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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2월 초 1일 계묘 [十二月初一日癸卯]

내·외부병을 점고하였다.

초 8일 경술 [初八日庚戌]

안동도총소에서 동도 김한돌(金漢乭)·황묵이(黃黙伊)·김서공(金庶公) 등 3놈을 체포하여 죽인 일로 본소에 통문을 보냈다.

○ 현산(峴山)에 제사를 지냈다.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상서로운 봉황이 남쪽에서 빙빙 돌다가 한수(漢水), 한강의 줄기 가에 내려앉아 구포(九苞)의 붉은 날개로 소중한 알≪봉황의 알이다. 설명은 위에 보인다.≫을 보호합니다. 중화(中華)를 모방하여 양양(襄陽)이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서쪽에는 현산(峴山)의 머리가 우뚝하게 솟아있습니다. 제창루(鞮昌樓)는 높고≪군의 초루(譙樓)에는 ‘동제고루(銅鞮鼓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누타비(淚墮碑)에는 얼룩졌습니다. 바람은 늘어진 허리띠에 불고, 꽃은 비단 두건에 꽂혀있습니다.[風餘緩帶花揷罹巾] 사람과 땅이 이미 마음이 맞았으니 어찌 신의 도움이 없겠습니까? 사원(四垣)이 받들어 보호하고, 팔장(八將)이 배열하여 있습니다. 관축(關軸)이 이미 치밀하고 배창(棓槍) ≪두 별의 이름이다. 무기와 모양이 비슷하여 뜻밖의 재난을 경계하였다≫또한 날카로우니 어리석은 저 동도놈들이 어찌 감히 엿보겠습니까? 우레 소리가 한 번 진동하자 수많은 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온 경내를 말끔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군(神君)의 덕택입니다. 이에 좋은 날을 택하여 신의 은혜에 보답합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찐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바칩니다. 무부(武夫)는 씩씩하게 늘어서있고 깃발은 선명하게 나부낍니다. 신이 이미 배부르고 취하여 무한한 복을 내리시어 영원히 안정되게 하시어 더 이상 난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소서. 밥 짓는 연기가 경내에 가득하고 닭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연이어지고 따뜻한 바람이 성안에 두루 퍼지고 목면과 오동나무 꽃이 피고 봉황이 다시 날아오며, 신령의 덕이 널리 미쳐 크고 아름답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9일 신해 [初九日辛亥]

각 영문(營門)의 회제(回題)가 차례대로 도착하였다. ≪11월 22일에 최맹순 등을 처형한 일에 관한 것이다≫
순영문의 회제에, “최가 부자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며 천만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나 부자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죄목으로 처형된 것은 법률의 규정이 없는 듯하니 어찌 신중하게 살피지 않았는가? 앞으로 부자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사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날짜를 달리하여 처형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무사의 회제에, “법망을 빠져나간 괴수가 스스로 와서 죽었다고 하니 하늘이 처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소식을 들으니 매우 상쾌하다. 이후로 정탐하고 수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영의 회제에, “3놈을 처형하였다는 보고를 들으니 매우 통쾌하고 다행이다. 병사와 백성들을 격려하고 토벌에 더욱 신경을 써서 비류들의 세력이 커지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토포사의 회제에, “비류들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노략질을 하고 몰래 숨는 것 때문에 항상 괴로워하였다. 지금 이 3놈은 죄가 매우 무거워서 사형에 해당한다. 더구나 순영문에서 감결을 내려 신칙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하루라도 살려둘 수가 있겠는가? 이미 처형을 하였다는 보고를 들으니 매우 상쾌하다. 이후로 토벌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끝까지 정탐하여 잡아들이는 대로 죄의 경중을 나누어서 처벌하여 비류들을 말끔히 소탕하도록 하고 그 상황을 속속 보고하라. 근래에 우거해온 사람들은 수상한 무리들이 많아서 비류들의 세가 불어날 근심이 없지 않으므로 각별히 살펴서 간악한 행동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소모사의 회제에, “최맹순은 저지른 죄가 큰데다가 그의 아들에게도 죄가 미쳤으니 대대로 악행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장복극은 오래도록 사설邪說을 광신하여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3놈이 동시에 처형된 것은 참으로 상쾌하다. 이후로 사찰을 더욱 강화하여 남김없이 토벌하도록 하고 그 상황을 속속 보고하라”고 하였다.

12일 갑인 [十二日甲寅]

소모사정의묵 가 비당(匪黨)이 다시 불길처럼 일어난다는 이유로 급히 본소의 포병을 파견하여 힘을 합쳐 막자는 일로 본군에 감결을 보내었다.
그 내용에, “비당 수천 명이 무주(茂朱)에서 본도로 향해 오고 있으며 이미 황간(黃澗)에 이르렀는데 그 세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방금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유격장을 보내 군대를 통솔해 가라고 하였다. 본읍 집강소의 정예포병 600명에게 탄약과 탄환 및 무기를 지니게 하여 오는 12일까지 신속하게 상주와 화령(火嶺)과 중모(中牟)의 두 곳으로 보내주어 유격장을 도와 적을 토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3일 을묘 [十三日乙卯]

소모사가 또 본읍의 포군 600명에게 5일치의 양식과 탄환 및 탄약을 지니게 하여 신속하게 보내달라는 일로 본군에 감결을 보냈다. 군후는 여러 서리들과 집강들을 모아서 토의를 하였으나 종일토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부병은 위급할 때를 대비하기위해 일제히 모인 것이므로 포군에 소속시켜서 군의 경계를 벗어나서 전투를 하게 할 수는 없다고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리고 관포군(官砲軍)은 20명에 불과하여 600명의 수효를 충족시킬 수가 없으며, 속오군(束伍軍)과 마군(馬軍)은 이름만 존재하며, 갑자기 징발한다면 백성들이 동요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발병부신(發兵符信)도 없으므로 마음대로 징발할 수도 없다. 난리를 겪은 데다 흉년까지 닥쳐서 5일치의 식량을 마련할 길도 없었다. 백방으로 토의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대책을 내지 못하였다. 결국 소모영(召募營)에 알리고 또 순영에도 보고하였다.

○ 오시에 소모사가 또 포군을 징발하는 일로 관문을 보내어 재촉하며, 본군의 공형과 좌수(座首)에게 군율을 적용할 것이며 신칙하지 않은 책임 역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14일 병진 [十四日丙辰]

내·외부병 및 외촌(外村)의 민정(民丁)에게 명령을 내려 내일 아침 일찍 와서 점고를 받으라고 하였다.

15일 정사 [十五日丁巳]

새벽에 소모영의 포졸이 집강 및 수리(首吏)를 잡아오라는 일로 공문을 가지고 왔다. 그를 객관에 머물도록 하고 한편으로 부병과 외촌의 민정을 점고하여 그 중에서 징발하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모두 울부짖어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소모영에서 급박하게 재촉을 하는 엄한 감결이 내려왔으나 군대를 보낼 방책이 없어 군후가 근심에 싸여 업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집강과 여러 집사들이 함께 군후에게 고하기를, “이처럼 재촉을 하니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외촌의 민정들은 전쟁터로 나가는 것에 겁을 먹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울고 있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 같으니 그렇게 되면 촌읍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저희들과 부병이 모두 전쟁터로 나아가서 관부의 보살핌에 보답하고 밖으로 이웃 고을이 수모 당하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군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군수가 서글프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모두 나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백성들로 내가 자식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외지의 전쟁터로 내몰아서 엄동설한에 풍찬노숙을 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차라리 관직을 버리고 귀향할지언정 차마 여러분들을 억지로 가게 할 수는 없다. 또 북쪽에 있는 비류의 잔당들이 아직 완전히 섬멸되지 않았는데 오래도록 고을을 비워두는 것 또한 걱정이 된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하기를, “지금 정탐꾼의 보고를 들으니, 사방에서 패하여 쫓기는 적의 잔당들이 보은 등지에서 모여 추위와 굶주림에 절박하여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워서 소요를 일으킬 생각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모사는 내심 겁이 나서 이웃 고을의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의 성세(聲勢)를 도와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니 이는 작은 문제를 크게 벌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만 그곳에 가서 만약 적의 세력이 창궐하여 영남을 침범할 것 같으면 당연히 힘을 다하여 물리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올 것이지만, 만약 상주에 아무런 변고가 없으면 군대를 돌릴 것입니다. 그 사이 고을의 수비는 외촌의 민정으로 순번을 나누어서 지키도록 하면 매우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수가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반드시 신중하게 살펴서 행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며 기한이 되면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파견할 임원의 명단을 정하였다. 집강 장문건과 황송해를 도총(都摠)으로, 황돈일과 김시규를 좌우총독(左右摠督)으로, 배영진을 군향도감(軍餉都監)으로, 황세하와 황돈해를 참모(參謀)로, 좌수 박의진과 사인 박승덕·김신근·반재원을 별견유생(別遣儒生)으로 삼고, 부병 600명을 징발하였다.

16일 무오 [十六日戊午]

본부 인마(人馬)의 행장을 모두 갖춘 뒤에 장군암과 의충사에 제사를 지내고 이날 신시를 택하여 출정하였다. 군수는 직접 5리 까지 나와서 전송해주었다. 군(軍)을 따르는 자의 형제와 아들·조카들이 말고삐를 당기고 소매를 붙잡으며 모두들 무기를 가지고 함께 따라가기를 원하였다. 부중의 부로(父老)와 어린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을 하였다. 날씨는 스산하고 차가웠으나 모두들 좋은 말로 위로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10여 리를 행군하자 날이 벌써 캄캄해져서 본군의 연화리(蓮花里)에서 유숙하였다. 부대에 엄하게 신칙하여 침학하지 않도록 하였다.

17일 기미 [十七日己未]

부병이 출발하였다. 이때는 엄동이라 삭풍이 뼈 속까지 스며들고 인마가 동상에 걸려서 부대가 전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함창현(咸昌縣)에서 유숙하였다. 날이 저물자 부병들의 형제와 아들·조카 100여 명이 무기를 들고 뒤따라와서 같이 잤다.

18일 경신 [十八日庚申]

아침 일찍 출발하였는데 함창수령이 담배 한 묶음을 가져와서 길가에서 위문하였다. 정오에 상주 연봉정(蓮峰亭)에 도착하여 위무사의 상경 행차를 만났다. 도총과 집사가 들어가서 안부를 여쭈었다. 위무사는 추운 날씨에 군대를 움직이니 매우 힘들겠다고 크게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포시에 상주에 도착하여 영빈관(迎賓館)에 이르렀다. 상주의 목사(牧使)와 진장(鎭將)이 군리(軍吏)를 보내 기치를 세우고 포를 쏘게 하였다. 본진(本陣)의 응포군리(應砲軍吏)가 말에서 내려 도총을 배알한 뒤에 인솔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소모사와 목사가 관료들을 데리고 초루에 올라가서 부병이 대오를 정돈하여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관람하였다. 위무사는 그 씩씩한 모습에 감탄하고 이교(吏校)를 보내 포청(砲廳)에 숙소를 정하도록 하였다. 부병들의 숙소를 모두 정한 뒤에 소모사와 목사 및 진장이 모두 서리를 보내 안부를 묻고 추운 날씨에 먼 길을 온 것을 위로하여 술·고기·담배·차 등을 내려주어서 그것들을 받았다. 이경이 다 되어서 집강이 소모사에게 올리는 관문을 가지고 유생 4인과 총령 및 여러 집사들과 함께 들어가서 소모사를 뵙고 군대를 징발하여 온 그간의 경과를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소모사는 크게 칭찬을 하고는 유생들에게, “영남 바깥의 적들이 예천의 부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점차 물러나서 흩어졌다. 그리고 본부와 대구(大丘)·함창·용궁·비안(比安)의 여러 군대가 일본인들과 함께 공격하여 이미 오늘 사시에 적을 격파했다는 보고가 도착하였다. 내일은 내가 직접 군대를 데리고 출격하여 토벌할 것이니 귀 부병 100명으로 선봉을 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유생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부병이 비록 600명이라고 하나 부자형제가 모두 있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뒤따라오는 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다면 모두 가고 남는다면 모두 남아야 하며 100명만 뽑아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온 목적은 단지 상주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구원하러 왔으니, 이것은 이웃 고을과의 우의를 닦으려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도로 넘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영남 바깥의 적도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므로 오래도록 고을을 비워두는 것도 매우 걱정이 됩니다.
또한 엄동설한은 군대를 움직일 시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적병이 다시 물러났으니 군대를 인솔하여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합하(閤下)께서 직접 토벌하시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닌 듯하니 빨리 그만두십시오”라고 하였다.
소모사는 한참 동안 가만히 생각하고는 말하기를, “일이 이와 같으니 그대의 부대는 내일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 상주와 예천은 땅을 접하고 있으니 이후 만약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면 이와 입술의 형세처럼 서로 구원하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지극한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유생들은 삼가 지시에 따르겠다고 하고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목사도 그 자리에 있다가 같이 나와서 함께 객관으로 가서 매우 세심하게 보살피고 위로하여 주고는 돌아갔다. 조금 뒤에 소고기 20근과 곶감 10접을 보내 군사들을 먹이는데 보태라고 하였다.

19일 신유 [十九日辛酉]

아침 일찍 출발하여 회군하였다. 용궁현에서 유숙하였다.

20일 임술 [二十日壬戌]

본군 화지리(花枝里)에 도착하였다. 외면(外面)의 민정과 부중의 남녀노소가 모두 길가에 나와서 맞이해주었다. 더러는 술과 음식을 가지고 말머리 앞에서 올리기도 하였으며,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군수가 직접 서정(西亭) 밖으로 나와서 부병들을 위로하였으며 이들을 호위하여 관아로 들어갔다. 집강과 여러 집사들이 들어가서 군수를 뵙고 그간의 경과를 자세하게 보고한 뒤에 숙소로 돌아가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외촌의 민정들을 돌려보냈다. 모두 계산해보니 왕복비용이 3,000여 냥이었고, 외촌 민정이 5~6일 동안 허비한 비용도 수천 여 냥이었다. 이 모두는 본군의 공전(公錢)으로 충당하였으며 상주에 원망을 돌리지 않았다.

○ 순영문의 감결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지금 들으니 소모사의 군문에서 각 읍에 지시를 내려 새로 별포(別砲)를 신설하거나 혹은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모으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본읍에도 이러한 지시를 내렸는지 모르겠다. 대개 고을을 경비하는 일은 고을에서 각자 알아서 지키고 병사를 모집하는 일은 별도로 방법을 강구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때에 따라 적절하게 조처하면 될 뿐이다. 지금 별포를 설치하고 병사들을 모집하며 군량을 조달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은 장차 대대적으로 군대를 배치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재력이 있어서 고을에서 갑자기 이것을 쉽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또 이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는 본뜻이겠는가? 설령 소모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을의 형편으로 볼 때 순영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시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에 감결을 내리니 보고할 겨를 없이 급히 적을 물리쳐야 할 상황이 아니면 모든 사항은 반드시 먼저 순영문에 보고하고 회제(回題)를 기다려서 조처하라. 별포를 신설하고 군관(軍官)을 증액하는 것은 모두 어렵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며 다만 폐단만 만들 수 있으므로 우선 예전의 인원으로 단속을 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데 힘쓰라.
각 호(戶)마다 몇 되씩의 곡식을 할당하는 것은 절대로 시행하지 말라. 군대가 지나갈 때의 물품공급에 대해서는 ‘정해진 법식에 따라 삼등반전(三等盤纏)으로 시행하라’고 이미 이전에 감결을 내렸으니 이것도 함께 유의하여 거행하라”고 하였다.

이날 군수가 상주에 다녀온 전말을 순영에 보고한 것에 대한 회제가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웃 고을을 구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군율(軍律)이라는 몇 글자를 두려워해서 군대를 출동시킨 것은 참으로 뜻밖이다. 이후로는 비록 소모사가 감결로 신칙하더라도 먼저 보고하고 회제를 받아서 거행하라. 그리고 본군의 수비에 관하여 말한다면, 현재 이웃 고을에 위급한 상황이 없으므로 잠시 군대를 해산시키고 단지 경계만 엄격하게 하여 상황을 살펴서 대응하라. 그러면 병사들은 쉴 수 있을 것이고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잘 헤아려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기내(畿內), 경기도의 전 주부(前主簿) 박종선(朴悰善)이 소 1마리와 술 1독을 사람을 시켜 본소로 보내 부병들을 먹이도록 하였다. 원래 박종선은 업무차 여러 차례 본군에 왔었기 때문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악한 자들을 물리친 전말을 듣고 의기(義氣)를 발하여 500리 바깥까지 먹을 것을 보내준 것은 매우 드물고 기이한 일이다.

○ 순영문에서 전최(殿最)를 하였는데 군수를 상(上)으로 평가하고 제(題)하기를, “앞장서서 한 번의 승리를 거두자 모든 영남지역이 그로 인하여 안전해졌다”라고 하였다.

주석
유격장 상주소모영 휘하의 유격장은 김석중(金奭中)이었는데 경계를 넘어 옥천 영동 보은 등 충청도로 진출해 북접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삼등반전(三等盤纏) 반전은 여비 또는 노자를 말한다. 공무를 볼때 물품공급은 벼슬아치 등급에 따라 차별의 규정을 두었다. 삼등은 하등급에 속한다.
전최(殿最) 관찰사가 고을수령의 실적을 조사해 중앙에 보고하는 것으로 상(上)을 최, 하(下)는 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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