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일기(召募日記)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은 경주(慶州)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하였다.
그뒤 금상(今上), 고종 병인(丙寅), 1866년에 정도(正道)를 떠받치고 사설(邪說)을 배척하면서 대대적으로 죄인들을 처형하여 동학이란 두 글자는 마침내 나라에서 금지하였다. 그런데 무자(戊子, 1888)년부터 경인(庚寅, 1890)년 사이에 사설이 다시 성행하여 최제우의 무리인 최시형(崔時亨)은 팔도도접주(八道都接主)라고 칭하였다. 최시형의 무리 중에 전봉준(全琫準)·임국호(林局昊)·손응구(孫鷹九), 손병희(孫秉熙)·서병학(徐丙學)·이국빈(李國賓) 등 많은 사도(邪徒)들이 서로 선동하여 보은(報恩)의 장내(帳內)를 근거지로 삼고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들의 술법은 부적과 주문으로 신을 내려오게 한다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도(道)는 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베푼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었다. 또 병을 치료하고 난리를 피하게 한다는 등의 말로 어리석은 민중들을 현혹시켰으며, 결국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한다는 말로 반역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품은 지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도 매우 단단하였다.
저들이 기치를 세우고 군사들을 불러 모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자 말류(末流)의 폐단이 드러나서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으며 시신을 욕보이고 사대부를 먼저 죽이는 데 이르렀다. 저들의 장기는 정당한 조세를 납부하지 않고 공공연히 패역(悖逆)을 자행하며 무기를 약탈하고 성을 함락시키고 임금이 임명한 관리들을 해치고 임금의 군대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회유하여 흩어지게 하여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여도 잘못을 고치지 않아서 저들의 만행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동학의 난은 호서와 호남에서 시작하여 기전(畿甸), 경기도과 교남(嶠南), 경상도에 까지 미쳤으며, 이들 지역이 모두 사도들의 소굴이 되어 난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우리 성상(聖上)께서 혁연(赫然)히 진노하시어 장신(將臣)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여 한성부(漢城府)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도록 하시고, 초토사(招討使)·소모사(召募使)·소모관(召募官) 등의 여러 신하를 임명하여 나라 안에 배치시켜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을 행하도록 하셨다. 이에 갑오(甲午, 1894)년 8월에 마침 소모사로 차하(差下)한다는 명령이 내려서 나는 10월 17일에 비로소 본군(本郡), 상주에 도착하여 명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