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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정미년 1월 8일에 천안군 광덕 포중(包中) 전교실(傳敎室)이 갈치리(葛峙里) 곽기풍씨의 집에 있었다. 매 시일(侍日)마다 교인 20여 명씩 참석하였다. 공주 유구리(惟鳩里)에 순사(巡査) 주재소(駐在所)에서 화적당(火賊堂)으로 잘못 판단하여 시일 예식을 시행할 때에 유구 순사 3명이 마곡(麻谷) 등지의 화포군(火炮軍) 수십 명을 소집하여 거느리고 천도교 전교실에 돌입하여 교인을 모두 결박하며 적당이라고 무수히 난타하고 주재소로 붙잡아 가니 교중(敎中) 괴란(怪變)이 이와 같이 크게 일어났다.

본인은 경상도 상주군 화북면(化北面) 장암리 본인 집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조일승(曺一承), 조성옥(曺成玉) 두 사람이 불철주야로 와서 광덕 포중이 화적으로 오해를 입어 체포된 사실을 이야기하는 그 말을 듣고 본인이 즉시 길을 떠나 강원도 배향산(拜向山) 말티 박상암장댁에 도착하여 상암장께 광덕 포중이 화적으로 오해를 입어 체포된 사실을 이야기하니, 그 말을 들으시고 즉시 상암장과 본인이 함께 출발하여 16일에 천안 광덕 접중에 도착하여 전후 사실을 상세히 살핀 후에 예산군 교구로 가서 두령(頭領) 3~4명을 유구 주재소로 빨리 가게 하여 한편으로는 질문하며, 한편으로는 공주군 경찰서까지 심문하였다.

이 사건에 있게 된 근원을 살펴보니 유구리 오지영(吳知泳)이라는 자가 그 마을에 있는 주재소에 근무하는 한창선(韓昌善), 윤영달(尹榮達)의 무리에게 공주, 천안 사이의 갈치리(葛峙里)는 무뢰배가 내왕하는 적굴이라 말하였으므로 순사 3인이 화포군을 이끌고 갈치리 천도교 전교실에 돌입하여 우리 교인을 강제로 협박하며 모함하는 중에 이 마을에 거주하는 주윤(朱允)이라는 교인이 지목한 적이라고 하여 이와 같이 된 일이었다. 주윤이가 죄가 없음으로 광덕 이웃 마을 두민(頭民)과 공주 검천리, 추동리의 두민 수십 명이 주재소와 공주 경찰 서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1월 14일에 서울의 중앙총부(中央摠部)에서 심사 위원에 함흔(咸昕)씨를 내려 보내시니 통역(通譯)에는 김성운(金聖云) 두 사람과 김기태(金基泰)씨 합 세 사람이 천안군 갈치리와 공주 검천리 근동에 가서 이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 가지고 유구 주재소에 들어가 어떠어떠한 일로 우리 교도를 잡아 가두었는지를 질문한 후 위원 2인과 김기태, 송배헌 4명이 공주군 경찰서와 경무관에게 질문하였다. 관리들이 후회하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스스로 고백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책하였다. 위원은 수일 머무른 후 서울로 올라갔다.

1월 28일에 주윤이가 형벌시에 교(敎)의 두목(頭目)을 불기를, 목천군에 있는 이진사(李進士)의 집을 도적질하고 목천 군수(郡守)의 집에서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본인과 곽기풍은 천주교 두목이라는 까닭으로 자수하였다. 본인과 곽기풍씨 두 사람이 공주군 경찰서와 재판관에게 자수하고 들어가 갈치리의 전후 사실을 질문하며 실제 조사한 증거가 목천 군수와 이진사 집에도 증거가 없다고 하는 문서가 도착하여 일이 자세해진 연후에도 순사(巡査) 한창선(韓昌善), 윤영달(尹榮達) 두 사람을 징역에 처벌하라 하고, 본인 등은 교인 주윤이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모함하여 도적이 되었다고 일일이 모두 변명하였는데 서장과 경무관이 법률에 따라 조처함을 말한 후, 본인과 곽씨 두 사람이 공주에서 2월 6일에 길을 떠나 유구 주재소로 가서 주재소장과 담화(談話)하고 빼앗아간 물품을 약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던 주윤이도 그 후 3월 14일에 무사히 석방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가 몇 달 후에 병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정미년 3월 15일에 본인이 천도교 교령(敎領) 첩지(牒紙)를 임명 받았다. 정미년 2월 12일에 상주군 장암리에 본인의 식솔이 이사를 하려 길을 떠나 14일에 목천 말미에 도착하여 빈집에 머물다가 전의(全義) 삼치리(三峙里)에 가대(家垈) 3칸과 밭 2좌(二座) 7두락(七斗落)을 함께 16원에 사고 같은 달 말일에 삼치리로 이사하였다.

정미년 5~6월부터 소위 의병(義兵)이라 자칭하는 무리가 각도 각처 곳곳에서 봉기하고 무뢰배가 가득하였다. 백성에게 해를 끼침이 수가 없음으로 인민(人民) 상해(傷害)가 무수하여 정부와 민간에서 모두 염려가 한이 없었다.

본인이 5월 일에 각 관내를 돌아다니고 25일에 상암장과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수일 머무른 후 6월 2일 해월신사선생의 기도에 참석하고 좌우 형편을 널리 알아보고 포중(包中)에 내려와서 규모를 철석같이 단속하였다. 그 때에 박상암장은 1월 일에 접중에 내려오셨고 상암의 장자(長子) 문규(汶奎)는 예산 교구 금융(金融)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하나 강원도 인심 형편을 탐문하니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라, 배향산 말티 상암댁 소식을 듣지 못하여 염려가 끝이 없어서, 본인이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2~3차 사람을 택하여 보냈으나 배향산 등지로 소위 의병이 대치하여 사방이 적당(賊黨)으로 둘러싸여 혹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재물도 빼앗아 간다는 말을 듣고 지체가 되었다. 9월 일에도 최찬각씨에게 위임하여 보냈으나 안성까지 가다가 흉흉한 소문을 듣고 돌아왔다.

11월에 함한석(咸漢錫)씨와 서로 일이 이미 닥쳐왔다는 말을 이야기한즉 씨가 그 말을 듣고 한 번 다녀오겠노라 하기에 상암장께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11월 2일에 함한석씨가 원주 상암장댁으로 길을 떠날 때에 부상(負商)처럼 석화혜(石花醯) 7~8기(器)와 석어(石魚) 2~3속(束)으로 짐을 매고 그 곳에도 교인(敎人) 10여 호가 있음으로 경고문과 교빙을 지게 등뒤 속에 숨겨주며 그곳 형편을 보아 조처하고 속히 다녀오기를 신신 부탁하고 떠나보냈다.

같은 달 11일에 함한석씨가 강원도에서 상암댁 가족을 이사시키어 천안 금천리 유흥도씨의 집에 오셨다. 상암장 가족 일동이 어려운 일을 당하신 말씀을 세세히 이야기하셨다. 하루를 머무르시고 공주 금천리 이한영(李漢榮)씨의 집을 사서 금천리로 상암댁이 11월 13일에 이사하였다. 14일에 상암장과 본인이 함께 출발하여 예산 교구에 도착하여 교중(敎中) 규모(規模) 조직을 세우고 다음날에 상암댁으로 갔다.

무신년(1908) 3월 10일에 향사 기도를 상암댁에서 봉행하고 11일에 이사하여 신창군(新昌郡) 남하면(南下面) 목동리(睦洞里)로 상암댁이 이사하였다. 정미년 양력 7월 7일 음력 6월 2일에 양위(兩位) 신사(神師)께서 신원(伸寃)되시고 갑자년(1864) 이후로 죽거나 다친 일반 교인(敎人) 수만 인을 다 탕척(湯滌) 신설(伸雪)하신 유지가 특별히 내리셨다.

정미년 12월 19일 양력 무신년 1월 19일에 구암장께서 시천대교(侍天大敎) 대례사(大禮師)가 되시어 천도교의 분석(分席)이 되셨다.

주석
시일(侍日) 천도교에서 일요일 오전 11시에 봉행하는 집회.
두민(頭民) 동네에서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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