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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초토사 이공 비[招討使李公碑]

신례원(新禮院)에서 전사한 중군(中軍) 김병돈(金秉暾)과 영관(領官) 이종욱(李鐘旭)
1895년 5월 일 고북면(高北面)에 세움
한기경(韓基慶) 나이 16 세 주홍섭(朱洪燮)
주영섭(朱永燮)

공의 이름은 승우(勝宇)이며 공정한 서리(循吏)로서 이름이 났다. 동적(東賊, 동학농민군)이 기승을 부릴 때 관찰사(道帥)와 주군(州郡)의 수령들은 두려워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여 방어를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하여 홍주(洪州)를 지키도록 하였다. 홍주는 새로 난리 때문에 파괴가 되고 있었다. 공은 홍주에 도착하자 관리와 백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굳은 결의를 표출하며 엄하게 신칙하였다. 군량을 모으고 성곽을 튼튼히 쌓았으며 2명의 대적(大賊)을 처형하여 홍류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다. 곧이어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자 내호(內湖) 7개 고을의 백성들이 번갈아 묘당(廟堂)으로 달려가서 공이 못가도록 만류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온화한 하유(下諭, 임금의 명령)와 절부(節斧)를 하사하시고 작질(爵秩, 작위와 녹봉)을 높여서 초토사(招討使)를 겸임하여 편의에 따라 상벌을 행사함으로써 내호(內湖)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도록 하셨다.
공이 죽음으로써 지킬 각오를 보이자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 적들은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의 수령을 죽이고 이르는 곳마다 겁탈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공은 재빨리 남은 군사들을 내려 보내어 광천(廣川)의 적을 토벌하면서 적이 강한 홍수가 몰아치는 것과 같이 올 것을 걱정하면서 목시(木市)와 합포(合浦)에서 적을 무찌르자, 적들은 신례원(新禮院)으로 달아났다. 장수와 병졸들은 홍주에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사기가 높아 의롭게 죽기를 원했다. 적의 무리 수만 명이 홍주성에 육박하자 공은 의로움을 머금고 고립된 성과 존망을 같이 할 것임을 맹서하였다. 적들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산골짜기로 퇴각하였다. 공은 저들의 우두머리를 죽이면서 그 무리들은 귀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홍주의 남녀 백성들은 환호하고 춤을 추며 공의 노고를 칭송하면서 비석을 세웠으며 그 비석의 말은 다음과 같다.
비석의 글에 이렇게 말하였다. ≪결락≫ 홍양(洪陽)의 재앙은 홍수보다 심하였다. 이를 바로 잡지 않았다면 홍주 백성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보아 주셨다. 신과 함께 계획을 세워 공이 살려주셨다. 너의 미혹함은 이미 깨달았으며 나의 위태로움도 안정되었네. 백성들이 길이 의지함이 마치 태산이나 반석과 같도다. ≪결락≫

주석
내호(內湖) 충남 내포지역으로 홍주·예산·서산 등지를 말한다.
절부(節斧) 절부월(節斧鉞)를 이름. 관찰사나 대장(大將)·통제사 등이 지방에 부임할 때에 임금이 내려 주던 물건이다. 절은 수기(手旗)와 같이 만들고 부월은 도끼와 같이 만든 것으로, 군령을 어긴 자에 대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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