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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昌山后人 曺錫憲歷史
일러두기

경술년(1910년) 11월 10일에 문장준씨 장녀(長女)로 혼인을 정하여 본인의 아들 명승(明承)의 혼례(婚禮)를 무사히 치뤘다. 경술년 11월 일에 본인의 가사(家舍)를 팔아 같이 사는 의질(誼姪) 지성영(池成榮)은 본심 성품이 착한 신자(信者)라 본인과 장차 10년을 동거하였는데, 올해는 살림을 나누어 분가하는 차로 그 동네에 초가 4간 집을 25냥에 사 주고 본인 소유의 밭(田) 4두락을 나누어 주고, 살림하던 기구, 쟁기, 곡괭이 까지 다 밀어주고 그곳에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본인의 가대 중에서 남은 돈을 추심하여 이원택(李元澤)의 사시월계전 100냥을 아울러 식리(殖利)하여 보급하라 위탁(委託)하고, 본인은 다만 전 3두락과 논 5승락 이것은 어느 때라도 명승(明承)이 살 집을 살 수 있는 살림 밑천 자본이니 네가 모쪼록 조처하여 달라 부탁하고, 본인 차지 식경 한 개도 유치하고 경술년 12월 26일에 예산군 대술면 엄곡리(嚴谷里) 박인철(朴仁喆)씨 산지기 집으로 이사하였다.

신해년(1911)은 본인의 산에 있는 밭을 일구며 생활을 하였다. 임자년(1912) 1월 2일을 위시하여 참성중과(參聖中課) 49일 공부를 온양군(溫陽郡) 특군평(特軍坪) 전교실 안에서 표정태(表鼎泰), 안세영(安世榮), 최창래(崔昌來), 최경철(崔慶徹), 이용태(李容泰), 서규진(徐奎鎭), 이광우(李廣宇), 조석헌(曺錫憲), 곽기풍(郭基豊), 문장준(文章峻), 이성영(李成榮) 모두 11명 가운데 본인으로 반장(班長)을 정하여 그 과(課)를 준거하였다.

계축년(1913) 12월 13일에 본인의 둘째 딸 계승(桂承)이가 죽었다. 갑인년(1914) 윤5월 6일에 온양 초사리 본인의 큰 딸이 죽었다. 무덤 4평을 정하고 을묘년(1915) 1월 19일에 본인이 예산군 예산면 간량리(間良里) 258번지가로 이사하였다. 이 해에 농사는 가뭄에 밭과 논이 모두 백지(白地)되어 살았어도 죽은 것만 못하게 보냈다.

포덕 57년 병진년(1916) 1월 14일 진시(辰時)에 손자 병철(秉哲)이 탄생(誕生)하다. 동년 11월 14일에 아산군 도고면(道高面) 신유리(新柳里) 본인의 셋째 형님 석훈(錫勳)씨가 돌아가시다.

포덕 59년 무오년(1918) 3월 15일에 본인의 딸아이 열승(列承)의 혼인을 변봉호(邊鳳浩)씨의 둘째 아들 판국(判局)으로 혼례를 무사히 치르다. 동년 9월 9일 사시(巳時)에 손자(孫子) 병련(秉連)이 탄생하다.

무신년(1908) 2월 일에 충남도 대교당(大敎堂) 대정(大正)에 임명되고, 3월 일에 충남부교장(忠南副敎長)에 임명되었다. 경술년 8월 일에 도호(道號) 혜암(惠菴)을 삼가 받고, 계축년(1913) 6월 일 포덕사(布德師)를 받았다. 무신년으로부터 계축년 8월에 이르기까지 6년간을 구암장께 신행(信行)하다가 포덕 54년 계축년(1913) 음력 9월에 천도교 박희인(朴凞寅)씨 앞으로 다시 들어가다.

주석
예산군 예산면 간량리(間良里) 258번지가로 이사하였다.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間良里)는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아산시 도고면, 당진군 합덕면의 접경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간양리에 거주하는 밀양박씨는 초암공파로 약 600여 년 전에 간양리에 정착했으며, 20년 전만 해도 80호 정도가 살았다.
본문을 보면 조석헌은 1915년에, 문장준은 2년 뒤인 1917년에 간양리에 정착하였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인근 도고면 효자리로 이주하였다가 이후 간양리에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태안에서 함선길, 김현덕, 김도섭 등도 함께 간양리로 이주했으며, 이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개천[효자천]변에 붙여 먹을 수 있는 공유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정착 당시 조석헌과 문장준의 효자리 집은 모두 개천변에 있었다.
조석헌, 문장준 등은 효자리와 간양리 일대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많은 고난과 박해를 겪어야 했다. 조석헌은 홍수로 개천변에 있던 집을 잃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늘 어려운 상태에서 살아야 했다. 갑진개혁운동 당시 삭발을 했을 때는 동리주민들에게 조대갈, 문대갈, 함대갈 등으로 놀림을 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밀양박씨 초암공파 종손이자 간양 2구 이장인 박영수(65세)에 의하면, 증조부인 박응하씨가 동학군에 밥을 해주고 동학군을 따라 갔다가 10월 26일 중상을 입고 집에 들어와 사망했다고 한다. 간양리와 신례원 전투지로 알려진 관작리가 지척이고, 관작리 전투일자가 10월 26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박응하는 관작리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박영수씨의 증백부는 “동학군 여러 명을 광[곳간]에 숨겨주고 여러 날 밥을 해 줘서 살려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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