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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모충사 전망장졸씨명록
일러두기

모충사실기[慕忠祠實記]

대저 사람이 충절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그를 사모하고,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그를 사모하면 그 충절을 드러내어 밝혀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본 주(本州, 청주)는 충청병영(忠淸兵營)으로 개국 490년 정해년(丁亥年) 가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홍재희(洪在羲, 홍계훈) 공이 병영의 청사를 창건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부대에 기강이 있어 임금께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듬해인 무자년(戊子年, 1888년) 봄에 특별히 왕명이 내려 병사들을 불러 올려 살펴본 뒤에, 진남영(鎭南營)의 영호(營號)를 하사하시고 제반 군제(軍制)를 경사(京師)의 각 영문(營門)의 조례에 따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인 갑오년(甲午年, 1894년) 봄에 각 도(道)와 각 군(郡)의 탕자(蕩子)와 난류(亂類)들이 동학(東學)이라 일컬으며 곳곳에서 봉기하여 팔도가 들끓었는데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가 특히 심하였다. 종국에는 공주(公州) 땅 대전(大田) 들에 수만의 무리들이 날로 창궐하여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그래서 임금께서 밤낮으로 근심하시어 해산하도록 효유(曉諭)하라는 윤음(綸音)이 본영(本營, 진남영, 청주병영)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영관 염도희씨가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와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 두 사람과 함께 부하 병졸 70인을 데리고 그 지역으로 출진(出陣)하여 한편으로는 성지(聖旨)를 효유하고 한편으로는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저들은 끝내 해산하지 않았다. 영관과 장졸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당장 무력으로 치고자 하였으나 윤음의 내용을 봉행하느라 가까이 다가가서 효유하다가 점차 위험한 지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장졸 73인이 결국 일시에 목숨을 버렸으니 그날은 바로 10월 3일이었다. 그 분통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같은 해 11월 중에 의정부(議政府)에서 본주(本州)에 훈령(訓令)을 내려 당시 목사(牧使) 임택호(任澤鎬)씨로 하여금 본주의 남교(南橋, 청주 남석교) 바깥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인 을미년(乙未年, 1895년) 이후에 특별히 은전을 내려 경성(京城)의 남산 아래 장충단(奬忠壇)에서 경향 각 영(營)의 전사한 장수와 병졸들을 함께 배향(配享)하였으니, 본영에서도 향사를 빠뜨릴 수 없었다. 병영을 설치한 초기에 일반 장수와 병졸들이 각자 돈과 재물을 내어서 설립한 계(稧)에서 약간의 자금을 마련하여 청주군 남일면(南一面)의 각 동(洞) 등지에 논 5섬지기를 이미 매입한 바 있었는데, 병영의 동료들이 충절을 표창하는 뜻에서 그 논을 영구히 제사용으로 부속시키고 거기에서 거둔 수확을 매년 향사의 경비로 사용하여 순절한 당일에 남교(南橋) 밖에 나아가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계묘년(癸卯年, 1903년) 봄에 도내의 사림(士林)들이 본영의 전사한 장졸들에게 은전이 내리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본 진위대(鎭衛隊)에 글을 올렸다. 이에 당시 대대장(大隊長) 안종환(安宗煥)씨가 부하 장교와 의논하여, 이러한 충절이 감추어져 표창되지 아니 함을 한탄하고 군부(軍部)에 보고하였다. 그러자 군부에서는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전사한 장교에 증직(贈職)을 내리고 모충단(慕忠壇)의 단호(壇號)를 하사하셨으며, 또 제사비용으로 1,700냥을 지급하였다. 그래서 매년 제사비용의 나머지를 여기에 보태어 본 고을의 동쪽 산록인 당산(唐山)의 남쪽에 제단과 담장만을 설치하였다. 그 후 대대장 박정환(朴晶煥)씨가 근무할 때 본 부대의 특무정교(特務正校) 이원하(李元夏)씨가 부대의 병졸들과 의논하고 대대장에게 아뢰어서, 병졸 이하의 금전 150원을 모금하여 다시 전사한 장졸의 기념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리하여 충절을 사모하는 일이 점차 진전되었다.
아! 광무(光武) 11년 정미년(丁未年, 1907년) 6월에 서울과 지방의 군대가 갑자기 해산되자 본 부대의 500명의 장졸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여러 군수품을 군부로 일일이 실어 보낼 적에 모충단 제향전답의 문서가 그 가운데 섞여 들어갔다. 전 장졸 곽치중(郭致中)과 김순택(金順澤) 등 5인이 향사를 빠뜨리게 될까 걱정하여, 전 참령(前參領) 윤영성씨를 위원으로 추천하고 유족 임병윤(林炳潤)을 대동하여 상경하여 전답의 내력과 향사의 중요성을 군부에 알리도록 하였다. 그 결과 군부에서 비로소 이를 깨닫고 전답문서를 도로 내어주었다. 윤영성씨가 내려 온 즉시 전직 군인과 일반 유족 등이 계(稧)를 설립하고 그 이름을 모충계(慕忠稧)라고 하였다.
그 후 갑인년(甲寅年) 가을에 과거 향사비용으로 쓰고 남은 금액 450원을 모아서 당산(唐山)의 단 위에 모충사(慕忠詞)를 건축하고, 동시에 당시의 회계(會計) 한성하(韓聖夏)에게 위임하여 감독토록 하였다. 이 모충사의 창건은 향사를 영구히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전답도 계속 유지해나갈 방침이다. 향사를 봉행하는 예절은 계(稧)의 책자 가운데 기재되어 있으니, 이를 영구히 시행하여 바꾸지 않는다면 모충(慕忠)이라는 명분과 의리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융희(隆熙) 2년(1908년) 월 일
강릉(江陵) 후인(後人) 전 부교(前副校) 유종국(劉鍾國) 삼가 지음
경주(慶州) 후인(後人) 전 특무정교(前特務正校) 김동식(金東植) 삼가 씀

<번역 : 장승현>

주석
개국 490년 정해년(丁亥年) 개국 490년은 1881년이고 정해년은 1887년으로 서로 어긋나나 아래에 무자년(戊子年)이 그 이듬해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해년이 맞는 듯하다.
진남영(鎭南營)의 영호(營號) 1893년 지방군대를 친군영(親軍營)으로 개편하고 청주에는 충청도 방어군인 진남영을 설치해서 충청병영에 소속시켰다.
공주(公州) 땅 대전(大田) 1894년 9월 말경 진남영의 군사 73명이 농민군을 토벌하려 공주 관할인 대전(한밭, 오늘날 대전광역시)에 출동했다가 몰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진위대(鎭衛隊) 1897년 지방군대를 다시 개편해서 이 이름을 붙였는데 군대해산 당시까지 유지되었다.
갑인년(甲寅年) 갑인년은 1914년이나 아래에 나오는 이 글의 작성일자는 융희(隆熙) 2년(1908년)으로 착오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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