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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을사년(1905) 2월 17일에 원주군(原州郡) 강감리(降監里) 월포동(越浦洞)에다 집터를 정한 상암장이 회일(晦日)에 거처를 옮겨 안접(安接)하셨다. 그곳에서도 상암장께서 경주 김씨로 처신하셨다.

을사 10월 일에 상암장의 집만 배향산 말티리로 이사하여 거주하시고 성은 경주 김씨로 처변하셨다. 예산(禮山) 김기태(金基泰)씨가 경성 감옥에 3년 형을 받았을 때에 그 부인이 서울에 올라가 섭밥도 구걸하여 옥중에 드리며 여러 첨원(僉員)에게 돈량과 음식도 인도 하시기를 일심 준행하시니 감옥의 제씨(諸氏)도 기갈(飢渴)을 감수하였으며 본인의 조카 명승(明承)이도 그 김씨 부인과 함께 서울을 왕래하게 하였다.

신축년 6월 이래로 서울 일에 왕래하기를 장춘식씨로 하여 통신을 계속 보냈다. 계묘년(1903) 3월 2일에 본인이 공주 명가울 터골 이원영씨의 집에 도착하여 들으니, 1월 27일에 본인의 처남이 죽고, 2일은 본인의 장인이 돌아가시고, 같은 달 7일에 작은 처남이 죽어 10일내로 3부자가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본인 집에 오전에 도착하여 들으니 그날 아침 식후에 아산 시궁골 한영필씨가 사람을 보내 기별하기를 김수암 기태씨와 조주암 석훈씨가 옥고 3년에 석방되어 왔다고 하였기에 듣고 보니 일희일비(一喜一悲)를 측량할 수 없었다.

점심을 재촉하여 먹은 후 본인이 부인께 대하여 일러 말하기를, “지난 2월에 장인과 처남 형제가 다 죽었다 하니 부인은 너무 애탄하시어서 마음을 손상치 마옵고 맑은 물 한잔 떠다놓고 연유로 심축하고 발상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3월 4일 오후 4시 반에 본인이 출발하여 아산 시궁골 한영필씨댁에 도착하여 본인의 형님과 김기태씨를 서로 만나 3년간 옥고를 치른 말씀을 상의하고 이야기하였다. 다음날에 세 사람이 길을 떠나 천안 광덕 접중에 도달하여 제반사를 상의 조처하고 3월 10일 향례를 강연홍씨의 집에서 비밀리에 봉행하였다.

이리저리 15일에 본인집에 도착하여 보니 향례를 지낸 날에 부인의 친가 부모 두 분과 동생형제가 일제히 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천륜(天倫)의 정리(情理)로 망창한 심사를 진정치 못하다가 여식은 다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럽게 마음이 자식에게 은정(恩情)이 소원하였다. 그런 고로 자식에게 기틀이 발생하여 생사를 알지 못하는데, 자기도 또한 기틀을 당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게 되었기에, 본인이 부인께 위로하여, 도의 이치와 은정 기운으로 자손이 무성함이요, 심상 즉 기운이 상한다는 이유를 설명함에 자기도 황송한 줄을 생각한 후 바로 일어나고 아이도 3일만에 쾌차하였다고 하였다.

의암성사께서 본국(本國)에서는 오도(吾道)를 구정당(旧政黨)의 행패를 상지할 수 없어서 부득이 일본국으로 들어가셔서 동서양 각국 풍조(風潮)를 빌어서 마음을 정리하고자 하시어 일본 동경(東京)에서 수 년을 머무르시면서 한편은 교도(敎徒)를 시키어 속마음으로는 수도(修道)를 극진(極盡)이 지키오며 밖으로는 사회(社會)를 조직하셨다. 1904년(甲辰)의 일진회(一進會)를 설치하여 우선 야만(野蠻) 정부(政府)를 압박하며 한편으로는 오도(吾道)를 창명(彰明)하시려고 세계 동서양에 반포(頒布)하시되 조선국(朝鮮國) 동학(東學)을 변경하여 천도교(天道敎)라 이름하여 각국에 교과서(敎科書)로 유시(諭示)케 하셨다.

주석
망창 갑자기 큰일을 당하여 앞이 아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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