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새벽에 전패를 배알하고 돌아왔다.
○ 선산(善山)·함창(咸昌)·용궁(龍宮)의 노련한 아전들이 보장(報狀)을 가지고 와서 대령하였다. 이들에게 회제(回題)를 내려, “저들의 괴수와 접주(接主) 및 접사(接司)들을 추적하고 체포하여 엄히 구금한 뒤에 보고하고, 그 밖의 여러 놈들은 귀화하도록 효유하라”고 하였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바람이 세게 불고 매우 추웠다.
○ 진사 강춘희(姜春熙)가 찾아왔다. 그를 통하여 서울 소식과 호서의 상황에 대하여 대략 듣고 객중의 쓸쓸하고 적막한 회포를 조금 풀었다.
○ 바로 정부와 순무영에 보첩(報牒)을 작성하여 보냈다. 대개 소모사의 명을 받은 이후에 병정의 소집과 군량의 모집에 관한 일과 새로이 병란을 만난데다 또 흉년이 닥쳐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상세한 것은 『소모사실』에 들어있다.
○ 향원들이 이따금 찾아왔으나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대책 없이 머리를 숙이고 관망만 하며 나서서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선비들의 기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근심과 탄식이 그치지 않았다.
○ 관문에서는 이미 영리를 보냈다고 하였으나 까마득히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창원부사도 언제 부임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금산(錦山)과 공주 등지가 모두 비류들에게 함락되었으며 경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이들을 토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청의 문서를 보지 못하여 매우 의아하고 답답하여 다시 탐리들을 내보냈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오늘은 노친의 생신이었으나 나라가 평안하지 못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올 겨를이 없었으니 개인적으로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동학의 난이 사방에서 일어나 무리들을 거느리고 성을 차지하며 그 위세가 매우 장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군대를 파견하고 또 일본군대를 빌려서 사방으로 출정하게 하니 그 모습이 늠름하였다. 일본군 80 명이 서울에서 호서를 지나 진주로 향하였다. 이들은 지나면서 본군의 성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의 기치와 무장은 햇빛에 번쩍이고 그 위풍은 서릿발 같아서 매우 두려웠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상사 강춘희를 보냈다.
○ 향원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게을리 하며 나서려 하지 않았으며, 조방장은 사임하는 글을 올렸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향교에 엄히 체문(帖文)을 내렸다. 이 글은 『소모사실』에 들어있다.
○ 막 일본군대를 보냈다. 또 들으니 소모군관(召募軍官) 1명이 역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와서 튼튼한 청총마(⊙)로 갈아타고 금릉(金陵) 김천으로 달려갔다고 하였다. 전쟁 때문에 어수선하여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 귀화한다는 소장(訴狀)이 날마다 관청에 접수되어 가득 찼다. 그런데 얼핏 들으니, 중화(中和) 등지에서 동학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몰래 호서의 적들과 호응하려 한다고 하였다. 왕명이 지엄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옛 습성을 바꾸지 않고 거기에 미혹되어 정도(正道)로 돌아올 줄을 모르니 슬프고 또한 애통하다.
○ 순영에서 내린 문첩(文牒)을 보니, “진주·곤양(昆陽)·사천(泗川)·단성(丹城)·남해(南海) 등지에서 동학의 무리들이 크게 일어나서 혹은 무기를 탈취하고 혹은 관장(官長)을 몰아내었다. 관군이 이들과 여러 차례 접전을 하여 거괴를 죽이고 무리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가는 곳 마다 죽이고 부상을 입힌 자들이 매우 많았다”라고 하였다. 또 들으니, 금산과 공주에서 바닷가에 이르는 지역에 저들 무리들이 많이 퍼져 있는데 임금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면서 지금 한창 토벌을 진행 중이라고 하였다.
○ 우천(愚川)의 치결(穉潔) 형님도 의병의 일로 내방하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향청의 인사들이 다시 조금씩 찾아왔으며 여러 가까운 친척들도 종종 방문하였다. 그러나 소모에 관한 계책은 전혀 내놓지 않고 단지 번거롭게 오고가기만 하였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대구의 아전이 와서 만나보았다. 그를 통하여 우하도(右下道), 경상우도의 남쪽지역의 여러 고을들은 이미 모두 난리가 잦아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마음을 놓을 수는 있었으나 병사들 사이에 잘못된 소문이 퍼져 그로 인해 술렁거리니 안타까웠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임곡(壬谷)의 동학의 괴수 강선보(姜善甫)와 가리(佳里)의 강홍이(姜弘伊) 그리고 영수(靈水)의 김경준은 거접(巨接)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강선보는 태평루 앞에서 효수하였고, 강홍이와 김경준의 2놈은 남사정(南射亭) 아래에서 총살시켰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저들은 두려워하였으며 나머지 백성들은 통쾌하게 여겼다.
○ 상사 강춘희의 편지를 연이어 받고, 청산(靑山)·황간·영동·보은 등지에서 경군과 일본군들이 소탕작전을 벌인 덕분에 저들 무리들 중에 죽은 자가 600~700명에 달하였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달아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으니 매우 통쾌하고 다행스러웠다. 다만 괴수인 최적(崔賊), 최시형은 마치 굴을 3개 파놓은 토끼처럼 끝내 포위망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어버려 잡을 수가 없었으니 매우 안타까웠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각 면의 별군관(別軍官)과 부관(副官) 및 약정(約正)들은 모두 의병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오니 이들을 응대하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다.
○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밀양 관아의 서찰을 받고서 창원부사가 그간에 이미 부임하였으며 군대가 흉괴(凶魁)를 죽였음을 알았다. 그래서 유격장(遊擊將)을 차출하여 정예 포수(砲手) 20명과 참모 5명을 데리고 밤중에 중화 등지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13일 [十三日]
비가 내림. 달성으로 가서 영백(嶺伯)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차가운 비가 세차게 내려서 하는 수 없이 명령을 거두고 마부(馬徒)를 시켜 선산부(善山府)에 사적으로 연락하였다.
○ 진주병영(晉州兵營)의 군관이 찾아와서, 진주·하동(河東)·단성·곤양이 일본군들의 소탕작전 덕택에 잠시 숨을 돌리게 되었으며 전주(全州) 이남은 지금 계엄 중이라고 하였다.
○ 동각(東閣)으로부터 순영의 기별을 받아보니 호남의 남원(南原)·서산(瑞山)·태인(泰仁) 3개 고을의 수령들이 비류들에게 살해되어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웠다.
○ 저녁에 수령을 만나서 군대를 징발하고 군량을 모으는 일을 전담시켰다.
14일 [十四日]
구름이 끼고 흐림. 이따금 보슬비가 내렸다.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조카 정재덕, 재종숙 정동철 및 참모 이병희(李秉禧)와 함께 달성으로 출발하였다. 지나면서 도곡에서 조영감(趙令監)을 방문하고 오리원(五里院)에서 잠시 쉬었다. 선산부 경계에 이르자 부사(府使)가 촌정(村丁)을 시켜 교자(轎子)를 매고 대현(大峴)을 넘도록 지휘하였다. 부(府)에서 10리가 못 미치는 곳에서 날이 어두워지자 연도에 등불을 밝히고 어느 정도 위의(威儀)를 갖추었다. 바로 동헌으로 들어가서 좌정한 뒤에 본부(本府)의 성주 윤우식(尹雨植)을 개인자격으로 접견하고 본 읍의 전후 사정을 물었다. 그는 이미 동학의 괴수 3놈을 효수하여 경계하였고 잡혀있는 신두문(申斗文)의 사람됨은 말할 것도 없이 심장을 찔러 죽일만하고 하다고 하였다. 또 개령(開寧) 수령이 평민 등을 괴롭힌 사실도 들었다. 그의 용모는 온화하고 의젓하여 절도가 있었고 어른에게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행동이 예에 알맞았다. 마치 묘령의 젊은이와 같아 아낄만하고 또한 공경할만하였다.
○ 밤에 글을 작성하여 역사(驛使)를 밀양으로 보냈다.
15일 [十五日]
맑음. 하루 종일 온화하여 따뜻한 봄날 같았다. 새벽에 수령과 함께 전패(殿牌)를 배알하였다. 식사 후에 찰미루(察微樓)에 군문을 크게 설치하고 수령과 함께 올라갔다. 죄인 신두문을 잡아들여 무덤을 파헤치고 사람을 해치며 무리를 모아 성을 함락시키려는 죄로서 남문 밖에서 총살하였다. 그리고 순영에 보고하였다. [결락]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대개 참(站)을 개설하는 장소에서는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저장한다. 그리고 50리에 참 하나를 개설한다. 동래(東萊)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1,000리가 넘는 거리가 병영(兵營)으로 이어져 있다. 저녁에 칠곡(柒谷)에 도착하여 동헌에서 잤다. 본읍 수령 남궁억(南宮檍)이 와서 인사하였다.
○ 남쪽으로 향하는 며칠 동안 도로는 적막하였으며 읍리(邑里)는 황량하였다. 지참(支站)의 공급은 소홀하고 인색하였다.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나 자신이 아주 검소하게 행동하였다. 사행(使行)이라고 하여 위세를 부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일 [十七日]
맑음. 아침에 칠주(柒州), 칠곡를 떠났다. 금호강(琴湖江) 가에 도착하니 대구부(大邱府)의 아전이 마중을 나와 인도하였다. 달성산(達城山) 아래에 이르자 참에 머무르거나 행상을 하는 일본인들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참과 옥(屋)을 개설해 놓은 것이 서울의 이현(泥峴), 진고개과 흡사하였다. 시장이 파하지 않아 물화가 나열되어 있고 사람들이 폭주하였다. 주랑(疇塱)과 같은 것이 장사에 힘써 종사하려는 뜻인 듯하다. 본부의 향사당에 머물 사관(舍館)을 정하였다. 순상(巡相), 감사과 본판(本判), 판관이 명함을 전하며 소식을 물었다.
○ 영금(靈金)을 밀양 관아로 보내어 승선(承宣)을 만나서 오도록 이야기하게 하고 사돈 박자교(朴子喬) 형님을 보았다. 저녁에 들어가서 순상 조병호(趙秉鎬)를 만나 군무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또 고을을 나누어서 관장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다.
18일 [十八日]
맑고 추움. 창원소모사도 감사에게 취임인사를 하기 위하여 왔기에 함께 만나서 소모의 일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별다른 조정의 신칙도 없었고 다만 순무영의 관방전령(關防傳令) 1통만 얻어서 왔다. 국가가 판탕(板蕩)의 사이와 같이 어지러운 때에 군사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별도로 신칙하지도 않고 또 순상도 협력하지 않으며 군량도 없고 병사도 없이 맨손으로 적과 싸워야 하니, 당연히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이 도리이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 안의(安義)수령 조원식(趙元植)이 순영에 올린 첩보를 보니 동도 수만 명이 장수현(長水縣)을 불태우고 영봉(靈峰)을 거쳐 안의와 거창(居昌)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순영에서 영관 최응규(崔應圭)로 하여금 포수 100명을 데리고 안의로 떠나도록 하였다. 시국이 이와 같아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성상께서 밤낮으로 근심하실 것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바빠진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관아 주방의 음식이 형편없어서 맛이 나지 않았다.
○ 사돈 박자교가 내방하였다.
○ 징각(澄閣)에 들어가서 순상을 뵙고 말하기를, “한 도 내의 각 군에 소모사와 토포사들이 나열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관할지역을 나누어서 관장한 뒤라야 그들이 힘을 다하여 방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상주와 선산 및 주천(酒泉), 예천의 아전들이 제멋대로 집강소를 결성하여 동학의 비적들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도리에 맞지 않는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순영에서 감결로 신칙하여야 조금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사안에 대하여 모두 관문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군량에 관해서는 조정에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었고 또 방백(方伯)도 조처해주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창원 수령의 숙소로 가서 서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또 서로 격려하고 돌아왔다.
○ 저녁에 도사(都事) 이동근(李東根)과 초관(哨官) 노애산(盧愛山)이 내방하여 함께 소모의 일이 어려움을 이야기하였는데 탄식이 그치지 않았다.
19일 [十九日]
추위가 갑자기 심해졌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 누그러짐. 승선을 계속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일은 하나도 제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군무가 시급하여 오늘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노애산이 홀로 추위를 무릅쓰고 와서 전별을 해 주었다. 도를 같이하는 두터운 뜻에 참으로 감동하였다.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자교형과 함께 출발하였다. 영리 권윤장(權潤璋)과 권석봉(權錫鳳) 및 마도(馬徒), 말몰이꾼와 서자(書者)가 배행(陪行)하였다. 하빈역(河濱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파회(坡回)의 자교형님 집에 들어가서 잤다. 돌아가는 길로 인동(仁同)과 칠곡을 택하지 않은 것은 쇠잔한 고을이 지참(支站)하기 어려움을 생각하여 길을 택하라는 감결 때문이었다.
20일 [二十日]
어제보다 갑절이나 더 추움. 아침에 출발하여 석전(石田)나루터에 도착하니, 가게는 썰렁하였고 인가(人家)의 밥 짓는 연기는 끊어져 있었다. 부득이하여 행장(行裝)에서 떡이 든 작은 봉지를 꺼내어 여러 하인들과 함께 물과 먹었다. 저녁에는 율리(栗里)의 고성령(固城令) 집에 들어가서 묵었다. 오랜만에 사촌 누이동생을 보니 조금 위안이 되고 가슴이 트였다.
21일 [二十一日]
삭풍이 불고 눈이 내림. 사람과 말이 얼고 굶주렸다. 부상(扶桑)에 도착하였는데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다. 개령(開寧)의 이졸(吏卒)이 현(縣) 경계에 나와서 지참을 해주었다. 역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역마를 이용해 개령현으로 들어가 동헌에서 잤다. 수령 민병익(閔丙益)이 개인자격으로 와서 알현하였는데, 예가 지나치게 간소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바람이 불고 추움. 길을 떠나 안실령(安實嶺) 아래에 도착하여 갑자기 일본군 100여 명을 만났다. 이들은 말에서 내려 따지고 꾸짖는 것이 매우 심하였고 윽박질렀으나 결국은 무사히 소모영으로 돌아가라는 뜻을 말하고는 떠났다. 안역(安驛)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유격장(遊擊將) 김석중(金奭中)의 첩보를 처음으로 보니, “군대를 통솔하여 중모(中牟) 땅을 출발하여 동도 5명을 시장에서 총살하고 판계(板溪)에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양산점(陽山店)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10리나 되는 길을 등불도 없이 어렵게 가다가 영리(營吏) 1명이 말에서 떨어져서 상처를 입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주(本州), 상주의 사정은 쇠잔한 고을보다 못하였으니 매우 괴이하였다. 밤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에 비로소 본영(本營)으로 돌아왔다. 또 김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중모(中牟)에서 화령(化寧)으로 가서 동괴(東魁) 8명을 시장에서 총살하고 사곡(思谷)에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영에 다녀온 열흘 동안에 본부(本府)에서 또 포졸(砲卒)을 동원하여 6명을 잡아가두었다. 소모의 길에 일마다 방해를 받으니 참으로 답답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추움. 처음에 올린 첩보 2통에 대하여 정부가 답한 회제를 보니, “비류들이 교화에 저항하여 도처에서 걸핏하면 소란을 피워 공사(公私)가 근심하고 있다. 적도들의 소굴을 박멸하여 백성들을 안정시켜서 조정에서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순무영에서는 철저히 토벌하여 깨끗하게 쓸어버리라고 하였다. 인신에 관해서는 정부에서 병인년의 목인(木印)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맡긴 책무가 매우 무거우니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는가?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식사 후에 본목(本牧)의 진장(鎭將)과 함께 태평루(太平樓)에 올라 비적(匪賊)의 괴수 6명을 총살하였다. 김유격장의 첩보가 또 도착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가 임곡에 도착하여 1명을 총살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최괴(崔魁), 최시형를 체포하기 위하여 서리와 눈을 맞으며 험한 곳을 지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힘을 다하여 의분(義憤)을 떨치니 매우 가상하다. 편지를 써서 격려하였다.
○ 오늘부터 관아의 주방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가게에서 밥을 사먹었다. 이는 고을의 폐단을 줄이기 위함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이후의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 각 지역의 사우들이 간간이 들어와 만났고 의병장 어른이 지금은 집으로 돌아갔으며 28일에 출좌(出座)할 것이라고 하였다. 응교(應敎) 김성원(金性元) 형님이 잠시 들렀다가 바로 돌아갔다.
○ 동생 정용묵이 들어와서 만났다.
25일 [二十五日]
맑고 따뜻함. 동곽의 응교사촌이 들어왔다. 친구 강심형(姜心馨)과 성귤(成橘)이 함께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계(狀啓)를 작성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오늘은 바로 동지(冬至)이다. 새벽에 전패를 공경히 배알하였다. 식사 후에 객사(客舍)로 가서 무기와 탄약들을 살펴보았다. 또 충의단(忠義壇)의 모임에 갔다. 장계 초안이 완성되었다. 원문은 『소모사실』에 실려 있다.
○ 본목(本牧)에 도착한 순영의 관문을 보니 집강소를 소모영에 소속시켜 지휘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공문을 보니 과연 여러 고을을 나누어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상주·함창·문경(慶)·의성(義城)·용궁·예천(醴泉)·예안·안동(安東)·풍기(豊基)·봉화(奉化)·순흥(順興)·영천(榮川)·청송(靑松)·진보(眞寶)·영양(英陽)의 15개 고을은 상주소모사 정의묵이 관할하고, 대구·경산(慶山)·자인(慈仁)·현풍(玄風)·하양(河陽)·신녕(新寧)·창녕(昌寧)·영천(永川)·청도(淸道)·영산(靈山)·초계(草溪)·경주의 12개 고을은 대구토포사(大邱討捕使) 지석영이 관할하고, 인동·칠곡·선산·개령·김산·군위(軍威), 비안(比安)·성주(星州)·고령(高靈)의 9개 고을은 인동토포사 조응현(趙應顯)이 관할하고, 거창·안의·함양(咸陽)·산청(山淸)·단성·삼가(三嘉)·합천(陜川)·지례·진주·하동·의령(宜寧)·남해의 12개 고을은 거창소모사 정관섭(丁觀燮)이 관할하고, 창원·칠원(柒原)·함안(咸安)·웅천(熊川)·김해(金海)·밀양·양산(梁山)·진해(鎭海)·고성·사천·거제(巨濟)·울산(蔚山)의 12개 고을은 창원소모사 이종서가 관할하도록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남사정(南射亭)에 가서 병정들을 모집하였다. 노둔하고 허약한 자를 가려내고 날쌔고 용감한 자를 뽑으니 모두 120명이었다. 서기(書記) 강심형(姜心馨)에게 계본(啓本)과 첩보를 봉해서 서성으로 가도록 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아침에 흐렸다가 낮에는 개임.
○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지난날에 포위망을 빠져 달아난 남진갑(南震甲)을 다시 청산에서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으며, 최적(崔賊), 최시형의 소재지를 탐색하고자 청산과 영동 지역에서 머물면서 기미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탄약을 보충해주시고 병정을 추가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글을 보내어 추호도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엄히 단속하였다. 또 남정(南亭)에 나가서 사격 훈련을 하고 돌아왔다.
○ 김산의 승선 조시영(曺始永)도 소모사의 자격으로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본영(本營)에 아전을 보내어 사례(事例)를 베껴서 갔다.
29일 [二十九日]
새벽에 추웠다가 낮에는 따뜻하였음.
○ 막내동생이 도남(道南)에서 왔다. 지역의 인사(人士) 100여 원(員)이 모였으며, 의병장 어른이 비로소 출좌하였다. 본영(本營)에서 포수 20명과 영관들을 보내어 그를 객사의 동청(東廳)으로 모셨다. 저녁에 동헌에 함께 가서 인사를 하였다.
30일 [三十日]
맑음. 또 의병장 어른을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사직단자(辭職單子)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들어서 치결형을 만나 간절한 말로 삼가 멀리 가지 말라고 하였다.
○ 객사에 가서 병정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수령과 함께 향사당의 모임에 출석하였다. 의병장 어른이 고사하여 감히 임명하지 못하였고 즉시 일어나 일좌(一座)에서 나가서 결국 모임을 파하였다. 결국 수령과 함께 금장(錦粧)을 살펴보고 돌아와 본영(本營)으로 이르렀다. 이때 들으니, 향사(鄕士) 30여 원(員)이 의병장 어른이 멍에 메고 가는 것까지 따라가서 진영(鎭營)에 이른 후에 말을 에워싸고 간곡히 만류하여 다시 사저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 다시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또 적괴 4명을 총살하였으며 청산의 거괴를 진중에 잡아두었다고 하였다.
○ 진주의 아전이 첩보를 가지고 와서 알현을 하였다. 그곳 형편을 들으니 대체로 상주와 비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