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 1일 갑진 [十月初一日甲辰]
내·외부병을 점고하고, 내부병에게 모두 흑삼(黑衫)을 착용하게 하여 흰옷과 구별시켰다.
초 2일 을사 [初二日乙巳]
금곡동의 사인(士人) 등이 동신(洞神)에게 위안제를 지낼 때에 본부의 임원을 파견하여 참관해 달라고 통문을 보냈다.
그 내용에, “사설(邪說)이 정설(正說)을 해치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의 동도처럼 ‘학’을 칭하고 ‘도’를 칭하면서 갑자기 난역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 비동(鄙洞), 금곡동은 평소 추로지향에 위치하여 시례(詩禮)의 풍속을 조금 전수하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운수가 일정하지 않아서 일의 변화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얼음과 숯불이 한 그릇 속에 같이 들어있으면 깨끗하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의 교화에서 거의 벗어난 백성이 되고 도내(道內)에서 버려진 땅이 될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여러분 집강들이 크게 정의를 부르짖은데 힘입어 100리 안의 더러운 것들을 쓸어버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가 감격하여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 동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어서 영락한 주민들이 놀란 정신을 수습하였으니 어찌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에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우선 동신에게 위안제를 드리고, 대소의 민인(民人)들을 모아 동약(洞約)을 토의하여 결정하고, 무기를 점고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염원을 이해하시어 집사 1명과 총수 1명을 데리고 광림하시어 한편으로 동의 규율을 엄히 단속하시고, 한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집사 1명과 포병 1명을 금곡으로 보내 참관하도록 하고 답장의 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그 내용에, “생각건대, 강아지풀이 좋은 밭을 망치며 미꾸라지가 큰 못을 흐립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시례(詩禮)의 고장이 잘못된 행동과 사악한 학설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깨진 기와조각만 나뒹구니 보기가 애처롭습니다. 비록 사악한 무리들이 자초한 것이지만 어찌 뜻있는 선비가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사설(邪說)을 막지 않으면 정도(正道)가 유행하지 않고, 사설이 그치지 않으면 정도가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득이한 조치가 있었으니 정의의 목소리가 크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위협에 못 이겨 억지로 무리에 가담한 자들은 차츰 귀화시키고, 한 점 흠이 없는 자들은 더욱 그 빛을 발산하게 하십시오. 보내주신 통문 가운데 동신(洞神)에게 위안제를 지내고 동약(洞約)을 강정한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경탄스럽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집사와 총수 2명을 보내어 참석시킵니다. 그리고 난리를 겪은 뒤에 본동의 소인배들이 여전히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고 종종 사족(士族)들을 능멸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매우 놀랍습니다. 반드시 규칙을 엄하게 정하여 힘껏 잡아들이십시오. 만약 완강하게 버티고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적발하여 다시 통보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여 명분을 바로 잡는 것을 최우선적인 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혹 저들 무리 가운데서 이미 귀화한 사람과 은밀히 내통하고 그들을 몰래 사주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특별히 사찰하고 압송하여 화란의 실마리를 끊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초 6일 기유 [初六日己酉]
순영문에서, 유곡(幽谷) 우관(郵官)이 관할하는 낙원(洛原)·낙동(洛東)·연향(延香)·낙서(洛西)·장림(長林)·낙평(洛平) 등 6개 역(驛)의 말들을 동도에게 잃어버렸는데, 해읍(該邑), 예천으로 하여금 이를 은밀히 조사하여 찾아오라는 일로 본부에 감결을 보냈다.
초 9일 임자 [初九日壬子]
순영문의 감결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방금 의정부의 관문이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에 ‘영남선위사(嶺南宣慰使) 이중하(李重夏)가 장본(狀本)을 올려서, 동도 4,000~5,000명이 예천을 침범하자 그 군의 서리와 백성들이 힘을 모아 격퇴하여 많은 숫자를 죽이고 포로로 잡았으며 나머지는 도망갔는데, 그들을 추격하여 체포하고 경내에 있는 그들의 소굴을 불태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의정부에서, ‘비도들의 숫자가 불어나고 창궐하는 것이 나날이 심해져서 수령들이 이를 막을 수가 없고 평민들이 감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해당 읍의 서리와 백성들이 힘을 합해 포악한 자들을 막았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반드시 먼저 앞장서서 계획을 세우고 부르짖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당해 도신(道臣)에게 자세하게 조사해서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보고토록 하여 그들을 거두어서 쓰고 격려하는 방도로 삼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계사(啓辭)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윤허한다는 전교를 내리셨다.
그 내용에, ‘전교의 내용을 받들어 시행하라. 근래 곳곳에서 비도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나 서리와 백성들 사이에서는 계책을 내어서 이들을 막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해당 도내(道內), 경상도 내 여러 고을의 서리와 백성들이 협력하고 서로 이끌어서 이들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쏟아져 내리는 물살 속에서 버티고 서있는 돌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진실로 추로지향이 평소에 쌓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안동·의성·안의(安義) 등 고을에 만약 이와 같이 앞장서서 계획을 세우고 부르짖은 자가 있다면 그 또한 전부 조사하고 기록하여 즉시 보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관문을 보냈다. 본읍의 서리와 백성들 가운데 앞장서서 계획을 세우고 부르짖은 자의 성명을 책으로 작성하여 보고하고, 이후의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여 끝내 실제적인 효과를 얻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일에 관한 선무사의 감결도 같은 날에 도착하였다.
초 8일 신해 [初八日辛亥]
군수가 교장(敎場)을 설치하고 부중의 궁수(弓手)와 포수(砲手)를 모아서 사격대회를 열고 성적에 따라 상을 내렸다.
12일 을묘 [十二日乙卯]
패하여 흩어졌던 동도의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이 충주·덕주(德柱) 등지에 다시 모이고, 선산과 상주에서 도망한 적당들이 하동(河東) 등지에 다시 모여서 종종 밤을 틈타 불을 지르고 행인들을 겁략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8일 신유 [十八日辛酉]
밤 이경에 본군 적성동(赤城洞)의 주민이 급하게 보고하기를, “적괴 최맹순이 무리 100여 명을 데리고 충청도에서 본동(本洞)으로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겁략하니 상황이 매우 급박합니다”라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연이어 3차례나 보고가 올라왔다. 급히 부병 100여 명을 징발하여 달려가서 구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모두 달아나버렸다.
19일 임술 [十九日壬戌]
저녁에 부병이 부대로 돌아왔다.
22일 을축 [二十二日乙丑]
상주의 서리와 백성들도 집강소를 설치하려고, 사람을 보내 설치에 관련된 조규(條規)를 물었다. 당일에 답장을 하였다.
그 내용에, “폐군예천의 집강소는 본래 창졸간에 여러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아 만든 것으로, 규약과 약속을 정하고 규례를 만든 뒤에 설치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감히 이웃 고을에 조목조목 알려드릴 수는 없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