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한공 순절비[義士 韓公 殉節碑]
우리나라에서 의(義)로 손꼽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금산(錦山)도 그 중 한 곳이다. 제봉(霽峰)과 중봉(重峰) 두 선생이 차례로 이 곳에서 순절하여 종사(宗社) 중흥의 기틀을 놓았으며 같은 날 700명의 의사(義士)들이 함께 죽었다. 조정에서 이들을 높이고 후일의 사림들이 ≪결락≫ 300년을 하루 같이 하였다. ≪결락≫ 선비들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지니고 백성들은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후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틀림없이 금산에서 큰 공적이 이룩될 것임을 나는 알겠다. ≪결락≫ 소문을 듣고 항복하여 성을 바치고 응대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성을 버리고 달아나서 감히 저항하여 지킬 작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연히 강회(江淮)의 보루가 된 곳으로 남쪽에는 나주(羅州)가 있고 북쪽에는 금산이 있었다. 금산은 나주보다 성이 더욱 작고 고립되어 있어서 위태로움이 갑절이나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홍규(韓弘圭) 공을 호군감(犒軍監)으로 추대하여 맞섰다. 공의 의기(義氣)는 평소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공은 즉시 사람들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하늘을 이고 임금의 땅을 밟으면서 어떻게 임금을 배반하는 자와 하루라도 함께 설 수 있겠는가? 상황이 궁해지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포사(砲士) 300명, 무사(武士) 700명, 민병(民兵) 수천 명이 눈물을 뿌리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요되는 군량이 끝이 없어서 ≪결락≫ 일을 함께 도모한 정두섭(丁斗燮), 김제룡(金濟龍), 임한석(任漢錫), 참판(參判) 정숙조(鄭䎘朝), 군관(軍官) 정지환(鄭志煥)은 함께 죽기로 약속하고 피를 마시면서 성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진산(珍山)에서 적을 토벌하자 적들은 금산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반드시 ≪결락≫ 하고자 하였다. 적들은 10월 모일에 대대적으로 금산 경내로 쳐들어왔다. 공은 정지환과 정두섭 및 그의 형제, 아들, 조카 등과 함께 진산 경계의 송원치(松院峙)를 방어하며 수많은 적을 죽였다. 전투는 나흘 동안 계속되었다. 적이 병력을 더욱 증강하자 중과부적으로 패하였으며 죽은 자가 64명이었다. 공은 홀로 의자에 걸터앉아 “죽어야 할 때 죽는다면 삶을 돌보지 않는 것이 의리이다”라고 하였다. 큰아들 관성(觀聖)이 잠시 몸을 피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강력히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앞장서서 돌진하며 큰소리로 적들을 꾸짖기를, “나는 죽어서 귀신이 되어 네놈들을 모조리 없앨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정(鄭) 공과 함께 유탄에 맞아 순사하였다. 둘째아들 관덕(觀德)은 유년의 어린나이에 의동(義童) 400명을 통솔하여 복수를 계획하니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아! 공의 의기(義氣)와 책략은 나라의 간성(干城)이 될 만하다. 만약 공이 그날 죽지 않고 지금의 혼란한 모습을 보았더라면 국가부흥의 공적이 반드시 공에게서 말미암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훌륭한 장수를 죽여 구적(寇賊)과 비적(匪賊)을 도운 죄는 비록 ≪결락≫ 죄가 오히려 남음이 있다. 오직 공이 사람들에게 훈계한 몇 마디는 말이 간략하고 의리가 반듯하니 오늘날의 신하와 백성된 자들이 사람마다 그것을 원부(元符)로 삼는다면 국가의 부흥을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를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선비들은 일제히 관리에게 호소하였으며, 관덕(觀德)은 혈서로 경부(京部)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일이 많아서 비천한 말도 들어주시는 하늘같은 임금께서 표창할 길이 여전히 아득하니 사림(士林)들이 일제히 답답해하며 비석을 세워 칭송하고자 하였다. 박승규(朴勝圭) 공이 공의(公議)를 전하면서 명(銘)을 부탁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옛날 임진년의 난리(임진왜란)에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웠으나 끝내 바로잡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 공(公)들이 목숨을 바친 덕택이었다. ≪결락≫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 어찌 지난날 철인(哲人)에 뒤지겠는가? 옛날 말에 한 사람의 죽음이 백만 대군보다 강하다고 하였다. 나는 공의 죽음은 우리나라가 부흥할 큰 소식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공이 사람들에게 훈계한 한 마디는 말이 엄정하고 의리가 반듯하여 지금 사람들이 원부(元符)로 삼을 만하다. 그래서 그 말을 드러내어 돌에 새긴다.
1912년(임자년) 6월 그믐에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지음
덕은(德殷) 송병화(宋炳華) 씀
□문(文) : 고준석(高駿錫), 고제학(高濟學), 김두진(金斗鎭), 곽병규(郭秉圭), 심혁문(沈爀文), 김형식(金衡植), 박승숙(朴勝淑), 신귀석(辛龜錫), 이문용(李文鏞), 박환서(朴煥緖), 양재우(梁在禹), 신익주(辛益柱), 고익상(高益相), 고광승(高光昇), 정상(丁常)□, 김영기(金榮基), 김학수(金鶴洙), 정희방(丁羲方), 서문(西門)□, 한태영(韓泰永), 전기성(全基成), 박재서(朴在緖), 신원석(辛元錫), 김난식(金蘭植), 이병철(李炳喆), 한철영(韓喆永), 박찬우(朴贊禹), 길기순(吉基淳), 조인원(趙仁元), 엄한상(嚴漢尙), 김(金)□중(仲), 박기섭(朴基爕), 양효순(梁孝淳), 이상식(李尙植), 장재호(張在浩), 이진수(李鎭洙). 동역(董役) 박승규(朴勝圭), 양재문(梁在文), 고현상(高賢相), 정지환(鄭志煥), 이은기(李隱基). 찬성(贊成) 각 면 면장(面長) 김한근(金漢根), 김예흠(金禮欽), 박노원(朴魯源), 이면배(李勉培), 박규양(朴奎陽), 박찬경(朴贊敬), 길응수(吉應守)
19년 후인 1912년(임자년) 9월 일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