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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1906년(丙午) 2월 초순에 본국으로 돌아오셔서 또한 이와 같이 전국 정당이며 팔도 방백(方伯) 수령(守令)에게 교과서와 공함(公函)으로 일일이 모두 보게 하시고 일진회와 천도교를 성사(聖師)께서 모두 설립하고 조직하시었으나, 일진회는 그만 혁파(革罷)시키실 주의(住意)로 13부(部)에다가 천도교 교구를 설립하시며, 364군에 한편 교구장과 6임(任)을 절출(晢出)하실 때, 충남 예포(禮包) 포중(包中) 수임(首任)을 정할 때, 구암장이 주장하여 예포 충남 관내 규모가 철석(鐵石)과 같이 견고(堅固)한 큰 접(接)을 많이 욕심을 냈고, 방자한 사람들의 말을 믿고 들었다. 비유하건대 다른 사람이 작난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삭을 자른 것과 같이 몰지각한 자로 하여금 포중(包中) 주임(主任)을 정하니 어찌 선생의 본뜻을 받음이 있으며, 포덕(布德) 관계와 화평인심(和平人心)은 주의하지 아니하고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연원과 천주(芊主)의 혼잡스런 마음을 주장하는 연고로 예포(禮包) 충남 거대(巨大)한 접중(接中)이 일조에 여지가 없게 되었다.

갑진년(1904) 12월 10일에 본인이 함께 살고 있는 의질(誼姪) 지성영(池成榮)과의 혼인을 전주 이씨 이광우씨의 질녀[기축생]로 혼인 예식을 아무 탈 없이 잘 치렀다.

을사년(1905) 1월 16일에 이원영, 최찬각 두 사람에게 맡겨 보내어 경상도 화북면(化北面) 장암리에 집터를 사게 하고, 2월 12일에 목천 말미서 이삿짐을 옮기기 시작하여 15일에 상주 화북면 장암리에 무사히 이사를 끝마쳤다. 그 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산에 감자 농사도 하며 9월 일에 문장대 시어동 산에서 도토리 3~4석을 주워 모아 놓고 호구하여 생활의 방법을 얻어 마음을 붙이고 지냈다.

병오년(1906) 1월 16일 진시(辰時)에 넛째 딸 선승(善承)이 탄생하였으며, 본인의 장녀(長女)의 혼사를 박상암장의 장자 문규(汶奎)로 정하여 2월 20일에 혼례를 무사히 마치고 같은 달 2일 우례(于禮)의 길을 떠났다. 장암서 늘티, 솔면이, 소슬령을 넘어 되산 안도리, 칠성 바위, 느릅재, 연풍 무도리 장터에 머무르고 다음날 출발하여 청풍 신당리, 황강 나루를 건너 반장리, 제천읍으로 해서 모산리 왕지못뚝 주점에 머무르고 다음날에 못재고개를 넘어 오미동내,삼중치령(三重峙嶺)을 넘어 원주 배향산 말티리 박상암댁에 도착하였다. 하루를 머무르고 다음날 하인들을 돌려보내고 본인은 그 다음날에 상암장과 같이 서울로 올라가 머무르다가 3월 5일에 상암장, 김철수씨, 본인, 이한영 4사람이 일제히 단발(斷髮)하였다.

10일 모여 향례(享禮)를 행한 후 본인, 김철수씨 두 사람이 함께 출발해서 천안 광덕 접중에 도착하여 포중 규모지사를 조직하여 단속하고,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여 바로 4월 2일에 서울로 올라가 제수품을 바치고, 4월 5일 향사를 받들어 행한 후 상암장과 같이 천안 광덕 접중으로 내려왔다. 그 때에 구암장께서 교인(敎人)의 신물(信物)로 도표를 조직하신 고로 상암장께서 도표를 비밀리에 반포하였다.

5월 26일에 광덕 포중에서 상암장과 본인이 바로 서울로 올라가 6월 1일 향례(享禮)를 올리고, 같은 달 4일에 본인은 천안 광덕 곽기풍씨댁에 내려와 점심을 먹은 후, 공주 덕암 송배헌씨의 집에 도착하여 송배헌씨와 함께 예산 교구에 들어가 구장 배헌씨가 노자돈 50냥을 주기에 받아가지고 바로 천안 광덕 곽기풍씨댁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날은 6월 9일이다. 본인이 조카 명승(明承)을 데리고 길을 떠나 11일에 서울에 들어가 상암장을 뵙고 다음날에 상암과 길을 떠나 진위포(振威包)에 도착하여 안참봉댁에 유숙하고 16일에 길을 떠나 안성읍에서 한달무씨를 만나보고 객주에 유숙하였다. 그때에 본인이 더위병이 발생하여 식사를 하지 못하는 중 기운이 쇠진하며 입맛을 잃어 버렸다. 17일은 새벽부터 큰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아 홍수가 크게 일어나서 안성 객주에서 1일을 머물고 18일 오후에 출발하여 20일에 강원도 변압 장택명씨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본인의 심기가 피곤하고 입맛을 잃어버리고부터 지금까지 그렇다. 다음날 배향산 말티 박상암댁에 도착하여 이틀을 머물고 24일에 조카 명승과 같이 길을 떠나 말티서 삼중치(三重峙), 못재고개, 제천, 반장리, 안암장터, 황강을 건너 청풍 신단리, 연풍 무도리, 병방골, 늘읍재, 괴산 칠성 바위, 안도리를 지나 쇠슬령, 솔면리, 늘티를 지나 상주 장암리 본인 집을 2월에 나와 금 6월 26일에 도착하여 이 밤에 부친의 기제(忌祭) 기도식을 행하였다.

7월 12일에 큰 비가 내려 13일까지 내리니 산천이 퇴갈하고 홍수가 크게 일어났다. 7월 16일에 본인이 길을 떠나 청주읍에 도착하여 들으니 지난번 홍수에 읍중(邑中)에 침수되고 유실된 가옥 호수가 402호로 조사되었다는 말을 듣고 탑수, 모가울, 전의읍으로 해서 천안 원일면 중방골 이광우씨댁에 당도하여 좌우 접의 소식을 찾아 물으니, 광덕산 아래 공주 천안 등지는 개벽과 다름이 없어 사망자는 부지기수이며 교인 중 다친 자가 합 10여 명이고, 유실 가호는 수십 호가 되었다.

병오년 2월부터 교인에게 신분금(身分金)으로 사람마다 1달에 11전씩 조직되었으며, 성사님께옵서 병오년 3월 7일에 예산군에 천도교 제42교구를 설정(設定)하실 때 주임(主任)을 새로 정하되 교구장(敎區長)에 송배헌(宋培憲), 이문원(理文員)에 이옥영(李沃榮), 전제원(典制員)에 김철수(金哲洙), 서응원(庶應員)에 김건제(金建濟), 금융원(金融員)에 김기태(金基泰)씨, 김도선(金道仙)을 재임(再任)으로 정하고 천도교 교빙(敎憑)을 반포(頒布)하였다. 교안(敎案)을 새로 바로잡을 때 주간하는 자가 말하길, 대도(大道)에 연원과(淵源) 천주(天主)를 혼잡하며 주임(主任)된 추세로만 행동을 하니 충남 예포가 한 순간에 두 갈래가 되었다.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한편으로는, “오도(吾道)를 사사상수(師師相授)로되 자재연원(玆在淵源)이라 시니 대의(大義)로 종사(從師)하는 것이 가하다” 하며, 한편으로는 “운수(運數)가 지정(指定)하옴이 무(無)함이라, 신장정(新章程)대로 발달진보(發達進步)하는 것이 주재(主宰)라” 하여 양편이 주의(主意)가 각각인 고로 두 가닥이 황연하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본인은 주의를 위로부터 보고들은 바, “의리를 주장하여 의리로 살고, 의리로 밥을 먹고, 의리로 옷을 입고, 의리로 죽는다는 말씀과 오운으로 하여금 운수도 변천되고, 이치로도 만물도 다시 고쳐 정하니, 의(義)도 다시 정한 인심을 다시 고쳐 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 이상에 연원이 무엇이며, 천주 아무개가 다 무엇이란 말이냐?” 하는 말을 들으니, 선생님의 본의를 내비친 것이고 의리(義理)가 같지 않은 것은 본받지 않기로 주의가 된 고로 두 가닥이 되었다.

5월 1일의 박상암이 천도교 예산 42대 교구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9월 8일에 구암장은 성사주(聖師主)께서 일본서 나오신 후에 즉시 대도주(大道主)를 완정(完定)하였고 이후 예산교도(禮山敎道)에 내려 오셔서 교구(敎區)를 유지할 방침으로 모든 교인(敎人)에게 매월 백화(百貨) 2푼씩 마련하고 교구가 두 갈래가 된 마음을 하나로 합하게 절목(節目)으로 규칙을 계약하여 책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으나, 제일대의(第一大義)는 관계가 없이 겉으로만 배헌(培憲)의 편(便)을 들어 권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한 마음이 되리오? 양쪽 편의 일이 모두 하나의 올바름을 준행(遵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에 구암장이 각처 예포 관내를 돌아다니며 위로하여 교당(敎堂) 건축할 일로 연조금(捐助金)을 각각 그 정성에 따라 부담하게 조직하고 정미년(1907)) 2월까지 3회로 기한(期限)하였다. 그 후로 의연금(義捐金) 4~5백원이 모아지자 한데 모아서 서울에 유치(留置)하였다.

예산 교구 내에 식산회사(殖産會社)를 설립(設立)하였으며, 또 상공회사(商工會社)를 모집(募集)하여 2백여 원을 서울로 올려보내 유치하였으니, 충남 예포 내에서 교당 건축 의연금으로 담부한 220원을 상공회사 모집금으로 1907년(丁未) 6월에 먼저 상납하고 영수증까지 내려온 의연금이 각처에서 수납되지 못하여서 충분치 못한 고로 회사가 성립하지 못하고, 모임을 피하게 됨으로 각처 주무자(主務者)의 곤혹도 늘어나고 곤란함이 아주 심하였다. 식산회사는 실시가 되어 사무까지 보다가 불과 2년만에 스스로 해산되었다.

주석
공함(公函) 공적인 일에 관하여 주고받는 편지.
일진회와 천도교를 성사(聖師)께서 모두 설립하고 조직하시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국권이 위태롭게 되자 손병희는 정부를 개혁하고 국권을 지키기 위해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을 펼쳤다. 손병희는 1904년 8월 30일을 기하여 전국 동학도인들에게 일제히 머리깎고 물드린 옷을 입고 민회(民會)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 하루아침에 전국에서 이십여만명이 상투를 자르고 전국에 360여 개의 지부를 가진 커다란 정당(進步會)이 조직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머리를 일제히 깎은 것은 봉건정신을 없애버리자는 뜻이고,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은 세계신문화에 적극 참여하자는 것이며,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언론을 일으킨 것은 민권(民權)을 신장(伸長)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이용구, 송병준이 일본에 계시는 손병희 선생을 배신하여 동학의 정당 진보회를 일진회(一進會)에 합동하게 하고 러일전쟁이 끝나자 일진회 이름으로 보호조약을 찬성하는 성명을 내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 개관』, 1970, pp.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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