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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894년 10월 17일 [甲午十月十七日]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동곽(東郭)의 재종제(再從弟)인 교리(校理) 정하묵(鄭夏默)이 와서 소모사로 차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날 저녁에 본부(本府)의 통인(通引) 김봉운(金鳳雲)이 인신(印信)을 가지고 왔다. 이 인신은 1866년에 소모(召募)하였을 때 돌아가신 판사공(判事公) 할아버지께서 차셨던 인신으로 본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이어서 육방(六房)의 여러 아전들이 도순무사의 감결(甘結)을 가지고 왔다.
감결의 내용에, “지금 의정부의 관문(關文)이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은, ‘의정부에서 임금께 지금 순무영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양호(兩湖)의 비류(匪類)들을 토벌하고 있으니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 중에 반드시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나주목사(羅州牧使) 민종렬(閔種烈)·여산부사(礪山府使) 유제관(柳濟寬)을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로 차하하고, 홍주목사(洪州牧使) 조재관(趙載觀)·진잠현감(鎭岑縣監) 이세경(李世卿)을 호서소모사(湖西召募使)로 차하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병을 모집하여 속히 소탕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영남은 창원부사(昌原府使) 이종서(李鍾緖)와 전 승지(前承旨) 정의묵을 역시 소모사로 차하하여 함께 비도들을 방어하도록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요약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금께서 ‘윤허한다’라고 전교하셨고 이를 받들어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원부사에게는 관문으로 신칙하고, 전 승지 정의묵은 집이 상주(尙州)에 있으니 속히 그에게 지시하여, 이들이 마음을 모으고 서로 도와서 비류들을 소탕하고 사후에 그 상황을 계속적으로 보고하라, 소모사인 전 승지 정의묵의 집은 본읍(本邑)에 있으니 감결이 도착하는 즉시 본가에 알려서 그로 하여금 즉시 소모사의 업무를 집행하도록 하라. 창원부사는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부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와 함께 상의하여 조처하라는 내용도 지시하라. 그리고 감결이 도착한 일시와 지시한 상황을 즉시 도순무사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나와 같이 재주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중임을 맡아 두렵기 그지없었다. 이날 밤 첫닭이 울 때 옥성(玉成)의 종제가 도착하였다.

18일 [十八日]

맑음. 산야(山野)의 여러 종친들이 차례로 와서 모였다. 모두들 겁을 먹은 나머지 서로 마주보고 근심하였으며 이야기가 나랏일에 미치자 눈물을 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였다. 서사리(書寫吏) 이병하(李秉夏)가 선무사(宣撫使) 이중하(李重夏)의 관문을 가지고 와서 배알하였다. 그것은 바로 10월 14일에 대구(大邱)에서 보낸 관문이며 비류들을 토벌하는 일과 관계된 것으로 원문은 『소모사실(召募事實)』에 들어있다.

19일 [十九日]

맑음. 나를 전송하러 모인 여러 가까운 친척들과 아랫마을과 윗마을의 주민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오후에 본주(本州), 상주의 포졸(砲卒)과 각수(角手) 및 역마(驛馬) 인부가 명령에 따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종제 정홍묵(鄭弘默), 조카 정재덕(鄭在悳), 재종숙(再從叔) 정동철(鄭東轍) 등과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융복(戎服)을 입고 말고삐를 잡고 길을 떠났다. 아랫마을에서 잠시 쉬었다가 초산(草山)에 잠깐 들른 뒤에 연빈관(延賓館)에 도착하니 관리들이 관례에 따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촛불을 들고 남문을 통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모자와 의복을 바꿔 입은 뒤에 공손히 전패(殿牌)를 배알하고 동각(東閣)에서 잤다. 종제 정시묵이 들어왔다.
본부(本府)에 도착한 뒤에 먼저 집강소(執綱所)의 두령(頭領)인 박명현(朴明顯), 강진규(姜進圭), 차재혁(車載爀) 등을 불러서, 그들이 앞장서서 의로운 마음을 보인데 대하여 격려하였으며, 그들이 저질렀던 범법행위에 대하여 나무랐다. 대체로 집강소라는 것은 여러 교리(校吏)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비류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장소를 마련하고 용사들을 모집한 것으로 그 무리가 이미 500여 명이나 되었다.

○ 향교에서 통문을 발송하여 회의를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도단(道壇)에서 통문을 발송하여 선비들을 모집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것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비도(匪徒)들을 토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 진장(鎭將) 유인형(柳寅衡)이 성주(城主)의 직무를 겸임하고 있어서 공적인 예로 접대하기가 어려워 다만 편복(便服)을 입고 만나보았다. 그는 힘을 합하여 비류들을 토벌할 계책을 대략적으로 개진하였다.
도단의 통문에, “저희들이 듣기에는, 양호의 비류들이 근래에 더욱 늘어나서 성을 공격하고 백성들을 약탈하여 난리의 형세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전에 정부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순무영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징발하여 비류들을 토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의병들을 불러 모아 속히 적을 소탕하라는 뜻으로 삼도에 각각 소모사를 파견하였는데, 영우(嶺右), 경상우도의 상류(上流)는 우산(愚山) 정영감(鄭令監), 정의묵께서 중요한 임무를 맡아서 이미 업무를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안위가 달린 시기에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라면 이를 소홀히 보아 넘기면서 적들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타고난 천성을 지키면서 교화가 행해지는 곳에서 살고 있으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적개심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우선 통문을 발송하고 두루 알립니다.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이달 23일에 주(州)의 북쪽 향사당(鄕射堂)에 모두 모여 기무(機務)를 의논하고 좋은 방법으로 일을 돈독히 하여 호흡을 맞추도록 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0일 [二十日]

맑음. 생각해보니 동헌(東軒)은 원래 정당(政堂)이어서 오래 거처하기에 부적당하였다. 그래서 벽유당(碧油堂)으로 내려와서 거처하고 그곳에 소모영을 설치하였다.

○ 진장(鎭將)이 와서 알현하고 군대와 고을에 관한 일을 대략 이야기하였다.

○ 산외(山外)의 여러 가까운 친척들과 고을 가까이에 사는 여러 사우(士友)들이 차례로 방문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관하여 대략 이야기하였다.

○ 방유문(榜諭文) 한 통을 작성한 뒤 형리청(刑吏廳)에 보내어 정서(正書)하도록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종제 정좌묵(鄭佐默)을 밀양(密陽) 관아로 보내어 선무사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 모레 장대(將臺)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집강소에 명령을 내려 신칙하였다.

○ 비도들이 흩어져서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다고도 하고,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고도 하며, 혹은 기포(起包)하여 조세곡식을 거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금의 위엄이 미치는 곳에서는 당연히 임금의 덕에 귀화해야 하는데 여전히 제멋대로 패악한 습성을 부리고 있으니 이들의 죄악을 어떻게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는가?

○ 이날 성문 4곳에 방을 게시하여, 비류들의 잔당이 명첩(名帖)을 가지고 와서 귀화하도록 하였다. 또 거괴(巨魁)를 잡아서 바치면 죄를 면해주고 상을 준다는 내용으로 경내에 효유하였다.

○ 형리청에서 방유문과 절목(節目) 한 통을 모두 정서하였다. 여기에 관인을 찍어 본군의 각 면에 보내고 또 각 읍에도 나누어 보냈다.
방유문의 내용에, “경상도소모사가 각 읍의 유생과 서리 및 백성들에게 방을 게시하여 효유한다. 위대하신 우리 열성조께서 대를 이어가며 인자함과 은택을 두터이 하시어 선비들의 추구하는 바가 반듯해지고 백성들의 풍속이 순수해졌다. 그래서 천한 종이나 어리석은 부부라도 정의를 두려워하고 법을 받들며, 윗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한 법도가 지금까지 500여 년을 이어오면서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였고 나라는 그 덕택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리고 특히 대령(大嶺), 조령 이남은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이름이 났으며 도내(道內)에서 골고루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었으니 거기에는 진실로 이유가 있다.
그런데 지금 국운이 험난하고 사설이 횡행하여 일종의 요괴 무리들이 동학이라고 일컬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전파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무리들이 불어나서 세력이 커지자 도처에서 추종자를 불러 모아 1,000명 혹은 10,000명씩 무리를 이루어 우리의 성읍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무기와 군량을 빼앗아갔으며, 우리의 사족(士族)을 때리고 우리의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그밖에 분수와 법률을 어기며 윤상(倫常)을 어지럽히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팔도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거의 조용한 지역이 없었는데 호남과 호서가 가장 심하였다. 관부가 정사를 집행할 수가 없고 조정이 명령을 시행할 수가 없으며,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고, 국가는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참으로 유사 이래 처음 발생한 대변란(大變亂)이다.
성상께서 밤낮으로 근심하시면서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편안하게 여기시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윤음을 반포하여 특별히 효유하시었으나 저들은 완악하게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군대를 동원하여 위무(威武)를 드러내었으나 저들은 완고하게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저들이 포효하면서 날뛰는 것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얼마 전에 정부(政府)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순무영에 신칙하여 병사들을 징발하여 비류들을 토벌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의병들을 불러 모아 속히 적을 소탕하라는 뜻으로 삼도(三道)에 각각 소모사를 파견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고 능력이 부족하여 경상우도라는 중요한 지역을 맡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나 임금이 근심하는 것은 신하에게 치욕이 되니 어찌 분골쇄신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다만 이번 변란이 불행히도 선산(先山)이 있는 고향 가까이에서 발생하였다. 대의(大義)는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니 개인적인 사정만 고려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출행하여 장차 병사를 소집하고 군량미를 모아서 저들의 뿌리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추종자들을 풀어주는 것이 삼대(三代) 성왕(聖王)의 군율임이 떠올랐다. 더구나 우리 성상과 대원위(大院位) 합하(閤下)께서는 천지와 같이 넓고 인자한 마음으로 우로(雨露)와 같은 은택을 내리시어 저들을 위로하고 정착시키면서 언성을 높이고 얼굴빛을 바꾸지 않는 것을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교만한 자식에게 대하는 것처럼 하시다가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러 마침내 사사로운 정을 끊는 조치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내가 감히 이러한 성덕(聖德)을 받들어 대양(對揚)하지 않고 곧장 무력을 동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업무를 맡은 날에 우선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어 효유하고 아래에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조목별로 기록한다. 우리의 크고 작은 백성들은 이를 잘 살펴서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경내의 비류들에게 알려주어 그들이 확실히 잘못을 깨닫고 단호히 귀화하여 살아서는 선량한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정의로운 귀신이 되도록 한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 주저하고 머뭇거리면서 겉으로는 귀화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들은 난민(亂民)임을 자처하고 국가에 대항하는 자이므로 당연히 충신(忠信)을 갑옷으로 삼고 예의(禮義)를 방패로 삼으며 민심(民心)을 성곽으로 삼아 끝까지 소탕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할 말이 아직 남아 있으니 계속되는 효유를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一 . 소모사의 임무는 오로지 의병을 모집하여 비류들을 소탕하는 데 있으니 경내의 크고 작은 백성들 중에 비류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모두 양민으로 의병이 되어야 한다.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고 5인을 1오(伍)로 편제하여, 그 가운데 용맹하고 위풍있는 자를 골라서 정의군(正義軍)으로 차출하며 정의영관(正義領官)과 정의무사(正義武士)로 차출하여 인첩(印帖)을 성급(成給)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

一 . 양민들이 비류에 가담한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화가 두려워서 들어간 자도 있고, 남의 꾐에 빠져서 들어간 자도 있으며, 남의 위협 때문에 들어간 자도 있다. 이들 모두는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사정을 알게 된다면 혹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각자 비류에 들어가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명첩(名帖)과 염주(念珠) 등의 물건을 가지고 본 군문(軍門)으로 와서 정의로운 대오(隊伍)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지난 일을 허물하지 않을 것이다.

一 . 비류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바로 접주(接主)들이 난을 피할 수 있다거나, 군역을 면제해 준다거나, 병을 치료해 준다거나, 내세에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등의 말로 유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사람을 속이는 술책이고 사람을 죽이는 계책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였다가 지금 깨달았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이미 자신들이 처신해야 할 바를 알아서 용감하게 귀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 여전히 미련이 남아 배회하며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진짜 비류들이다. 이들은 당연히 끝까지 추적하여 붙잡아 그 머리를 효수하고 그의 집을 불태우고 그의 전택(田宅)과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이웃과 친척들을 연좌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一 . 귀화한 비류들은 자신들이 접주에게 속았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 접주의 은닉처를 밀고하거나 혹은 직접 그들을 잡아서 바친다면, 이는 진심으로 자신들의 허물을 보상하는 행동이므로 더욱 가상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별도로 상을 내릴 것이다.

一 . 거괴를 잡아서 바치는 자에게는 그에 따라 후한 상을 내리라고 조정에서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렸다. 누구를 막론하고 만약 분연히 힘을 발휘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해악을 제거하는 자는 당연히 임금에게 아뢰어 상을 내릴 것임을 약속한다.

一 . 어리석은 백성들로서 비류에 들어간 자들도 이미 통탄할 노릇인데 사족이나 관속(官屬)들이 종종 잘못된 것에 물이 들었다는 소문이 들리니 매우 놀랍다. 아, 문학(文學)과 예법(禮法)을 강구하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벼슬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차마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차마 이럴 수가 있는가? 지금 만약 법으로써 처벌을 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보다 훨씬 더 엄중하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혹 어리석은 백성들보다 빨리 잘못을 뉘우칠 수 있으니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마음을 고치도록 하라. 그러면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들은 지난 잘못을 허물하지 않고 본 군문에서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길 것이다.

一 . 비류들이 귀화하기 전에는 저들을 소탕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귀화한 뒤에는 방어하는 것이 긴요한 일이다. 이는 조정에서 지시한 사항이다. 경내의 크고 작은 백성들은 힘과 마음을 합하여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고, 한결같이 본 군문의 절제(節制)에 따라 소홀함이나 차질이 없도록 하라.

一 . 예전에 본읍에서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 10에 7~8이었다. 그런데 전해들은 바로는 창검과 총 등이 더러 그 당시 면(面)을 떠났던 비류들의 집에 있으나 그들은 처벌이 무서워서 감히 반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치상 그럴 법도 하다. 진심으로 귀화하려고 한다면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더욱 훌륭한 일이니 절대로 처벌을 걱정하지 말라. 그러나 만약 감추어 두었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一 . 본 군문이나 본 진영(鎭營) 혹은 본부(本府)의 관속을 막론하고 혹 외촌으로 나가서 귀화한 백성을 두렵게 하여 동요시키고 토색질을 하려는 자가 있으면 이는 죄가 비류들의 악행보다 더 크다. 본면(本面)과 본동(本洞)에서 즉시 붙잡아서 압송하여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이때에 소식이 와전되어 일일이 믿을 수 없었다. 황간과 영동지역에서 비도들 중에 진을 치고 있는 자가 몇 만명인지 알 수 없는데도 본부의 아전과 향리가 서로 와전시켜 군정(軍政)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이때에 대의(大義)가 있는 곳이라면 비록 강한 적이 앞에 있다하더라도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어야 함을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저녁에 친구 이경능(李景能)의 말을 들으니, “경군의 영관은 바로 전에 평온(坪溫)에 있던 사과(司果) 이규태(李圭泰)인데 막 장내(帳內)에 도착하여 적의 소굴만 불태우고 청주(淸州)로 돌아가서 주둔하고 있으며, 조정에서는 다시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를 차출하였는데 그가 소모관의 직임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동의 비도들은 천여 명에 불과한데다 혼란스럽고 전혀 질서가 없으며 양식이 떨어지고 갈 길이 막혀서 원망하며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함부로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전에 집강소에서 체포한 비도 9 명을 장날에 태평루(太平樓)에 형장을 설치하여 엄하게 형을 가하여 위엄을 보이고, 다시 진심으로 귀화하라는 뜻을 원근에 효유하였다.

○ 순영(巡營), 경상감영에 관문을 보내어 병인(丙寅), 1866년에 만들어진 목인(木印)을 사용하겠다고 글을 작성하여 물었다. 그리고 일에 숙달된 영리(營吏) 1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 다시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귀화한 자와 귀화하지 않은 자의 이름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드는 일에 숙달된 아전 1명을 시켜 보내달라고 하였다.

○ 산야의 여러 가까운 친척과 친구 이세숙(李世叔)·유병문(柳秉文)이 찾아왔다.

○ 친동생 정용묵(鄭容默)이 왔다.

23일 [二十三日]

보슬비가 내린 후 맑아짐. 집강소의 병사 800여 명을 데리고 북장대(北將臺)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죄인 5명의 죄를 다스렸다. 금(金) 100여 꾸러미를 출연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돌아왔다.

○ 향내(鄕內)의 회원들이 번갈아가며 방문하여 소모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나 이러한 어려운 형국에 또 난리까지 겪게 되니 도무지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아 매우 답답하였다.

○ 하상(河上)의 생질 유문식(柳汶植)이 고향으로부터 왔다. 그를 통하여 친척들의 안부를 대략 들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향인(鄕人)의 인사들이 향사당에서 사무를 보았다. 그래서 소교(小轎)를 타고 가서 향유(鄕儒)들을 만나,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사대부들은 의로운 마음을 내어 힘을 바쳐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립시다”라고 간절히 설득하였다. 그러자 여러 사우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의논을 모아 우선 공사원(公事員)을 선출하였다. 그래서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전 현감 유도석(柳道奭)과 유학 성유원(成有源) 및 조범구(趙範九) 등의 3명이 추천되었는데 수망(首望)의 권점(圈點)이 가장 많아서 결국 유자인(柳慈仁) 어른을 의병대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진사(進士) 이영보(李穎溥)와 황의건(黃義建)을 부장(副將)으로 선출하고, 전 승지(前承旨) 조남식(趙南軾)과 전 응교(前應敎) 김근연(金近淵)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선출하여 각각 추천서(薦紙)를 써주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 저녁에 재종제인 진사 정후묵(鄭厚默)이 들어와서 만났다.

25일 [二十五日]

보슬비가 내린 후 다시 맑아짐. 향유들이 다시 모임을 가지고 각 문(門)과 각 숙(塾)에 전곡(錢穀)을 나누어 정하여 소모의 업무에 응하였다.

○ 새 성주(城主)는 곧 예안(禮安)의 사돈 이만윤(李晩胤)으로 이날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관아에 도착하였다.

○ 각처의 탐리(探吏)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 가운데는 황간과 영동의 여러 적들이 23일부터 옥천(沃川)을 넘어 공주(公州)로 향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보고는 지례(知禮)로 들어갔다가 진주(晉州)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대의 첩보(牒報)는 하나도 그 상세함을 얻을 수 없었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 지속되어 군사제도가 탄식이 나올 만큼 문란해져 있었다.

○ 이날 밤에 동헌에 들어가서 군무에 관하여 대략 이야기를 나누고 본영(本營)으로 돌아오니 닭이 이미 울고 있었다. 안석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으나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동생을 고향으로 보냈다. 또 재종숙을 율원(栗院)으로 보냈다.

○ 순영에서 회이(回移)가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목인(木印)은 정부에 보고하였으며 영리는 안동(安東) 아전 권윤장(權潤璋)을 보냈다”고 하였다.

○ 이날 밤에 주서(注書) 이중태(李中泰)가 찾아왔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각 면의 전령(傳令)과 각 면의 약정(約正)의 추천서를 일제히 발송하였다. 이 또한 군무여서 하루 종일 분주하였다. 나라가 평안하지 못하여 여러 공문서가 계속 이어지니 답답하고 한탄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있었겠는가?

○ 신시(申時)에 둘째아이 재철(在喆)이가 와서 동생의 편지를 보여주니 가슴이 트이고 위안이 되었다. 이날 밤에 새 수령이 찾아와서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줄곧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상사(上舍) 종제를 대안(大安)의 본가로 돌려보내어 밀양(密陽) 관아에 편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 교리(校理) 김손간(金巽簡)이 와서 말하기를, “저번에 향원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서성(西城)으로 갈 작정이므로 조방장의 직임을 체차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향론(鄕論)으로 추천하여 선발한데다가 또 나랏일이 시급함을 생각하면 내가 마음대로 하기는 어려웠다.

○ 선교(仙橋)의 이상사(李上舍) 어른이 노병으로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추천서를 돌려보내 왔으며, 도곡(道谷)의 조승선(趙承宣)은 비도들이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야한다고 핑계를 대었고, 유자인 어른은 성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소모에 관한 일이 아득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백의(白衣)로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옛날부터 어려웠지만 이러한 때의 이러한 거사는 더욱 답답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의 인사들도 모두 자기 집으로 흩어졌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날마다 영문으로 달려와서 호소하는 자들은 모두 귀화하여 의리를 따른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구습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따라서 국가가 다시 안정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 우산(愚山)의 계소 (稧所)에서 우선 의소(義所)로 전(錢) 130금을 분배하여 유사(有司)에게 보냈다.

○ 죄인 김경준(金景俊)을 잡아와서 엄하게 곤장을 친 뒤에 칼을 씌워 가두었다.

주석
통인(通引) 지방관아에 딸려 잔심부름하는 아전의 일종을 말한다.
도단(道壇) 도남서원을 가리키는데, 현재 상주시 도남동에 있다. 여기 유림들이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의병동원과 양곡수집의 통문을 최초로 돌렸다.
이규태(李圭泰) 순무영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공주전투에 투입되었다. 보은장내의 토벌은 장위영 영관 이두황(李斗璜)이 담당했으므로 잘못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2월 26일자로 이규태는 좌선봉장, 이두황은 우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맹영재(孟英在) 경기북부 소모관으로 임명되어 강원도 홍천으로 진출했으므로 남하한다는 기록은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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