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1899)년에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그 해에 그 동네 남정유씨댁에 여자 종 17세 아이가 있어 내어달라고 여러번 간청하니 남씨와 말을 주고받고는 응낙한 후 4월 20일에 상암장이 소실로 취하였다. 12월 12일 밤 해시(亥時)에 해월신사 사모님께서 돌아가셨다.
본인은 갑오년(1894) 12월에 집안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이후로 처자 가족을 지금까지 6년 동안 친척집에 맡겼으며, 본인은 선생님의 큰 도(道)를 창명(彰明)하기 위하여 집안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길 위에서 있던 것이 6년이었던 것은 이와 같이 연원주(淵源主) 박상암댁에 한 몸을 의탁하여 대운(大運)이 침잠된 때를 당하여 동정천직이며 운용동작을 상암장과 함께 지냈다.
기해년(1899) 11월 일에 상암장이 전의군(全義郡) 송치리(松峙里) 중촌(中村)에다가 집터를 정하여 놓고 본인에게 목천군(木川郡) 남면(南面) 초정리(椒井里) 박상암장이 거하며 머무르던 집터와 집안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1899년 12월 10일에 이전(移轉)하게 하신 고로 본인이 1894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6년 만에 식구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거처를 옮겨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날은 11일이라. 상암장은 전의 솔티 중말리에 사들인 집으로 이사하여 머무르셨다. 본인은 금년 8월부터 습기로 요통증으로 아픈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잘 걷지를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