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나라에 어려움이 많아 변고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전에 망명하였던 4명의 흉적들이 왜병(倭兵) 수만 명을 데리고 기내(畿內)로 돌입하여, 한편은 사대문 밖과 남산 아래의 여러 곳에 보루를 쌓았으며, 한편은 광화문(光化門)으로 곧장 들어가서 무수한 왜병들이 궁궐의 담장을 에워싸고 정원의 나무들을 베어다가 여러 궁궐의 마당가에 쌓아두고 사흘 밤낮을 으르렁거리며 나가지 않았다. 이때 임금은 겨우 약간의 시위(侍衛)만을 데리고 밤에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가 몰래 러시아 진영으로 옮겨갔다. 왕후는 창황 중에 도피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몇몇 궁녀들은 왜이(倭夷)들에게 겁탈당하였고, 왕후도 왜이의 칼날 아래 승하하였으며 시신의 행방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왕후를 모시던 많은 내관과 궁녀들도 태반이 죽었으며, 궁궐을 지키던 많은 관리와 하인들도 칼에 찔려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이때 칼날이 허공에 번쩍이고 총성이 땅을 뒤흔들었으며 구름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화염이 하늘에 이어졌으며 함성은 우레와 같았고 살벌하기는 번개와 같았다. 장안의 백성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데리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하늘을 원망하여 부르짖으니 그 소리에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당시의 변란을 고찰해 보면 그것이 운명이던가?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신령은 눈물을 머금었다. 이때는 바로 개국 503년, 현 임금 31년 갑오년(甲午年, 1894) 6월 모일이었다.
각설하고, 정승 김홍집(金弘集)과 판서 어윤중(魚允中), 유길준(兪吉濬) 등은 관품이 1품∼2품에 이르는 데다 대대로 국록을 먹었으면서 무엇이 부족하였던가? 이들은 12월에 4명의 흉적과 결탁하여 왜병과 함께 곧장 궁궐로 들어가서 임금을 협박하고 백관들을 핍박하며 전교(傳敎)를 가탁하여 단발령(斷髮令)을 내렸다. 그리고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에게 거짓 조서(詔書)를 내려 그를 초패(招牌)하고는 바로 그를 위협하였으며, 임금을 심하게 핍박하여 스스로 단발을 하도록 함으로써 단발령을 용이하게 실시하고자 하였다. 왜병들을 기내(畿內)의 방곡(坊曲)에 두루 배치하여 위로는 관작을 가진 자부터 아래로는 여항의 하인들까지 모두 위협하니 수많은 백성들이 어느덧 바리때 없는 중 꼴이 되어버렸다. 이때 곡성이 진동하고 원망과 하소연이 하늘에 닿았다. 저들 3명의 역적들이 임금을 미혹시켜 원망이 백성에게까지 미친 것은 비록 옛날의 진회(秦檜)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밝은 하늘이 조용히 미워하고 귀신이 암암리에 모해하여 저들 3명의 역적 가운데 김홍집은 결국 거리에서 주륙되었고, 어윤중은 도피하던 중 용인(龍仁)에서 피살되었으며, 유길준은 왜병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천도(天道)가 여전히 쇠퇴하지 않았으며 귀신도 진실로 신령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에 재앙을 초래하고 다른 나라의 군사를 끌어들여 임금을 위협하고 왕후를 죽인 것은 오로지 이 3명의 역적이 벌인 일이었다.
이때 팔도의 백성들은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행동은 더욱 안절부절못하였다. 300여 년 동안 남쪽의 일본을 돌아보고 이를 갈던 분한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일제히 폭발하여 도리를 지키는 선비들이 곳곳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경기도에서는 광주(廣州)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수만 명의 군사들이 한 달 동안 진을 치고 있었으나, 주장(主將)의 미흡한 계책 때문에 중군(中軍)의 간계로 관군의 기습공격에 크게 패하였다. 남은 잔당 80여 명만이 겨우 수령을 호위하여 영남으로 내려갔다. 거기에서 영해(寧海), 영덕(盈德), 청하(淸河), 경주(慶州) 등 여러 고을의 주민들을 두루 회유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군대의 위세가 점차 웅장해지고 무기와 군량도 모습이 갖추어졌으나 끝내 경병(京兵)의 기습으로 총에 맞은 자가 몇 천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여러 군(郡)을 모두 함락하고 성곽을 불태웠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흩어진 백성들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충청도에서는 제천(堤川)에서 처음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났으며, 단양(丹陽), 영춘(永春), 청풍(淸風), 충주(忠州) 등 여러 고을에서 한꺼번에 호응하여 제천의 의병과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그 장병들의 숫자가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군사들이 제대로 훈련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인근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군량을 강제로 할당하고 군졸들을 보내어 성화와 같이 독촉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 백성들을 군중(軍中)으로 잡아와서 가두고 때렸으니, 그 괴로워하는 모습과 원망하는 소리를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때려죽이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눈을 흘기고 보복하는 것을 스스로 능력있는 일로 여겼다. 그러므로 당시의 이 거사는 의거(義擧)가 아니라 패거(悖擧)였다. 이들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관군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궤멸하여 흩어졌다.
강원도에서는 강릉(江陵), 영월(寧越), 평창(平昌) 등의 여러 고을에서 동시에 일어나서 군사 1만여 명이 모였는데, 그 날뛰는 모습이 오히려 제천보다 더욱 심하였다. 이들 역시 경병의 공격을 받고 일제히 패하여 달아났다. 흩어진 졸개들 중에 몇몇 부랑배들은 산촌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물러가면 요로를 지키면서 행인들의 재물을 빼앗고 관군이 나타나면 산골짜기로 숨었다.
경상도는 조령 아래의 7개 고을인 풍기(豊基), 순흥(順興), 영천(榮川), 봉화(奉化), 안동(安東), 예안(禮安), 예천(醴泉)이 제천 소모장(堤川召募將) 서상렬(徐相烈) 등의 압력을 받아 각자 군사들을 모집하여 그 고을에 웅거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고, 마을에서 약간 여유가 있는 집에 군량을 강제로 할당하였으며, 군사들을 사방에 배치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상황을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때 임금께서 해산을 권유하는 조칙을 거듭 내렸으나 대부분은 깨닫지 못하고 갈수록 더욱 날뛰며 끝내는 왕명을 거역하였다.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근심하시다가 부득이하여 각처로 군사를 파견하였는데, 사신(使臣) 조윤승(曺潤承)은 명을 받고 영남으로 파송되었다. 그 칙문(勅文)은 아래와 같다.
아! 백성들은 모두 짐의 말을 들으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아껴야 할 것이 백성이 아니겠는가?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니 중시해야 할 것이 나라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지금 너희 사민(士民)들은 모두 선왕의 유민(遺民)이며 또한 고가(古家)의 세족(世族)이다. 더구나 교남(嶠南)은 평소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졌다. 암송하는 것이 모두 옛 성인과 선왕의 가르침이며 익히는 바가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가 예의(禮義)가 귀함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으니 우리나라가 예의로서 천하에 으뜸인 까닭이 바로 교남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더욱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다만 짐이 덕에 밝지 못하고 다스림이 뜻에 맞지 않아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갑오년(甲午年, 1894) 이후 안으로는 간당들이 화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원수의 나라가 난을 야기하여 급기야는 임금을 위협하고 왕후를 살해하여 시신을 훼손하는 변고가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사민(士民)들이라면 팔뚝을 걷어붙이고 가슴을 치지 않을 이가 누구이겠는가? 그래서 너희 추로의 고장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경서(經書)를 던지고 따비를 버리고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음으로 뛰어들었으니, 그 충분(忠憤)의 격발함과 속마음의 동일함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의리는 가상하나 형세상 실로 어찌할 수가 없었으니, 역적들은 토벌하지 못하고 한갓 민심만 혼란하게 하고 원수를 갚지는 못하고 짐에게 걱정만 끼쳤다.
그래서 작년 섣달 28일에 애통의 조서(哀詔)를 내려 경병을 소환하였고, 의병들에게 물러가라고 효유하였으나, 너희들은 끝내 해산하여 돌아가지 않았다. 그 뒤 윤지(綸旨)를 연이어 내리고 선유사(宣諭使)를 거듭 내려 보냈으나 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죄를 범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조칙을 헐뜯어 선유사를 위협하고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마음대로 죽이며 관아의 재물을 가져가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니, 이것이 어찌 의로운 자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명목상으로는 의(義)를 내세우나 행동은 의롭지 못하니, 이는 바로 연전의 비도(匪徒)들이 남긴 습속이다. 그래서 부득이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무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너희들 모두는 짐의 적자(赤子)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여 항상 그가 살기를 바라며 자식을 미워하더라도 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지금 적자에게 총칼을 들이대니 부모된 자가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이 때문에 음식이 달지가 않다. 근래에 듣건대, 전후의 조칙(詔勅)이 모두 당시의 관찰사와 수령들에 의해서 계류되고 선유사들은 주저하면서 두려워 피하고 한 번도 직접 효유하지 않았다고 하니, 너희들이 지금까지 해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오로지 상하의 의사가 서로 소통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이렇게 소요가 진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 짐이 너무나 우매하여 너희들을 편안하게 안도시키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다시 무력을 행사하겠는가? 이에 신하 조윤승에게 명하여 너희들을 선유(宣諭)하고 즉시 경병을 철수시키도록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두 짐의 말을 잘 알아듣고 돌아가서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각자의 본분을 편안하게 여기도록 하라. 지금 농사일에 힘써야 할 때에 농토를 버리고 줄곧 야전을 돌아다닌다면 가을의 수확이 없을 것은 분명하다. 그때는 돌아가고자 하더라도 조금의 저축도 없어서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니 또 어디로 가겠는가? 나아갈 곳도 물러날 곳도 없어서 그로 인하여 날뛰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도록 한다면 부득이하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오로지 위무에만 치중하던 지난날과는 다를 것이다. 너희들은 각자 지금 해산하고 돌아가도록 하라. 이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잘 알 줄로 여긴다.
각설하고, 남으로 내려온 1,000여 명의 관군이 먼저 진주(晉州)에 도착하니 의병은 자신들이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배를 타고 도망갔는데, 성내의 남녀노소 백성들도 같은 배에 싣고 갔다. 이때 관군들이 사방에서 요로를 에워싸고 일시에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졌으며 그로 인해 촉석강(矗石江)이 붉게 물들어 흐르지 않았다.
안동에서는 관군 수백 명이 밤을 무릅쓰고 돌입하여 성에 불을 놓으니 불빛이 하늘에 닿고 주민들이 모두 흩어졌으며 총성이 진동하였다. 천여 명의 의병들은 놀라서 간이 떨어져 한 발도 응사하지 못하고 즉각 달아나 흩어졌다. 이때 주민들 가운데 노약자로서 총에 맞아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다. 이른바 의병장이라는 자는 평소 병법에 어두운 데다가 비상시에는 단지 물러날 줄만 알았지 진격할 줄은 몰랐다. 이런 사람을 장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불쌍하게도 저 무고한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것이 운명인지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예천에서도 관군 백여 명이 새벽에 돌입하여 몇 차례 총을 쏘자 의병들은 한 발도 응사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호중(湖中)으로 달아났으며 흩어져 도망간 주민들도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의성, 예안, 봉화에서도 몇몇 패잔병들이 관군의 기습을 받고 죽었으며, 풍기, 순흥, 영천(榮川)에서는 안동과 예천 고을의 소식을 듣고 관군에 대응할 계책을 세워 3개 고을의 부대가 풍기의 남한평(南漢坪)에 모였는데 장병들의 숫자가 수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때 제천과 예천 두 고을의 부대도 이 고을에 합류하니, 5개 고을의 병마가 도합 4천 명이나 되었다. 이때는 바로 병신년(丙申年, 1896) 4월 29일이었다.
그 고을의 시장에 있던 부대는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해는 어느덧 신시(申時, 오후 3∼5시)가 되었다. 이때 관군 80여 명이 갑자기 군(郡)의 남쪽 산기슭 아래에 와서 머물다가 얼마 후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니, 검은 옷(관군의 복장)이 들을 가득 메우고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그러자 이른바 제천과 예천 두 고을의 의병들은 즉시 강동(江東)으로 달아났으며, 다만 이들 3개 고을의 의병들만 몇 차례 응사하다가 상황이 불리함을 알고는 역시 달아났다. 4,000명의 많은 무리가 80명의 적은 수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들 무리들의 거사가 참으로 의로운 것이라면 어찌 오합지졸들의 거사와 같았겠는가? 다른 나라가 알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
대개 군사라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 인명을 구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것으로, 그 요체는 5 가지이다. 첫째는 민심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고, 셋째는 자신을 알고 적을 아는 것이고, 넷째는 식량과 마초를 비축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향리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도리를 지키는 선비들이 만약 위태로운 국가를 구하고 악한 자를 징벌하려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의리를 표출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당시에 일을 주도하였던 자들은 거의 모두가 과거 책상에만 앉아 있던 우활한 유자(儒者)나 나무꾼들이었다. 이들은 단지 경전과 역사책만 읽었기 때문에 군사를 운용하는 방면에는 평소 무지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갑자기 오합지졸을 모아 이름이 드러나기만을 바라고 적을 토벌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으며, 민심을 선동하여 도리어 국가에 근심을 끼쳐서, 관군에게 주륙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도(匪徒)의 오명까지 뒤집어썼으니 어찌 안타깝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이때 선유사 조윤승이 왕명을 받들고 남으로 내려와서 한편으로는 의병들을 초유(招諭)하고 한편으로는 각 고을에 관문(關文)으로 신칙(申飭)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하의 의리는 무궁하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알기는 어렵다. 만약 시의에 맞지 않는다면 의리가 아니다. 그래서 ‘의(義)는 적의함(宜)이다’라고 하였다. 교남(嶠南)이 평소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진 것은 의리를 분명하게 아는 점이 다른 도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의병을 일으킨 거사는, 일으킬 만하여 일으켰으면 그것은 의이며, 해산할 만하여 해산하였으면 그것도 의인 것이다. 그러나 일으킬 만하지 않은데 일으킨 것이 과연 의이며 흩어질 만한데 흩어지지 않은 것이 과연 의이겠는가? 아! 최근 국가의 일들을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망극한 변고가 거듭 발생하여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남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니, 의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도 토벌하여 복수하지 못하고 도리어 임금에게 근심만 끼쳤으며 또 백성들에게 혼란만 조성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행동이며 이것이 무슨 고집인가? 더구나 이 교남의 사대부들은 모두 옛날 성인(聖人)과 철인(哲人)의 후예들인데 지금 이런 행동을 하니 안타깝지 않은가?
그리고 저 의병은 나라가 비록 위급하더라도 초유하고 소모(召募)하는 조령(詔令)이 없으면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애당초 소모의 명령이 없었는데 마음대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해산하라는 조칙을 거듭 내렸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니, 이들이 과연 평소 선정(先正)과 선철(先哲)의 가르침을 익힌 자들인가? 영남의 사대부들을 위하여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거듭 효유하였는데도 해산하지 않고 왕명을 거역하려고 하므로 무력을 동원하였지만 이것이 어찌 우리 임금께서 바라는 바이겠는가? 부득이하여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선유(宣諭)하도록 명하셨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여 신하된 자들이라면 이것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본관 또한 한 사람의 고루한 유자(儒者)로서 비록 재주는 비천하지만 전일에 의병을 일으킨 도리와 오늘 마땅히 해산해야 하는 도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명을 받들어 남으로 내려오니 성읍은 텅 비고 민호(民戶)는 황량한 것이 참혹하여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이것이 과연 너희들이 바라던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너희들은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무리를 이루어 산골짜기에 숨어 지내면서 힘없는 백성들을 약취하고 관군이 오면 몸을 숨기고 관군이 물러가면 모습을 드러내니 나랏일에 무슨 대의(大義)가 있으며 산골짜기에 무슨 큰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임금께서는 너희들을 의병으로 대우하려 하나 너희들은 도리어 기꺼이 역적의 무리임을 자처하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경군(京軍)은 이제 철수한다. 여러 가지 안정대책은 칙서(勅書)에 갖추어져 있다. 원컨대 너희들은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듣고 함께 칙서를 읽으며 손을 마주 잡고 서로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서 각자 안정을 찾음으로써 우리 임금이 돌보시는 뜻을 체득하고 본관의 조그마한 정성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시의적절한 의리가 아니겠는가? 각자 잘 알아서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개인적인 원한으로 마음대로 죽이는 일이 있거나 이번 효유로 해산한 뒤에 복수를 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은 안집하는 법을 해치는 것이다. 그것을 범한 자는 먼저 처벌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뜻[先斬後啓]으로 방곡(坊曲)에 게시하라.
이후로 여러 고을에 두루 효유하니, 그 신칙한 내용과 직접 효유한 말들이 이처럼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각 고을의 의병들은 각자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고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대개 이번 의거는 전적으로 복수심에서 말미암았다. 각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은 타고난 천성을 지키고 있지 않은 자가 없었다. 군사(軍事)는 위기 상황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선비들은 평소에 단지 경전과 역사책만을 익히는데 힘쓰고 병서는 전혀 알지 못하며, 또 깃발, 북, 피리 등을 사용하거나 일어나고 앉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전투시의 동작법 등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패하였다. 그리고 일본을 복수하는 것은 나라의 큰 힘으로도 상대할 수가 없어서 예전처럼 계속 침묵하고 있는데, 하물며 제대로 체계도 갖추어지지 않은 저 의병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형세를 보존한 것(保形, 상투를 지키는 것)으로 말한다면, 만약 의병의 거사가 없었다면 동쪽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단발(斷髮)의 화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