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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1월 초 1일 계유 [十一月初一日癸酉]

내·외부병을 점고하였다.

초 2일 갑술 [初二日甲戌]

이 때 이웃 읍의 많은 예졸(隷卒)들이 동도를 체포하러 경내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침학하였다. 군수는 경내에 명령을 내려 그들을 단속하여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초 3일 을해 [初三日乙亥]

전에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대원군의 유문(諭文)을 내려 보냈는데 이 때 군에 당도하였다.
그 내용에, “흥선대원군께서 간절히 이렇게 효유하셨다. 우리 조정은 인후(仁厚)한 덕으로 나라를 세우고 예의(禮義)로 풍속을 이루어, 대대로 태평을 누렸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500년 동안 백성들은 전쟁을 겪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까닭인지 근래에 들어 기강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점차 무너져서 방백과 수령들의 탐학과, 토호와 강족(强族)들의 무단(武斷)과, 간악한 아전들과 교활한 서리들의 침탈이, 나날이 증가하여 끝이 없다. 이 때문에 우리 조종(祖宗)이 보호하는 백성들이 삶을 영위할 수가 없었는데도, 서울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동학에 이름을 의탁하고 무리를 모아서 자신들을 보호하며 하루하루 요행히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 사정을 살펴보면 참으로 딱하고 애처롭다. 나는 본래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낸 지가 20년이 되었다. 이미 늙고 병이 들어 세상 사정을 듣지 않았으나 근래 국가에 어려움이 많아 병든 몸을 부축하여 입궐하였다. 밖을 바라보면 사방의 많은 봉수대에서 연기가 가득하고 안을 돌아보면 나라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마치 면류관에 매달린 구슬과 같다. 팔도를 둘러보면 믿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곳은 오직 삼남(三南) 뿐이다. 그 의지처인 삼남의 태반이 사설(邪說)에 물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원통함을 하소연하면서 일어나더니 점차 기세를 타고 움직이며 도처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법도를 어기고 분수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관부가 정사를 베풀지 못하도록 하고 조정이 명령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을 영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너희들은 생각해보라. 이것이 과연 의거(義擧)인가 패거(悖擧)인가? 지금 동도를 칭하는 자들은 모두들, ‘백성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때려 부수고 섬멸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내가 어찌 차마 백성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을 너희들에게 씌우겠는가? 너희들은 모두 우리 조종(祖宗)께서 길러주신 백성들이다. 내가 그 본성을 따라서 그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여 난리에 이르게 하였는데 또 어떻게 차마 무기를 사용하겠는가? 조정에서 이미 삼도(三道)에 사자를 파견하여 후덕한 뜻을 널리 알렸는데도 너희들은 끝내 듣지 않았으니 이는 조정과 맞서겠다는 것이다. 이에 백성들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국가의 용서는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물에 빠져 죽을 것이 걱정이 되니 또한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는가?
이에 우리 성상(聖上)의 뜻을 본받아 마음속의 생각을 서술하여 널리 포고한다. 너희들이 즉시 깨달아서 무기를 버리고 밭으로 돌아가면 조금도 벌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 가을의 곡식이 익었으니 부모처자와 함께 배부르게 먹고 즐기면서 길이 태평성대의 백성이 되도록 하라. 재지(才智)가 있으면서 굴복하여 동도에 들어간 자들은 정부(政府)에서 재주에 따라 거두어서 등용할 것이다. 만약 이 충고를 따르지 않고 범법을 자행하며 무리를 지어 형세를 살피면서 해산하지 않는다면 이는 큰 화를 자초하는 것이니, 나 또한 안타까워도 도와줄 수가 없다. 나는 금년에 팔순이 다 되었으니 다른 바람은 없다. 나의 생각은 오직 종묘사직과 백성들에만 쏠려있을 뿐이다.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컨대 절대로 너희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너희들 중에서 세상일에 밝은 사람 3~4명이 와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면 반드시 얼음이 녹듯이 풀릴 것이다.
근래에 조정에서 정치를 개혁한다는 소식을 너희들도 들었는가? 과거 백성들의 병폐가 되었던 나쁜 폐단들을 일일이 바로잡고 이웃나라와 우의를 다져서 평화의 복을 더욱 돈독히 하려하고 있다. 이는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하시는 우리 성상의 고심이니 너희들은 그 지극한 뜻에 우러러 부합하여 거짓을 일삼지 말라. 어찌하여 딱하게도 평온하고 즐거운 곳을 버리고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는가? 아! 오늘이 바로 너희들의 화와 복이 갈리는 시점이고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시기이다. 나의 말은 여기에서 마친다. 각자 잘 생각하여 후회하지 않도록 특별히 효유하노라. 다 읽은 다음 베껴 적어 경내에 널리 게시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초 5일 정축 [初五日丁丑]

위무사(慰撫使) ≪본래 선무사(宣撫使)였는데 위무사로 바꾸었다≫가 창녕(昌寧)에서 임금의 교서를 내렸다.
그 내용에, “왕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날 나라에 혼란이 많아서 비적(匪賊)들이 때를 지어 그 틈을 타고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백성들이 죄 없이 전란에 말려드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여러 번 무마하고 타일렀다. 그런데 끝내 허물을 고칠 줄을 모르고 날로 더욱 창궐하여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해치며 주현(州縣)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조정과 민간에서 다 같이 격분해서 모두들 ‘토벌하지 않고서는 악한 자들을 징계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가는 곳마다 적을 쓸어버리되 그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 이겨 따라간 자들은 풀어주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마지못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요즘 듣건대, 비적들이 강제로 양민을 몰아내어 모조리 저들의 무리에 끌어넣어 집을 버리고 생업을 잃게 하여 울부짖으면서 따라나서지 않으려는 사람이 열이면 아홉이 된다고 한다. 산 사람은 뜻밖의 칼날에 맞아 들판의 거름이 되고 남은 사람은 흩어져 떠돌아다니며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한밤중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다. 이런 때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일을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아! 너희 삼남(三南)의 위무사(慰撫使)들은 가서 나의 말을 대신하여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연도(沿道)의 재난을 당한 지방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정착시키며 도내 각 읍의 폐단이 되는 일들을 자세히 탐문하여 일일이 보고하라. 만약 우리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종사(從事)하여, 지난날의 나쁜 물이 든 풍속을 다 같이 고쳐 새롭게 하라. 나의 백성들이 호랑이의 입에서 벗어나 부모의 품으로 들어오듯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위무사의 효유문(曉諭文)에서 말하기를, “동도가 소란을 일으킨 이래, 국가는 그들을 백성으로 여겨서 차마 바로 처벌하지 못하고 거듭 윤음을 내려 불쌍하게 여기며 효유하였다. 그러나 저들 무리는 줄곧 고치지 않고 감히 왕명을 거역하며 백성들의 재산을 겁략하고 무기를 훔치며 성읍을 불태우고 마을을 유린하였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지탱하여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비유컨대, 집에 열 명의 아들이 있는데 불행이 한 명이 패악을 부려서 그 해가 나머지 아홉 명에게 미친다면 비록 자애로운 부모의 마음으로써도 패악을 부리는 아들을 빨리 제거하여 나머지 아홉 아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이 어찌 측은해하여 상하지 않겠는가?
이들 무리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당초에 일본인을 공격하여 물리친다고 떠들었던 탓에 일본군들이 해가 자기들에게 미칠까 걱정하여 연이어 출동하여 총과 창이 이르는 곳마다 시체가 쌓여서 서로 이어졌다. 이는 모두 저들이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겠는가? 그러나 그간의 전투에서 어찌 연못의 물고기가 뜻밖의 재앙을 당하는 억울함이 없었겠는가? 더구나 이 재앙이 든 해에 또 춥고 배고픈 겨울이 닥치자 보금자리를 잃은 백성들은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편안히 거주하지 못하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서 경관이 참담하다.
죄는 동도에게 있으니 나머지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우리 임금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걱정하시어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돌아보게 하시고, 윤음을 내리시어 위로하고 달래어서 구덩이에 나뒹구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시고, 적도의 우두머리는 처형하시고, 위협 때문에 따라간 자들은 용서하셨다. 또한 괴수를 잡아서 바치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셨으며, 무기를 버리고 귀화한 자들은 특별히 용서하셨다. 너희 백성들은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고 서로 경계하고 타일러서,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짓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를 하며, 각각 생업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안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서와 효유문을 다 읽은 다음 베껴 적어 경내에 선포하였다.

초 7일 기묘 [初七日己卯]

순영문에서 “적괴를 체포한 뒤에 먼저 처형을 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일로 본군에 감결을 내렸다.
그 내용에, “비류들의 창궐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이들을 용서한다면 앞으로 형법을 어디에 적용하겠는가? 체포한 뒤에 일일이 먼저 보고하고 제사(題辭)를 받아 처벌하는 것은 시일이 허비되고 늦어지는 결점이 있다. 이후로는 만약 정황이 매우 중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는 네거리에 형장을 설치하여 그 결안(結案)에 따라 처형을 하고, 죄가 가벼워서 곤장으로 다스릴 수 있는 자와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자 및 귀화하여 훈방할 수 있는 자는 모두 순영에 보고하지 말고 적절하게 조처한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5일 정해 [十五日丁亥]

내·외부병을 점고하였다. 토포사(討捕使) ≪조정에서 인동부사(仁同府使)에게 토포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의 관문(關文)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비류들의 소요가 있은 이래로, 조정에서는 오로지 이들을 위무하고 어루만져 차마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은 바로 먼저 은혜를 베푼 다음 나중에 위엄을 가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저들 무리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양호(兩湖)에 군대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토벌을 감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소모사(召募使)를 파견하여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또 토포사를 내려 보낸다는 명령이 있었다. 본읍은 경내의 접주와 접사 아무개는 토벌하여 잡아들이라.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귀화하는 자는 끝까지 효유하여 각자 편안히 생업에 힘쓰도록 하고, 미혹됨을 고집하여 멋대로 패악을 부리는 자는 즉시 토벌하여 악의 싹을 자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21일 계사 [二十一日癸巳]

적성동 통수(統首)가 갑자기 보고하기를, “동도의 거괴 최맹순이 충주의 독기(篤基) 등지에 숨어 있으니 급히 부병을 파견하여 체포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유사와 포병 30여 명을 파견하였는데 벌천(伐川) ≪군의 북쪽 70리 지점에 있다≫까지 추격하여 최맹순과 그의 아들 한걸(汗杰) 및 장복극(張卜極)을 잡아왔다.

22일 갑오 [二十二日甲午]

부병이 최맹순 등 3명을 체포하여 관부로 들여보냈다. 군수는 이들의 죄를 조사하여 다짐을 받도록 하였다.
최맹순≪나이 42세≫이 말하기를, “저는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허망한 사술(邪術)을 배워 22년 동안 은둔하여 그것을 몰래 익혔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3월에 본군 소야 땅에 접소를 설치하고 타도(他道)와 본도(本道)를 막론하고 무리를 꾀어서 모으자 그 숫자가 7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땅은 좁고 무리는 많아서 각처에 접소를 설치하니 그 숫자가 48개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무리들은 모두들 거칠고 잡된 난류(亂類)들이었습니다. 조정의 명령과 순영의 지시를 어기고 지키지 않았으니 이미 효수하여 경계시킬 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또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용궁(龍宮)의 무기를 탈취하여 예천 읍민들을 도륙하려고 하다가 결국 패하여 달아나서 강원도 평창(平昌) 접소에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100명 정도의 접의 졸개들을 모아 지난달 17일에 본읍 적성리로 갑자기 들이닥쳐 인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습니다. 충주 독기령(篤基嶺)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스스로 죄상을 돌아보건대 어찌 잠시라도 용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빨리 처형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최한걸≪나이 21세≫이 말하기를, “제 아비가 이미 죄인의 우두머리이므로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죽을죄를 지었음을 자백하오니 빨리 처형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장복극≪나이 55세≫이 말하기를, “저는 본래 본군의 소야에 거주하였습니다. 최가(崔哥), 최맹순와 이웃에 살았던 관계로 사학(邪學)에 유혹되어 들어가 접사가 되어 무리들을 불러 모았는데 500여 인에 이르렀습니다. 최맹순과 공모하여 고을을 공격하였고 결국 패하여 쫓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동학에 이술(異術)이 있다고 맹신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그것을 공부하였으며 이것을 배워야만 난세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군대를 물리치는 부적(退兵符)과 군대를 물리치는 주문(退兵呪文)을 지니고 있다가 체포될 때 결국 탄로가 났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음을 자백하오니 빨리 처형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초의 말을 다 받은 뒤에 군수는 초루(譙樓)에 자리를 마련하고 크게 군위(軍威)를 벌려놓았다. 집강과 여러 집사들은 모두 서열에 따라 도열하였으며 부병 500~600명이 좌우로 늘어섰다. 최맹순에게 엄하게 곤장 1대를 친 뒤에 즉시 무사(武士)에게 그를 끌고나가 남사장(南沙場)에서 목을 잘라 내걸도록 하여 백성들을 경계시켰다. 마침 장날이어서 좌우에서 구경한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는데 모두들 통쾌하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최한걸과 장복극을 끌고 나와 각각 엄하게 곤장 한 대씩을 치고는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유사 등이 모두들 아뢰기를, “오늘은 장날이어서 두 놈의 친척과 추종무리들이 부중에 많이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밤을 틈타 빼내어갈까 걱정이 되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즉시 끌고 가도록 명령을 내리자 부병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둘러싸고 끌고 가서 총을 난사하여 죽인 후 모래사장에 묻었다.

23일 을미 [二十三日乙未]

군수가 최맹순 등 3놈을 결안(結案)하여 처형한 일을 각 영(營) ≪순영·병영(兵營)·위무사·소모사·토포사이다≫에 보고하였다.

24일 병신 [二十四日丙申]

본군의 적성 등지는 조령의 아래에 있으며 충주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항상 외부로부터 노략질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최맹순 등 3명이 모두 그쪽에서 잡혔는데, 그의 무리들이 영외(嶺外)에 흩어져서 점거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므로 변고가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단속과 수비를 더욱 강화하라는 뜻으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해동(該洞), 적성의 두령에게 보내주었다.

29일 신축 [二十九日辛丑]

냉정산(冷井山) ≪부의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그 아래에 찬 샘물이 있다≫에 제사를 올렸다.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높은 산은 군의 동쪽 울타리로서 한 지역을 웅대하게 누르고 있으면서 삼원(三垣)을 껴안고 있고, 신께서는 그곳에 계시면서 우리 생령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저 동도들이 감히 흉악한 짓을 자행하였으나 신의 도움을 입어 저들은 이미 타격을 입었습니다.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물리치며 음(陰)을 누르고 양(陽)을 떠받들어, 담장들이 우뚝 서고 가옥들이 즐비해졌으며, 전에는 삶을 거의 포기하였으나 지금은 다시 안정을 찾아, 평민들은 들에서 기뻐하고 선비들은 뜰에서 축하하고 있습니다.
다시 원하건대 이를 이어서 영원히 전쟁을 없애고, 인(仁)을 쌓아 못을 만들고, 덕(德)을 포개어 성을 만들어, 충(忠)과 신(信)으로 자신을 지킨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은 이미 준비를 마쳤으니 어찌 신의 도움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이에 좋은 날을 택하여 정성을 모아 재숙(齋宿) ≪제관이 목욕재계하고 재소에서 밤을 세웠다≫하였습니다.
저 높은 산을 둘러보니, 굽어보시고 날개를 편 것 같습니다. 신이 내려오시네, 안개 수레와 바람 깃발로. 신이 흠향하시네, 향기로운 술과 맛있는 음식을. 신을 맞이하네, 산의 꼭대기에서. 신을 전송하네, 산의 앞자락에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를 베푸시네. 백년, 천년 동안 오래도록 길하고 창성하리라”고 하였다.

주석
위무사(慰撫使) 동학농민혁명 초기에는 왕의 뜻을 밝혀 알리고 위무하는 선무사를 보냈고 평정이 된 뒤에는 고통에 빠진 백성을 위무한다는 뜻에서 위무사를 파견하였다.
결안(結案) 사형을 결정하는 문서로서 판결문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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