습으로 해서 흥원창 나루를 건너 여주 안평 주점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8일에 출발하여 천안으로 음죽으로 산종티봉 주점에서 머무르고 9일에 길을 떠났는데 앞으로 가야할 길이 20리라 목적지까지는 해가 저문 후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되어 5리쯤 고작골 앞 서편 강변 솔밭에다 솥을 걸고 점심을 지어먹고 이리저리 전진하여 충주 외서촌 솔박리 최종후(崔鍾厚)씨의 집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여 최종후씨의 어머니를 뵙고 그간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한 후 며칠을 머물렀다. 그 때에 본인이 이용구(李容九)씨를 만나 이번 선생님께서 붙잡히심을 일일이 설명하고 서로 한없이 괴로워하고 탄식함을 그치지 못하다가 작별하였다.
같은 달 12일에 본인이 이천군(利川郡) 궁촌(宮村) 장대리(場垈里) 하덕신(河德信)의 집에 상암장이 머무르신다는 말을 듣고, 일찍 출발하여 9리 떨어진 하덕신의 집에 오전 9시쯤에 도착하여 상암장을 만났다. 그간 가산(家産)을 조처한 일과 솔박리 최종후씨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상세하게 말하고 상의하되, 이번 일에 대해 무슨 뾰족한 수가 없어 상암장이 편지 여러 장을 써서 김용세(金容世)를 주어 충남 공주군 사곡면 노인당리(老人堂里) 한응고(韓應鼓)씨와 각처 두령에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전후 형편과 좌우 처신을 일일이 통지하고 가족이 오가는 길의 중간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말까지 써서 오후에 발송하였다.
다음날에 본인은 솔박리 최종후씨의 집에 가서 김동식씨에게 김용세가 출발한 말을 전하고 공주, 천안 등지로 상암댁 이사하는 일에 가 보라고 김동식씨에게 맡기고 본인은 즉시 상암장이 머무르는 곳에 당도하여 상암장과 상의하며 서울을 왕래하며 연락을 전할 사람을 찾아 구하였다. 묻고 찾아보니 박윤경(朴允景)씨가 여주군 등지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본인이 즉시 윤경씨에게 와달라고 청하였는데 윤경이 말하기를, “그러하나 여행 경비가 한 푼도 없을 뿐 아니라 의견모(義見謀)가 없는 고로 현재로서는 서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암장이 답하여 말하기를, “여행 경비와 전후의 일을 대강 조처하게 할 테니 즉시 서울로 올라가라.”하고 여러 말 할 것 없이 요점만 말하건대, 관아의 사람들과 밥을 대주는 사람과 친해져서 선생님께 바칠 계책을 자세히 말한 후에 금화 95꿰미를 구하고 마련하여 하덕신의 집에서 윤경씨를 서울로 올려보냈다. 이 날은 4월 15일이다.
상암장의 이사는 솔박리 최씨의 집에서 14일에 모두 출발하여 며칠만에 천안군 율목동(栗木洞) 송배헌(宋培憲)씨의 집에 도착하여 며칠을 머무르고 길을 떠나 공주 사곡면 노인당리 한응고씨의 집에 4월 19일에 당도하였다. 본인과 상암장이 이천(利川) 등지에서 지체하다가 22일에 상암장과 본인이 출발하여 각 교인의 집을 방문하여 찾아보고 전진하여 5월 2일에 공주군 노인당리 한응고씨의 집에 당도하여 상암장의 식솔은 한응고씨 협실에 머무르게 하였다.
상암장이 관내에 통신하기 위하여 경고문을 지었다. 같은 달 7일에 본인이 경고문을 받들어 가지고 해미, 서산, 태안 각처 관내에 들어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경고문을 반포하며 지목을 단속하고 서울 일의 형세에 대하여 서로 의논 하고 수모 몇 사람이 성의로 돈을 낸 것이 있으므로 각 포(包)를 대강 지휘하였다.
5월 29일 공주 노인당리에 당도하여 상암어르신께 무사히 갔다 왔음을 일일이 말씀 드린 후에 본인의 노친께서 병환이 아주 깊어 염려가 되니 생청(生淸) 1승(升)만 구하여 드시게 했으면 하는 말을 하니, 들으시고 상암장께서 편지를 쓰셔서 이왕에 부탁한 것이 있으니 본인을 그곳으로 보냈다.
본인이 서찰을 가지고 6월 2일에 길을 떠나 강원도 홍천군 남면 사물아치 오채운(吳彩云)씨의 집에 도착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를 머무르며 생청 3승 반을 단지에 넣어 단단히 매고 다음날 출발하여 13일에 공주 사곡면 노인당리 상암장 댁에 당도하였다. 무사히 갔다온 일을 이야기하다가 상암장께서 생청 1승을 단지에 넣어 주시기에 공손히 받아가지고 와 봇짐을 메고 길을 떠날 때에 말하기를, “이번 달 안으로 당도하라”고 하시기에 대답하고 6월 15일에 길을 떠나 16일에 서산군 마산면 송정리 둘째형 댁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큰 비가 종일 밤까지 그치지 않아서 2일을 지체하니 18일이다.
새벽 아침을 지어 먹을 즈음에 동시에 큰 비가 폭우로 1시간을 내리는 고로 아침 해가 뜬 후에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노루내천가에 당도한즉 냇물이 크게 범람하여 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리저리 전진하여 태안군 흥인리(興仁里) 앞 은진다리에 당도하니 홍수가 크게 일어 다리 위에로도 물이 지나가니 건너지 못하고 윗마을 앞으로 올라간 즉 흥인동으로 총각 아이가 나오며 말하길, “올라갈수록 냇물이 깊으니 이리로 시험해 보십시오.” 하기에 옷을 벗고 들어섰다. 목에 물이 닿기에 지팡이를 뻗으니 건너편 뚝에서 지팡이 끝을 붙잡을 수 있는 것 같아 그 아이더러 지팡이 끝을 붙잡아 당기어 달라하고 봇짐을 머리 위에 이고 들어가 입술에 물이 닿은 후 지팡이를 뻗친 즉 그 아이가 건너편 언덕에서 막대를 붙잡아 당기니 발이 땅에 닿지 아니하고 떠서 건너와 그 아이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오다가 연방죽 주점을 지나 풍천리(風川里) 앞 큰 내에 당도하였는데, 물이 바다와 같아 위아래를 살펴보고 주의해서 건너기 편하게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니 물길이 세서 천신만고 끝에 건너서 10리를 갔다.
태안(泰安) 북면(北面) 동해리 큰집에 당도하니 본인 부친의 병환이 아주 깊고 그 때에 본인의 장모도 오시어 서로 만나 인사를 드렸다. 그날부터 꿀물을 부친께 올리어 잡수시게 하고 이어 찾으시는 대로 응하며 병간호 한 지 10일 만인 6월 27일 인시(寅時)에 부친께서 별세하시니 망극한 마음 가누지 못하는 가운데 나이 37세에서야 부모가 중한 줄을 알고 보니, 이 몸 부모를 다시 모실 곳은 없고 원한(怨恨)이 통분(痛忿)하였다. 그럭저럭 3일 초종(初終) 그믐에 장사를 지냈다.
7월 2일이다. 본인이 문장준(文章峻)씨와 함께 출발하여 예산읍으로 삼바슬 고개, 공주 구재, 고비울 골통이로 해서 해가 진 후에 노인당리에 당도하니, 상암장께서 본인과 그믐 안으로 오고 가기로 말씀을 하셨으나 서울의 소식이 아예 없음으로 하루에도 수시로 마음에 급함이 발생하여 일각이 삼추(三秋)와 같이 지내다가, 21일에 김용세가 도착하니 본인의 형편을 쉽게 아시고 병환을 매우 염려하셔서 만약 지체가 되거든 혼자 가더라도 먼 길을 떠난다는 서찰을 써서 맡겨 두고 22일에 김용세를 이끌고 상암장이 서울로 올라 가셨다.
김기태씨는 강원도로 길을 떠났으며 6월 2일에 해월신사주께서 서울의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신 소식을 듣고서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7월 4일에 문장준씨는 즉시 돌려보내고 본인은 상암의 서신 가운데, “강원도로 가라” 말씀하셨기에 즉시 출발하여 천안 밤나무골 송배헌씨의 집에 도착하였으나 송배헌씨를 보지 못하고 안수정리 김기태씨의 집에 도착함에 김기태씨도 만나지 못하여 천안, 안성, 죽산, 이천 파발막, 여주 양화강을 건너 곰수 장터, 지평읍을 지나 용머리 장터, 홍천 안흥 고개, 사물아치, 방아재를 넘어 방아재 용여수씨댁, 홍천 지루 고개, 신내, 말꼬, 철장이, 전감으로 하여 건이 고개를 넘어 인제 늘읍정이 최우범씨를 찾아들어가 최우범씨를 만나 이야기한 후에 씨의 큰형 영선씨댁에 머무르니 다음날은 곧 7월 14일이라.
최우범씨와 동행하여 산등성이 길 수십 리를 올라가 옥터골 오접장의 집에 도착하니 옥수수를 삶아 내어서 점심을 달게 먹고 출발하여 행병골, 수레넘이, 백자동으로 기린 문안 김윤삼씨댁에 당도하니 상암장과 김기태씨와 김용세씨가 도착하여 모여 앉아 서로 만나 이야기 하며 서울의 일을 들으니 섭섭하고 서글픈 마음이 났다. 주인댁에서 옥수수를 내어 저녁을 맛있게 먹고 허선씨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옥수수를 삶아 내었기에 아침을 먹고 여러분과 작별하였다. 네 사람이 함께 홍천 강가로 동창지(東창池)씨의 집으로 군업, 삼포, 지루 고개, 자압리로 해서 방아재 용여수씨댁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날에 김용세는 예산으로 즉시 보내고 세 사람이 함께 길을 떠나 횡성군 창봉, 원주군, 충주군 목계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고 다음날에 목계 나루를 건너 괴산군으로 해서 보은군 갈목리 상암의 큰형인 강암댁에 도달하여 며칠간 머무른 후에 같은 달 20일에 길을 떠나 청주군으로 반송 주점에서 하루밤을 머물렀다. 7월 21일에 길을 떠나 탑수 나루를 건너 병마재, 모시울, 전의군 솔티리 신씨(申氏) 집에 도착하였다. 그 때에 박상암장이 경주(慶州) 이씨(李氏)로 성(姓)을 고치고, 직함은 도사라 처신하였다. 그 주인과 거처를 옮기는 일을 이야기하고 뒷일을 기약하였다.
다음날 22일에 길을 떠나 공주 노인당리 한응고씨의 집에 당도하였다. 8월 4일에 상암장댁이 노인당리에서 거처를 옮겨 전의군 송티리 신서방집 협실로 이전하여 여러 달을 머무르셨으며 10월 6일에 상암장이 거처를 옮겨 목천군 남면 초정리(椒井里) 남용원(南容元)씨의 집을 사서 정하고 안접(安接)하였다. 박상암은 이도사라고 처변하였다.
이러 저러 새해를 맞이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