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1901) 1월 3일에 서산군 이득춘의 큰형님에게 득춘씨가 모처에서 돌아가신 소식을 상암장께서 전하였다. 1月 10일에 구암장댁이 양구 전다란리로 돌아가 머무셨다.
이보다 앞서 1900년(庚子) 7월 보름 후에 경상도 풍기군 이용구(李容九)씨의 집에서 성사(聖師)선생님께서 오도(吾道)를 환하게 밝힐 규모로 설법치성(說法致誠)을 베풀어 봉행(奉行)하려 할 때에, 성사(聖師)님 이하 구암장(龜菴丈), 춘암장(春菴丈)은 대도주(大道主)이시고 그 아래 봉암(鳳菴), 정암(貞菴), 상암(湘菴), 인암(仁菴) 수모(誰某) 제씨(諸氏)에게 통지하셨기에, 도석(道席)의 모임에 참여하기 위하여 7월 15일에 박상암장이 김기태(金基泰)씨와 오여삼(吳汝三) 두 사람과 함께 출발하여 같은 달 20일에 설법 예식(說法禮式)에 참석(參席)하니 오도(吾道) 가운데 1등 장석주(丈席主)가 기허장(幾許丈)이고, 이하(以下)는 모모(某某) 제씨(諸氏) 36원인이 극진하게 대도 설법 치성(大道說法致誠)을 마치고, 이곳에서 많은 날을 머물러 있다가 회기(晦期)에 본가로 돌아갔다.
신축년 3월 2일에 구암장댁에 봉행(奉行)할 일을 본인에게 위임하여 보내기로 하였기에 본인이 즉시 길을 떠나 강원도 양구 전다란리 구암장댁에 당도하여 예를 마친 후 10일의 향사를 받들어 행하고 12일에 구암장을 모시고 본인이 길을 떠나 낭천(浪川), 경기 지평, 양주 퇴계원, 서울 동대문, 종로 등지에서 머무르고 다음날 길을 떠나 3월 19일에 목천(木川) 남면(南面) 초정리(椒井里) 본인집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상암장과 한응고씨와 함께 본인 집에 도착하였다. 피차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날 오후에 구암, 상암, 한응고 세 사람이 솔티 상암댁으로 갔다. 그 때에 구암장 소실은 공주군 사곡면(寺谷面) 송우동리에 집을 새로 구하여 살고 있을 때이다.
25일 오전에 문장로(文章魯), 이계화(李桂化), 이원영(李元榮) 세 사람이 도착하여 아침을 함께 먹고 본인이 세 사람과 같이 길을 떠나 전의(全義) 솔티 상암장댁에 이르러 상암장에게 인사를 드린 후 각처 인심의 형편을 이야기하였다. 그 때에 예포(禮包) 관내 각처에 실교호(實敎戶)가 5,000여 가이며, 신도가 17,000여 명인데, 통솔할 사람은 적고 신도는 많아서 항상 서로 어긋나는 일이 간혹 발생이 됨으로 부득이 접중(接中) 규모(規模)를 다시 정하기로 수모 두목으로만 상의하고 각 포주(包主) 포장과 통운통신(通運通信)을 새롭게 정하여 각처 관내로 내려 보냈다.
4월 5일은 즉 천일 기념(天日紀念)일이다. 제사를 드린 이후로 태안의 유상호, 이계화(李桂化)로 상암댁에 여러 번 왕래하였다. 상암장께서 세상 인심을 자세히 알아보고 낌새를 보아 미리 변통하여 그 조카 응규의 관례(冠禮)를 4월 15일에 치르고 혼례는 추석 이후로 미루어 정하고 바로 여름옷과 겹옷까지 준비해 가지고 각처 교인들의 집을 여기저기 다니시며 동정을 살피셨다.
본인이 4월 24일의 공주군 사곡면 밤성골 권혜흥(權惠興)씨의 산막집에 도착하여 상암장과 서로 만난 후에 상암이 이르기를, “즉시 솔티리로 가서 중요한 것과 옷가지 등을 우선 챙겨라.” 하시기에 지휘를 듣고 즉시 솔티리에 와서 상암의 큰형님께 이 말을 전하오니 씨가 믿지 않았다. 3~4일 후 4월 28일 날이 밝기 전에 공주군 중대장 이민직(李敏稷)의 종자(從者) 유상호(兪相浩)란 자가 병정 10여 명을 이끌고 솔티리 상암장댁에 돌입하여 손님방에서 상암의 큰형님인 강암장, 김철수씨, 김일택(金一澤) 세 사람을 체포하고, 아랫마을 새터리 김기태씨를 붙잡아 합 네 사람을 붙잡아서 공주군으로 보내며, 한편으로는 상암장댁의 가산과 집물을 몰수 탈취하고 심지어 소와 말까지 마을 가운데 적치(積置)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부여군 염창리 유기성(柳基星)씨와 그의 아들 인봉(仁奉)이가 와서 상암장댁에 작년10월부터 함께 살았다. 28일이다. 본인의 심신이 산란하여 천안 도리터로 곡자가를 받으러 가려하는데, 산란한 마음을 진정치 못하기에 남용원(南容元)씨와 상의하여 남씨는 본인의 곡자가를 거두러 대신 보내고, 본인은 남씨의 논갈기를 하여 오후에 본인이 태우 고개 밑 장선리에서 논 두어 배미를 갈며 보니 태우 고개로 어떠한 사람이 힘이 없이 내려왔다. 서로 살펴보니 유기성씨였다. 유씨가 본인에게로 건너오기에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 오늘 아침에 솔티댁이 여차여차했던 말을 설명하며, “오늘 저녁에 가실리 상암의 동생집으로 김헌수씨가 와서 상의 조처하기로 약조하였으니 어떻게 합니까?” 하였다. 본인이 그 말을 들으매 정신이 혼미하여 진정하지 못하다가 유기성씨와 같이 본인 집으로 와서 저녁을 재촉하여 먹고 두 사람이 가실리로 가서 당도하니 김헌수(金憲洙)씨가 상암댁 가족을 대동하고 먼저 도착하여 고대(苦待)하고 있었다. 유인봉(柳仁奉), 한유성(韓有成) 두 사람도 모여 앉아 있었다. 헌수씨와 이야기하고 각기 한가지의 일을 담당하여 조처하기로 서로 약속하고 상암의 동생 희형(熙亨)은 아직 그 곳에서 머무르게 하되 그 마을에서 지목이 없게 조처하고, 상암장 부인과 그 자식 4남매와 그 형수씨는 헌수씨가 공주, 천안 등지로 인도케 할새 유기성씨 부자도 같이 밤새도록 걸어서 천안 보산원에 당도하니 4월 마지막 날 해뜰 무렵이었다.
헌수씨는 상암의 큰아들 문규(汶奎)와 그 백모(伯母)님을 모시고 석지(石地)골 김승록의 집에서 유숙하게 하고, 유기성씨는 상암장의 소실을 절터골 전연진(田連鎭)씨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상암장의 부인은 공주군 금천리 불당골 유기성씨의 큰형님댁에서 3남매를 이끌고 머물게 하였다.
본인은 이 밤에 한유성과 중요한 것으로만 짐을 멜 때 유기(鍮器)와 응규(應奎)의 혼복(婚服)을 우선 각 1태(駄)씩 짊어지고 길을 떠나 전의군 시장촌리(市場寸里)를 내려가니 날이 해가 뜰 무렵이었다. 급히 출발하여 상태우 고개를 지나 대흥골 산곡에 들어와 산 아래 경사면에 구덩이를 파고 유기짐 1태를 숨겨둔 후 한유성은 자기집으로 보내고 혼복 1태는 본인이 지고 대양(大陽)골로 내려가다가 덧고개를 넘어서서 말미리 본인집에 당도하였다.
오늘은 4월 29일이다. 해가 뜰 무렵에 공주 중대장(中大將) 이민직(李敏稷)이 종자(從者) 유상호란 사람과 병정 10여 명을 이끌고 목천 남면 말미리 본인 집에 들어와 한편으로는 의질(誼姪) 성영(成榮)을 붙들어 앉히고, 한편으로는 안뜰로 갑자기 뛰어들어 유상호란 자가 잠긴 방문을 발길로 들어차니 문이 부서졌다. 막 뛰어들어와 수색하되 박상암과 본인이 없는 고로 어쩔 수 없이 나가니 불과 3분간이었다.
즉시 아침을 먹은 후 지고 온 혼복 한 짐을 남용원씨 당질 남정유씨의 집에 보관해 두고 본인의 의질 성영과 남용원 두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양골 깊숙한 곳에 유기 한 짐을 숨겨두었으니 저녁에 두 사람이 찾아다 두라” 부탁하고 남용원씨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처변하기를, “어제 용인을 가다가 잊은 일이 있어서 식전에 돌아와 보니 매우 괴상한 일이라 하니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그 사람들이 말하되 수상한 사람이 들어왔단 말을 들고 왔지만 헛걸음하였다”고 하기에 “괴상한 일도 있도다” 하며 본인은 부득불 볼 일이 있기에 용인 고향을 간다 처변하고 해미, 서산, 태안 포중(包中)에 일이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른 사실과 지목을 단속하며, 수모 두령은 기회를 엿보아 몸을 숨기라고 통지하기 위하여 오후에 길을 떠나 온양, 신창 금반형, 예산 종경이, 덕산 구만리, 한내 장터, 해미, 군장 등으로 하여 서산 승현면 추리개 이원영(李元榮)씨의 집에 도착하여 전후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 하고 하룻밤을 머무르니 다음날은 즉 5월 2일이다.
아침을 먹은 후 몸과 마음이 산란하며 아주 피곤하여 오전에 주저하다가 오후에서야 길을 떠나 일은리 김지학(金知學)씨의 집에 도착하니, 김지학씨가 없어서 한 식경을 기다리자 주인과 조의숙 두 사람이 들어오기에 인사를 한 후 전의와 목천 말미에서도 여차여차하고 4~5인이 붙잡힌 일을 설명하고 서산, 태안 접중에도 기틀이 있을테니 문벌과 모모 두령은 삼가 조심하여 피신케 하라 지휘하여 약속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조의숙씨와 동반하여 서산 갈티리 본인의 작은형 댁에 삼경에 당도하여 작은형님 내외분을 뵙고 전후 사실이며, 각처 돌아가는 사정을 설명하니 조카들은 잠이 들어 본인이 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
신축년 5월 3일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본인이 일어나 앉으니 몸과 마음이 산란하나 정심정기하여도 말의 앞뒤가 막히기에 두 세 번 꿇어 앉아 마음을 바로 잡을 때 조의숙씨가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벌써 유상호란 자가 병정 4~5명을 이끌고 와서 좌우 문을 지켜 섰다가 조의숙씨를 결박하며 안뜰로 막 뛰어들 때에 본인은 작은형님집 손님방에서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며 앉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심축하고 앉아서 일을 기다리다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란 생각이 발생하여 손님방 위 방문 앞구석에 돗자리를 접어 세웠기에 본인이 그 좁은 구석편에 몸을 의지하고 본즉 본인의 작은형님 석훈(錫勳)씨도 붙잡혀 나가 결박당하였고 조카들을 호령하며 너의 삼촌은 어디로 갔느냐? 이르라 하니 보지 못하여 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위아래 방을 수색하여도 본인을 찾지 못하니 본인의 작은형님과 조의숙 두사람을 서산군으로 붙잡아 갔다. 그 날에 집안 재산과 도지로 가축하는 다른 사람의 농우(農牛) 새끼 2마리까지 빼앗아갔다.
본인은 이에 형수님을 위로하며 조카들에게 대하여 말하되 “지금 이 지경을 당하였으나 온 식구가 식사를 아니 하고 정신을 잃으면 두 가지 일을 감당치 못할테니 정신을 수습하여 매사를 조처하라. 일이 되어가는 대로 처리할 테니 너무 마음을 잃지 말게 하라”고 부탁하고 조반을 재촉하여 조카를 일은리 김지학의 집에 일을 통지하기 위해 바로 보내니 김씨도 벌써 아침 해가 뜰 무렵에 붙잡혔다고 하였다. 본인이 조반을 형수씨와 조카들에게 권하며 식후 가지고 있는 전(錢) 1원을 가지고 이원영(李元榮)에게 향하다가 가던 길에서 박병길씨를 만나 전의와 목천이며 이곳 좌우의 형편을 자세히 설명하며 포중(包中) 각처의 지목을 단속케 통지하라 지휘하고, 추리개 이원영을 찾아보고 이번 일의 연유를 설명하고 이곳도 조만간 올 것이니 속히 출발해야 한다 하니 원영이 즉시 행장을 차려 요대를 치는 실 여러 가지도 챙겨가지고 본인과 함께 길을 떠나며 원영이 말하기를, “이번 길은 저 하나 구하러 오셨습니다.” 하였다.
수일 만에 공주 명가울 터골 김응국씨의 집에 의지하여 밤성골 권감찰 혜흥씨, 송우동 한응고씨, 덕암 김용보씨의 집으로 오고가며 각처 통신을 비밀 조처하였다. 이원용씨를 공주 재배실 주점 김씨의 집에 주인을 정하고 요대를 쳐 장색을 빙자하고 좌우 각처로 왕래하며 소식을 서로 통하게 하였다. 본인은 목천 말미 본가에서 4월 말일에 길을 떠나 하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니 세상 인심이 음해가 일어나기 마련으로 동네에 떠다니는 소문이 본인더러 박모의 아우인데, 조서방이라 하며 그가 한 당의 괴수로서 이리저리 성을 바꾸며 처변한다는 이상한 소문이 갑자기 퍼져서 문리(門里)의 언론이 만약 그 집에 왕래하는 사람은 큰일이 날 것이니 왕래가 불가하다 하니 동네사람들의 내왕이 없었다.
6월 2일에 본인이 야심한 삼경의 말미에 본인의 집에 들어가 인심 동정을 살펴보니 불량한 건달과 목천 관속배가 본인의 내왕 유무를 탐지하니 인심도 수선수선하던 모양이었다. 그날 밤에 사과(司果) 유기일(柳基一)씨를 청하여 오게 하여 보고 서로 이야기한 후 유씨가 말하기를, “이번 일을 자세히 알고자 한다”라 하기에 본인이 말하길, “그러합니다. 진정으로 이도사(李都事)는 진위인(振威人)으로 갑오년(甲午年)에 예산(禮山) 살림을 하였으며 이도사가 원래 남의 수하로만 있지 않았을 자격이라, 동학의 대두목이요, 중대장 이민직도 2대 동학 장석(丈席) 도인(道人)이요, 박덕영도 대두목이라, 갑오년을 당하여 일심 단결하여 척양척왜의 뜻으로 기포 감영으로 가매 이민직은 홍주 목사 이승우에게 붙어 도리어 같은 교도를 살해하니 이도사와 박덕영 두 사람은 한 편이 되어 홍주성 외서면(外四面)으로 4~5겹을 에워싸고 맞아 싸울 때 이승우와 이민직은 성 안에서 혼불부신(魂不附身)할 뻔한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파혹(破惑)치 못한 까닭이 그 혐의가 되는 일입니다.”라고 말하니, 유사과가 말하길, “그러하면 그 일은 박덕영이라 하고 잡혔으니 이도사 동생의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내 지금 공주 진실한 진목이 있으니 이 동네에서라도 박덕영이 아닌 줄로 통보라도 해서 애매하게 고생하는 것을 벗어나게 하겠다.”라 하기에 본인이 답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박씨를 잡아도 이도사와 같은 일이고 이씨를 잡아도 박씨와 같은 일이라 사실을 밝힐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유씨가, “그러하면 할 수 없소.”라 말하고 이야기한 후 나갔다. 그 동네 이낙여씨는 그 면장(面長)이다.
본인이 다음날에 비밀히 만나기를 청하여 이야기를 나눈 후 낙여씨가 이도사의 사실을 물어보기에 본인이 유사과에게 하던 말과 같이 일일이 말을 설명하니, 그 이씨 마음에 본인도 무슨 허물이나 잘못이 있는 줄로 의심하여, “우리가 진정서를 넣으면 설혹 말이 있을지라도 알고 조처하여야 좋을 일이 아닌가” 하기에 본인이 답하기를, “그 다 이를 뿐이오. 나를 두고 볼지라도 내가 높고 큰 집과 여기저기 논과 밭이 있어 몸이 붙잡혀 있겠오. 돈과 곡식이 있어 몸이 붙잡혀 있겠소, 세상천지 만물 중에 벼룩같은 미물도 저를 붙잡으려 하면 죽지 아니 하려고 뛰어가고 틈으로 들어가는데, 사람이야 어리석은 행동으로 죄가 있고서야 아무개라는 이름이 드러났는데 그곳에 있어서 제 신명을 마치고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오? 사람이 그 사람의 처신함을 보면 가히 짐작할 일이 아닌가?”라고 하니 이씨가 그제야 알겠다고 하며, “그러하기에 별말이 다 있기에 어찌하여 그리한가 궁금하더니 들어보니 알 만하오. 지금 재물이 죄니 도사도 집칸과 말필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떠났다. 그 후로부터 온 동네에 떠들석하던 풍문이 일제히 없어졌다.
박상암장은 4월 15일 이후 길을 떠나 비밀리에 공주, 천안 등으로 전진하며 동정을 살피다가, 28일에 우리집 소식을 듣고 권봉규씨와 전감찰 혜홍씨와 상의하여 한영필씨에게로 모모(某某) 제씨(諸氏)가 별반 상의하여 우선 조처하라 부탁하였다. 신축년(1901) 5월 3일에 권봉규씨를 서울로 올려보내 이지사에게 사무를 자세히 설명하라 지시하고, 그 후에 새벽닭이 울 무렵인 새벽에 상암은 전주태와 함께 길을 떠나 강원도로 향하여 가다가 가는 길 중에서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매우 심하여 몇 걸음도 걷기가 어려워서 10여 일 만에 홍천군 영금면 후동 구암장의 조카 윤덕의 집에 도착하여 구암장께서 아무개가 오거든 양구 본댁으로 멀리 오게 하라고 부탁하고 3일 전 출발하여 만나지 못하고 여행으로 인한 피로는 더욱 심하여 천사만념(千思萬念)하여도 한치도 걷지를 못하였다. 수일 후 여창리 이관여씨가 50리를 3일 만에 도착하여 6~7일을 머물렀으나 차도가 없어서 28일에 부득이 전주태로 하여금 서찰과 제수물품 각가지 종류를 봉하여 대신 보냈다. 6월 2일 제사에 참석하려 양구로 즉시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신축년 6월 9일이다. 본인이 유기일(柳基一)씨를 보고, “지금 서울서 이지사가 일을 보고 있으니 지금 전문 500냥만 하면 전의에서 몇몇 분은 무사히 풀려나겠다”라고 하니 형께서 돈을 구하여 달라 부탁하였더라.
이보다 앞서 신축년 봄에 서산군 계화씨가 태안군 유상호를 입교시킨 후 계화씨의 집에 와서 집안의 내력도 보며, 명함 교안도 유상호가 수정하여 두고 4월 일에 계화씨와 함께 전의 상암댁에도 왕내한 후에, 상호란 자가 교묘한 일을 꾸며 28일에 상암장댁에 돌입하여 소와 말까지 몰수하고 수사하고 탐지하여 4~5인을 붙잡아 올렸다. 29일에는 본인의 집에 들이닥쳐 수색하였고, 5월 3일에 서산군 갈티 본인의 작은형님댁에 돌입하여 수색하고 소 2마리와 본인 작은형님 석훈씨와 조의숙씨, 김지학, 정사술씨를 체포하였으며, 서산 쌍모시 이계화씨의 집에도 유상호가 병정을 데리고 갑자기 들어가 교인의 명단을 적은 문서를 빼앗고 계화씨를 붙잡아 보내었다. 유상호란 자가 교인의 이름이 적힌 문서를 가지고 다니며 가가호호 제멋대로 행동하며 교인을 괴롭게 다그치며 재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집안 재산을 모두 잃게 되어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사방에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암장께서 3월 일에 내려오셔서 송우 작은댁에 머무르시고 5월 초에 양구 본댁으로 출발하셨다.
5월 말일에 태안 유상호가 병정을 이끌고 구암댁을 찾아오는 길의 중로에서 전라도 김일서를 만나 며칠을 함께 가다가 양구읍을 지나 청양이 고개에서 일서씨의 봇짐을 빼앗아 보고 일서를 결박하여 앞세우고 구암장댁으로 가니 6월 1일은 해월신사주 향례일이었다. 각처 교인들이 와 있을 때라 유상호가 병정들과 바로 구암댁골로 들어섰고 구암장을 체포할 때에 머리까지 상처를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 때에 영동 최일천씨도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때에 구암장과 최, 김 두 사람과 같이 충남 공주로 오셨다.
본인이 공주 감옥에 계신 여러 분들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하여 전문 500냥을 얻고자 유기일씨에게 청구하였더니, 유씨가 대양 고유원씨에게 말하여 서울 배아 고개에다 맡겨놓은 돈 1,000냥 음표를 가지고 와 본인에게 주며, “500냥은 쓰고 500냥은 갖다 달라”라고 하기에 본인이, “만약 다 쓰게 되면 전부라도 쓸 테니 그리 알고 전주(錢主)에게 그대로 상의하라”고 하니 씨(氏)가 “일이나 성사케 하라”라고 하며 음표를 내어주어 간직하였다. 이 날은 6월 15일이다.
본인이 공주 용문리 큼목이 이의삼의 집에 도착하여 한명필씨를 보고 상의하되, “권봉교씨가 서울서 이지사의 말을 들으면 알 테니 한형은 봉규씨와 상의하여 돈을 쓰게 되거든 이 돈 천냥 음표를 가지고 서울 배아 고개에 가서 돈을 찾아 50원만 쓰고 50원은 내려보내라. 전주가 50원을 찾아달라 하였으니 그리 알아 주선하라”고 신신 당부하고 음지를 한영필씨에게 내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표지를 그대로 가지고 오라”고 말하고 서울의 모든 일은 한영필씨가 보기로 하고 충남의 포(包)를 관리하는 일을 주간하는 사람은 본인뿐이므로 전에 말한 대로 모든 일을 본인이 주간하기로 약조하고 20일에 서울로 길을 떠났다.
1901년은 큰 검거를 당하여 여러 일들을 어찌할 수 없어 한응고, 이용태, 본인과 3인이 상암댁 농우(農牛)와 본인집 농우 2마리를 3인이 끌고 공주 유구 시장에 가서 소 두 마리의 값 220냥을 받고 돌아와 경성 모사소(所)에 6월 25일 한응고씨에게 22원을 즉시 서울로 올려보냈다.
7월 3일에 권감찰과 본인이 상의하고 상암장의 안부도 듣고 상암댁의 거처를 옮기는 것을 처리하기 위하여 권감찰 혜흥씨를 즉시 강원도로 출발시켰다. 8월 8일에 유숙하고 9일에 출발하여 12일에 강원도 홍천군 내초면 여창리 이관여(李官汝)씨의 집에 당도하여 유숙하고 이튿날에 관여씨가 상암장 계신 곳에 가는 노정기(路程記)와 사람이 없고 십리 장곡(長谷)이라 물어볼 곳이 없는 고로, 산과 길의 도형을 그려 주기에 본인이 받아가지고 13일에 아침을 먹은 후 여창리에서 출발하여 와야, 방까시 동네 앞으로 오른쪽 산으로 십리장곡 긴 산골짜기를 올라가 왼쪽 골로 올라가 작은집골 홍기호씨의 집에 도착하여 상암장을 뵙고 전후 사실을 이야기하고 가지고 온 돈 157냥을 드렸다.
다음날 뒷산에 올라 구경하고 송이버섯을 따가지고 내려와 절사(節祀)를 지낸 후, 상암께서 매사에 마련하는 것이 다 부족한 것을 염려하시기에 본인이 회초(晦初)간 내왕하기로 약조하고 16일 출발하여 수일 만에 본인 집에 돌아왔다. 9월 3일에 권감찰씨로 상암장댁 이삿짐을 먼저 지켜 강원도 여창이 등지로 발송하였다.
신축년 9월 28일에 공주 연중리 터골로 권감찰의 막내동생 집에서 상암댁 가족이 머무르시다가 이날 9월 28일에 상암장댁 가족의 거처를 옮기는 것을 시작하여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불막 삼연터로 권감찰씨가 호송 인도하여 안접(安接)하였다.
신축년 4월 28일 전의로부터 동 8월까지 공주 중대장 이민직에게 체포된 교원(敎員)이 구암장, 박희윤(朴熙允)씨, 김기태(金基泰)씨, 김형주(金兄主), 조석훈(曺錫勳)씨, 김지학(金知學)씨, 조의숙(曺義淑)씨, 이계화(李桂化)씨, 정사술(鄭士述)씨, 김일서(金一瑞)씨, 강채서(姜采西)씨, 전덕수(全德秀), 최일천(崔一天)씨 합 12명이고, 기타 34명은 공주군에서 죄가 없다고 해서 풀려나온 바 김철수(金哲洙)씨, 김일택(金一澤) 두 사람도 무사히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으며, 기타 12명은 모두 9월 1일에 공주에서 출발 서울로 올라가 징역에 처하여 혹 4년, 혹 3년씩의 법률에 처하였습니다. 전덕수, 이계화, 최일천 세 사람은 옥중에서 죽었고, 김지학, 김일서 두 사람은 그 후 3년 1903년(癸卯)에 풀려나온 뒤 죽었으며, 박희윤씨, 김기태씨, 조석훈씨, 조의숙씨, 정사술씨, 강채서 이 6명은 풀려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구암장은 4년 형에 처해져서 1904년(甲辰) 12월 7일에 석방이 되었다.
신축년 6월 20일에 한영필(韓永弼)씨가 서울로 올라가 배아이 고개에 가서 음표 전문 1,000냥을 찾아가지고 전주(錢主)가 찾아보내어 달라는 그 500냥까지 서울 볼 일에 돈을 써서, 시절은 큰 추위에 들에 푸른 풀이 없어 굶어죽을 지경이라, 인심 형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곤란한 때였다. 본인이 좌우 각처로 주선하여 어찌어찌 감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