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의비[七義碑]
≪앞면≫
칠의비(七義碑)
≪좌측면≫
옛날에 난공자(欒共子)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를 논하여 말하기를, “오직 그 처해 있는 바에 따라 죽음을 다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만세(萬世)의 스승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하거늘, 하물며 재생(齋生)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오경근(吳景根)·최민지(崔敏志)·방세응(方世應)·방석규(方錫奎)·이준복(李準馥)·서종득(徐宗得)·최학신(崔學信)은 홍양(洪陽, 홍주) 사람으로 공자묘(孔子廟)의 서재생(西齋生)이었다. 지난 갑오년(甲午年, 1894) 동학의 비적(匪賊)들이 군성(郡城)에 들이닥쳐 제멋대로 분탕질을 하자 일곱 사람은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적(賊)들은 흉악한 짓을 닥치는 대로 하고 있으니 우리 성묘(聖廟)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들은 재생(齋生)이므로 성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집안 식구들과 이별하고 성묘로 들어가서 문을 단단하게 걸어 잠그고 두건과 의복을 정제하고서 문 밖에 늘어서서 지켰다. 그러자 과연 적들이 이르러서 문을 열라고 요구하였다. 대표가 “성묘는 존엄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나머지 여섯 사람도 마찬가지로 말하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러 적들은 위협하여도 어쩔 수가 없게 되자 어지러이 흉기를 휘둘렀으며 모두 불태워 죽이고 떠났다. 이때 성묘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곱 사람들의 힘이었다.
아! 슬프다. 이 일곱 사람은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었다. 그러나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복암(復庵) 이공(李公, 이설)은 “유복(儒服)과 유관(儒冠)을 착용하고 죽어서도 반듯함을 잃지 않았네”라고 하였으며, 위관(韋觀) 김공(金公)은 “보잘것없는 선비들이 스스로 우뚝 섰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정확한 지적이다. 주자(朱子)는 산승(山僧)과 위사(衛士)의 죽음도 모두 표창하였다. 세상에 동쪽 나라의 춘추(春秋)를 쓰는 사람이 있어서 이 일곱 사람들의 일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대서특필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그들이 죽은 지 이미 4년이 지났음에도 군내(郡內)의 모든 사람들은 이 일을 언급하면 바로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하니 사람을 깊이 감화시키는 대의(大義)가 아니라면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직원(直員) 이장로(李莊魯)와 여러 장의(掌議)들이 협의하여 경내(境內)에서 재물과 노력을 출연(出捐)하여 비각(碑閣)과 비를 세우려고 하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 여러 사람들이 나 준환(俊煥)이 군수의 위치에 있으니, “한 마디 말을 지어 명(銘)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런 인물이 못 되지만 이미 그들의 의(義)를 사모하였으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이상과 같이 그 대강을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붙인다.
아. 위대하구나! 일곱 재생(齋生)이여,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큰 법도(大經)를 밝혔구나. 눈과 귀를 밝게 들어 단청(丹靑)을 비추며, 백년을 내려가도 사라지지 않으리라. 아. 위대하구나! 일곱 재생이여.
홍성 군수(洪城郡守) 종6위(從六位) 훈6등(勳六等) 하준환(河俊煥) 지음.
전성인(全城人) 이장로(李莊魯)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