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甲午)
1894년 봄 호서와 호남에서 무리를 조직하여 전라도 고부(古阜) 등지에서 대회를 열어 마침내 고부를 함락하고 이어서 전주(全州)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섬멸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들 세력이 점차 자라나서 충청과 전라 양도로 뻗어나갔다. 이들은 종종 무기를 훔치고 사대부를 욕보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금지할 수 없었다.
본군(本郡)에서는 이른바 최맹순(崔孟淳)이란 자가 본년 3월에 소야(蘇野) ≪예천군의 서쪽5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에서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보은의 동도들과 상통하여 스스로 관동수접주(關東首接主)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무리들을 불러 모아 부서를 정하고 이른바 접주(接主)·접사(接司)·봉령(奉令)·교수(敎授)·대정(大正)·중정(中正) 등을 임명하였다. 그 접(接)은 법소(法所)라고 하였고, 그들끼리는 도인(道人)이라고 불렀으며, 무리를 모집하는 것을 포덕(布德)이라고 하였다.
원래 최맹순은 여러 해 동안 옹기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으며 그의 무리들은 모두가 사방에서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는 무뢰배들이었다. 이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침탈을 일삼다가 6월에서 7월 사이에 그 세력이 매우 커져서 마을을 횡행하며 포덕을 한다고 하면서 속여서 꾀어내고 협박하니 여기에 가담하는 자들이 날마다 수 천을 헤아렸다.
이에 접소(接所)를 분설(分設)하여 각 면의 방곡(坊曲)에 접소가 없는 곳이 없었으나 서북(西北)의 외지(外地)가 특히 심하였다. 대접(大接)은 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소접(小接)은 수십, 수 백명이었다. 시정(市井)의 동혼(童昏)·평민·노비·머슴 등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득세한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관장(官長)을 능욕하고, 사대부를 욕보이고, 마을을 겁략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무기를 훔치고, 남의 나귀와 말을 몰고 가고, 남의 무덤을 파헤쳤다.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하여 묶어놓고 구타하였으며 종종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러니 인심이 흉흉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경내의 사대부들 중에서는 혹 먼저 욕을 당하였으나 나중에는 물든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같이 나쁜 짓을 하는 무리들은 서로 끌어당겨서 무리를 믿고 행패를 부렸다. 수 백명이 사는 촌락이더라도 1~2명의 동인(東人)이 나타나면 황급하게 달아나 숨어버렸다. 그래서 마을이 텅 비어서 저들이 마음대로 분탕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금지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