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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9월 초 1일 갑술 [九月初一日甲戌]

일본인들이 안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병사들을 보내 화지와 퇴치 등지에 있는 동도들의 접소를 불태웠다.

○ 일본인들이 상주 이정(梨亭)의 동도를 격파하여 소야 접주 최맹순은 도주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흩어졌으며 수만에 달하는 저들의 돈과 곡식 및 무기는 일본인들이 거두어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 선무사가 안동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 군수가 경내의 면리(面里)에 명령을 내려 요충지에 막(幕)을 설치하고 밤마다 번을 나누어 수직(守直)하라고 하였다. 또한 산꼭대기의 망을 볼만한 장소에 모두 횃불을 설치하여 서로 연락하도록 하였다.

초 2일 을해 [初二日乙亥]

안동의 병사들과 외부(外部)의 창군(槍軍)을 해산시켜 돌려보냈다.

○ 도로가 처음으로 외지와 소통되어 백성들이 얼마간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 선무사가 안동에서 본부에 감결을 내렸다.
그 내용에, “본군의 여러 백성들이 힘을 써서 마침내 비류들을 흩어지게 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만약 이기는 형세를 타고 호기를 부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무관한 집을 불태워서 물고기와 기러기를 모두 잡고 옥과 돌이 모두 불탄다면 이것이 어찌 우리 조정이 백성들을 위무하는 뜻이겠는가?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자들에게는 관대한 은전을 베풀고, 귀화한 자들에게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라. 다만 동학에 이름을 의탁하여 약탈을 일삼은 자들은 화적들이니 일일이 잡아들여서 법률을 적용하라는 뜻으로 속히 효유하여 신칙하라”고 하였다.

초 3일 병자 [初三日丙子]

군수가 글을 써서 방을 붙여 각 면의 민인들에게 게시하였다.
그 내용에, “선왕의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미쳐서 비류들이 이미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난리를 겪은 백성들이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되찾기가 어려우니 매우 딱하고 안타깝다. 더구나 지금은 가을걷이가 한창이어서 줄곧 어수선하니 어떻게 안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오늘 이후로 귀화한 모든 백성들을 더 이상 추궁하지 말며, 각자 옛날처럼 안정을 되찾으라. 혹 겁략을 일삼는 화당·난류와 읍인을 자칭하면서 증빙할 만한 공문(公文)이나 인적(印蹟)이 없이 침탈을 자행하는 자들은 그 동(洞)에서 결박하여 잡아들이는 한편 신속히 보고한다면 엄중하게 다스릴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으라. 오직 관부에 보고하고 안정된 상황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 관부에서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번거롭게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경내의 백성들 가운데 다투어 돈과 곡식을 가지고 와서 군자에 보태도록 하는 자들이 날마다 이어졌다.

초 4일 정축 [初四日丁丑]

남영(南營)의 부사[亞使]가 병정 250명을 데리고 와서 유숙하였다.

초 5일 무인 [初五日戊寅]

남영사(南營使)가 네거리에 방을 게시하여 군민들을 효유하고 용궁으로 떠났다.

초 6일 기묘 [初六日己卯]

남영사가 용궁에 도착하여 소야 부접주 고상무(高商武) 삼형제를 체포하여 머리를 잘라 내걸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초 7일 경진 [初七日庚辰]

군수가 경내 각처의 동학의 접소를 소각한 상황을 순영에 보고하였다.

초 10일 계미 [初十日癸未]

부민으로 행상을 다니는 황기전(黃基銓)이 와서 보고하기를, “안동에서 감천(甘泉)으로 가는 길의 가게에 동도 괴수 이종해(李宗海)라는 자가 있는데, 칼을 가지고 예천 부민들을 해치려고 합니다. 저는 그에게 잡혀서 거의 죽다가 겨우 살아나서 도망쳐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사람을 보내 그를 체포하였다. 심문을 하는데 부병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에 소야 접소에서 칼을 뽑아 본소의 통사(通使), 심부름꾼를 죽이려고 했던 자이며 고을을 칠 계획을 처음으로 주창한 자입니다. 또한 이전에 시장으로 가는 길을 막았던 것도 부족하여 지금 또 행패를 부리니 이 같은 놈을 어찌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결국 촘촘히 둘러서서 때려 죽였다.

11일 갑신 [十一日甲申]

종해의 아비가 자식의 시신을 거둘 것을 간청하여 허락하였다.

12일 을유 [十二日乙酉]

군수가 동도 종해를 죽인 일을 순영에 보고하였다.

13일 병술 [十三日丙戌]

전에 부병이 금곡의 동도 32명을 잡아서 가두었다. 이때에 죄를 조사하면서 너희 동(洞)의 적괴는 누구냐고 묻자 모두들, “전도야지(全刀也只)입니다. 다만 그는 동도의 모량도감(募糧都監)이었으며 일찌감치 도망갔습니다. 이 가운데는 정명언(鄭明彦)이 그의 접사(接司)로서 부권(簿券)을 관장하며 침학을 자행하였습니다. 또 그는 평소에 무력을 쓰면서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던 습성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죄가 없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결국 그들 31명을 풀어주고 정명언 1명만 가두었다. 그리고 화지의 동도 윤상명(尹尙明)도 거괴로서 읍을 공격하자고 함께 모의한 죄가 있어서 조사하여 진상을 밝혔다. 모두 끌어내어 이날 처형하였다.

○ 군수가 이 일을 순영과 병영(兵營)에 보고하였다.

14일 정해 [十四日丁亥]

집강 박인문(朴仁文)이 병으로 사임하였다.

○ 군수가 군의 창고의 무기를 점열(點閱)하였는데 파손되어 쓸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난리를 겪은 뒤라 조총이 많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무기를 수선하는 일을 병영에 보고하였다.

15일 무자 [十五日戊子]

내·외부병을 점고하였다. 이때 인심이 조금 안정되어 여항과 방곡의 인민들이 단란하게 모여 술을 따르면서 서로 말하기를, “오늘 다시 옛날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하였다.

19일 임진 [十九日壬辰]

순영문의 회제(回題0가 도착하였다. ≪이달 12일에 이종해를 죽인 일에 관한 것이다≫그 내용은 이러하다.
“법의 적용은 관대하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사로이 죽여서 모래사장에 묻을 수가 있는가? 이미 앞서 신칙하였으나, 다시 효유하니 절대로 사사로이 생명을 해치지 말고 결박하여 잡아와서 법에 따라 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20일 계사 [二十日癸巳]

이때 각처에서 패해 흩어졌던 적들이 단양(丹陽)과 제천(堤川) 등지에 모여 무기를 훔치고 인가를 불태우며 장차 고개를 넘어갈 것이라고 소문이 나자 민심이 또 소란스러워졌다. 명령을 내려 동북쪽의 바깥 변경과 관문 및 고개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였다.

○ 순영문의 회제가 도착하였다. ≪13일에 정명언과 윤상명을 처형한 일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에, “이러한 문첩(文牒)은 특히 늦출 수가 없다. 그래서 감결로써 신칙하니 이후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22일 을유 [二十二日乙酉]

전하는 바를 들으니, 패하여 흩어진 동도의 나머지 무리들이 다시 상주에 모여 선산(善山)·김천(金泉)의 동도와 서로 호응하여 예천·안동·의성을 칠 것이라고 떠드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였다. 급히 사람을 보내 정탐하였다.

25일 무술 [二十五日戊戌]

병영의 회제가 도착하였다. ≪13일에 정명언과 윤상명을 처형한 일 및 무기를 수선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에, “적도를 잡아서 처형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 군졸들을 격려하여 더욱 정탐을 철저히 하도록 하고,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현 시점에서 무기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안으로 수선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7일 경자 [二十七日庚子]

상주로 갔던 정찰병이 보고하기를, “적당(賊黨) 1만여 인이 상주 객관(客館)에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앞장서서 떠드는 자들은 박현성·김노연·권순문(權㥧文)등과 같이 모두 본읍에서 도망쳐간 적괴들과 함창의 김복손(金福孫) ≪본부 사람이며 함창으로 이주하였다. 원한을 품고 항상 본읍에 피해를 입히려고 하던 자이다≫입니다. 이들은 각처의 동도들과 함께 모의하기를, ‘동학이 중도에 꺾인 것은 순전히 예천이 우리를 쳤기 때문이다. 우선 예천을 도륙한 다음, 안동과 의성을 치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들의 기세가 대단하여 부중의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28일 신축 [二十八日辛丑]

봉란부(鳳卵阜)≪부중에 만들어 놓은 둥근 언덕이다. 대대로 전하기를 본읍의 주산은 덕봉산(德鳳山)이며 읍의 터는 날아가는 봉(鳳)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이곳이 봉란(鳳卵)이다≫와 남산 ≪부의 남쪽 1리 지점에 성황단이 있다≫에 제사를 지냈다.
봉란부에 지낸 제사의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인모(螾母), 지렁이는 정기를 지니고 봉새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은 원기가 모이는 곳이며 덕은 중황(中黃)과 합치됩니다. 1,000년 동안 응결되어 이 지역을 안정시켰습니다. 교활한 저 비도들이 동토(東土)를 소란스럽게 하고 은밀히 불궤(不軌), 역모를 도모하다가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다시 남주(南州)에 모여 흉악한 짓을 하려고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명철하신 신이시여, 크게 신병(神兵)을 풀어서 우리들의 금관(金關), 굳건한 관문을 더욱 단단하게 하시고 우리들의 철성(鐵城)을 더욱 높이시어 요사한 기운을 확 쓸어버리고 민생들을 보호하신다면 장막으로 가려 놓고 영원히 평안하고 깨끗이 할 것입니다. 삼가 희생과 곡물과 술 등의 음식으로 공경히 제사를 드리니 흠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남산에 지낸 제사의 축문에, “우뚝한 저 남산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사원(四垣) ≪군 경내의 4 산이 천성(天星)의 사원(四垣)과 닮았다≫이 에워싸고 팔장(八將) ≪군 경내의 사지(四止)와 사유(四維)이며 모두 높은 산이다≫이 일제히 솟아 있습니다. 성황당의 제사를 항상 공경히 모셨으며 돌로 만든 자라(石鰲) ≪옛사람들이 돌로 자라를 만들어 산 위에 두어서 지기(地紀)를 눌렀다≫를 바쳤습니다. 지금 도적들이 날뛰는 위급한 상황이 닥쳤으나 덕택에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무리들이 다시 집결하여 흉악하고 간사한 짓을 자행하려 합니다. 신께서 위엄을 발휘하시고 사람들이 꾀를 내어 이를 돕고, 적제(赤帝)가 군사를 지휘하고 주조(朱鳥)가 군대를 통솔하여 저들을 섬멸하여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만년토록 길이 홍복을 흠향하실 것입니다. 삼가 희생과 술과 곡식 등의 음식으로 공경히 제사를 드리니 흠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사가 끝난 뒤에 포병 100여 명으로 하여금 상주를 향하여 일제히 총을 쏘아 살기를 제압하도록 하였다.

29일 임인 [二十九日壬寅]

군수가 상주 동도들의 소요에 관하여 의성·풍기·영천 등 각 읍에 공문을 돌려 위급할 때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 이때 본군의 서리들이 동도의 사정을 탐문하기 위하여 상주의 서리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냈더니 여기에 답하기를, “폐주(弊州), 상주의 영(營)과 본부(本府)의 이노(吏奴) 및 외촌(外村)의 민정은 모두 2,000여 명인데, 10일 간격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5일 간격으로 사격훈련을 합니다. 그리고 성을 수비하는 일을 훨씬 더 강화하였으니 별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지금 이 소란은 분명히 화(禍)를 즐기는 자들이 무심코 떠들어대는 것이 분명하니 도리어 우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적당에 아부하여 모든 것을 속이고 있었으니 진실로 매우 개탄스럽다.

30일 계묘 [三十日癸卯]

상주에 갔던 정찰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28일 사시에 일본인들이 조교(弔橋), 줄다리를 이용하여 성으로 넘어 들어가서 적도들을 공격하여 대파하였으며 100여 인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을 격파한 시각을 계산해보니 바로 산에 제사를 지내고 남쪽을 향하여 총을 쏘던 시각이었으니 또한 신기하다.

○ 지난 8월 28일에 화지와 금곡의 적도들이 고을을 공격할 때 북산(北山) ≪바로 장군암이다≫과 의충사에 제사를 지냈는데, 적을 물리친 후에 서북지역의 동민들이 와서 말하기를, “두 지역의 적들이 서로 모의하여, ‘시한을 맞추어서 이날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하면 군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시가 되자 어떤 사람이 백마를 타고 와서는 스스로 보은접소에 왔다고 하면서 법헌(法軒) ≪보은 도접주(都接主)로 삼남 동도의 괴수인 최시형(崔時亨)이다. 스스로 법헌이라고 불렀다≫의 분부를 전하기를, ‘예천을 치려면 반드시 먼저 부 남쪽의 유정(柳汀)을 점거한 뒤에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여러 적들은 서쪽으로 주현(酒峴) ≪부의 서쪽 2리 지점에 있다≫을 넘어 산성 ≪부의 서쪽 1리 지점에 있다≫을 빼앗아서 점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 사람의 말을 따라 유정에 주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홀연히 사라졌으며 결국은 패배하였습니다. 금곡의 적은 그날 신시에 고을을 침범하려고 화지의 적과 서로 내응하였으나 북산에 제사를 지낸 뒤에 총 쏘는 소리를 듣고는 부병들이 온다고 무서워서 놀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후로 종종 이렇게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주석
남영(南營) 1880년 군제는 친군영(親軍營)으로 개편되었는데 지방수비대는 별도의 군영을 두어 친군영의 지휘를 받았다. 대구수비대는 1887년 친군 남영이라 부르고 지휘관인 남영사는 경상감사가 겸임하였다. 아사는 남영사 아래의 지휘관을 가르킨다.
전도야지(全刀也只) 도야지는 돼지의 한자표기이다. 본명은 기항(基恒)인데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하는데 동학농민군의 양곡을 전담해 공급하였다 한다. 돼지라는 애칭의 별명을 가졌다 한다.
중황(中黃) 가운데는 중앙토(中央土)를 의미하며 흙은 황색이다. 만물을 살리는 토덕(土德)을 말한다.
적제(赤帝)가 군사를 지휘하고 주조(朱鳥)가 군대를 통솔 적제(赤帝)·주조(朱鳥): 적제는 오방신의 하나로 남방진. 주조는 붉은 새이나 남쪽 성좌의 이름으로 주작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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