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충단서[慕忠壇序]
옛 말에 이르기를, “충성과 공렬은 백세 뒤의 사람들도 감동하여 사모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그것을 기리고 장려하여 은덕을 갚고, 아래에서는 제물을 마련하여 향사(享祀)를 지내는 것은 실로 인간의 타고난 마음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권장하는 일이다. 지난 갑오년(甲午年, 1894년)에 나라에 어려움이 많았으니, 팔도가 동요하고 양호(兩湖)가 들끓어서 예측하기 어려운 화란의 조짐이 코앞에 닥쳤다. 이에 영관(領官, 청주 진남영) 염도희(廉道希)씨가 그의 부하 의병 70인을 데리고 험난한 전장에 뛰어들어 결국 목숨을 버렸다. 아, 애통하지 않은가! 군영(軍營)의 동료 전우들이 의논하여 의로운 마음을 일으켜서 당산(唐山, 청주향교 옆, 현 충북도청 뒤)의 고개에 제단을 설치하고 지난날 영청(營廳, 진남영)에서 마련한 계(契)의 재물을 향사(享祀)의 자금으로 삼아 충절의 영혼을 달래었다. 그러나 일을 처음 시작하는 탓에 의례(儀禮)에 빠진 부분이 많았다. 길 가는 사람들이 한탄하고 사림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여러 차례 부(府)에서 아뢰어 특별히 직함(職銜)을 추증받는 은전(恩典)을 입었다. 또 모충(慕忠)이라는 제단의 이름도 하사받았으니, 참으로 일대의 드문 은전이요 나라의 광영이다. 그러나 제단의 향사에 드는 제반 비용이 부족함을 한탄하여, 전 참령(前參領) 윤영성(尹泳成)씨와 몇몇 동지들이 다시 모충(慕忠)이라는 계(契)를 만들어 비용을 보탬으로써, 국가가 그들의 공로에 보답한 은전과 사람들이 그들을 사모하고 흠앙하는 정성을 계속 지켜 여한을 없애고 길이 후세에 할 말이 있기를 바랐다. 우리 모든 구성원들이 한마음으로 이러한 정신을 준수하여 시종일관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말세(末世)의 세도(世道)를 부식(扶植)하는데 일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 융희(隆熙) 2년(1908년) 11월 일
청주인(淸州人) 곽치중(郭致中)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