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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2월 초 1일 [十二月初一日]

가는 비가 내려서 얼음이 얼었으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림. 아침에 의병장 어른과 함께 객사에 출좌(出座)하여, 별포(別砲) 200명과 관포(官砲) 100명, 그리고 영관·초장(哨將)·집사(執事)·전병(典兵)·장재(掌財)·서기(書記)·종사리(從事吏) 21명을 청(廳) 아래로 불러서 월료미(月料米)를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도합 3,814되·전(錢)은 1,334냥 그리고 짚신은 300켤레였다. 종사관(從事官) 이하 여러 임원들이 하루 종일 순시를 하면서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꽤 일이 잘 되어갈 희망으로 보였다. 소문에 의병장이 대략 파임(派任)을 하였다고 하며, 또 부장(副將) 조영감(趙令監)도 들어와서 의병들을 단속하였다고 하였다.

○ 순영의 회이(回移) 2통을 보았다. 친구 이근중(李根中)의 편지도 함께 도착하였다. 김유격장이 있는 곳에 답장을 보냈다.

○ 서기인 유생 이경직(李炅稙)이 사퇴하였다.

초 2일 [初二日]

바람이 불고 추움. 죄인 3놈을 잡아 가두었다. 보은(報恩)에서 본부(本府)로 보낸 공문에서 말하기를, “유격대가 경내에 들어와서 폐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유격대에게 군대를 철수하여 오게 하였으나 만약 최괴(崔魁)가 떠난 자취를 알아 비록 도의 경계를 넘어 멀리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쫓아가 사로잡도록 하였다.

○ 가서 의병장 어른을 만나 계획을 대략 설명하고 돌아왔다.

○ 친구 이병희(李秉禧)가 본가(本家)에서 와서 군무를 맡으려고 하여 그에게 교련(敎鍊)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때 비로소 동서남북 방위의 색으로 글씨를 써서 각 방위의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옷에 붙이게 하여 전후좌우의 대오를 나누었으며 일어서고 앉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전법을 조금 훈련시켰다. 그러나 태평한 시기가 오래도록 이어져서 군사제도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또 근래에는 국가에서 신식제도로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이는 모두 외국의 제도로 가르치는 것이어서 갑자기 변경하기가 어려웠다. 비록 자아(子牙)가 법을 집행하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가 용병을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초 3일 [初三日]

바람이 불고 추움. 의병장 어른과 함께 남사정(南射亭)에 나가서 대포를 시험하고 상을 주었다.

○ 10월의 공첩(公牒)을 보니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이 모두 정도(正道)를 떠받치고 동학을 배척하고자 의(義)를 드러내서 재산을 덜어내어 순무영의 군수에 보태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윗사람에게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함이 이와 같다.

○ 친구 강성제(姜聖齊)의 집에서 떡 1상자를 보내와서 군사들과 나누어 먹었다. 부담없이 친구 이 선물을 받아 요기를 할 수 있었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 대오를 편성할 때 병졸 1명이 잘못하여 상처를 입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지인영관(知印領官)들을 보내어 문병을 하고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병졸과 괴로움을 나누는 것은 장수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초 4일 [初四日]

추위가 조금 풀림. 별포(別砲)의 성명, 나이 및 주거지를 직접 검토하여 1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 오후에 성을 순시하였다. 서문(西門)에서 남쪽으로 갔으며, 남쪽에서 동문(東門)을 거쳐 북쪽으로 갔으며, 북쪽에서 서쪽으로 가서 열석(閱石)에 모여서 무예를 관람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정이 나에게 이 직책을 맡긴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 탐리가 와서 보고하였다. 이를 통하여 호남의 동학무리가 광양(光陽) 등지에 많이 모여서 하동의 관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데 승부는 아직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 5일 [初五日]

맑고 추움. 감기 기운이 약간 있어서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그만두었다.

○ 대체로 상주는 나라의 한쪽 구석에 있으며 조령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낙동강의 상류이고 영남의 요충지이며, 경계가 양호(兩湖)와 접하고 서울로 가는 길과 통한다. 그러므로 조정이 특별히 하나의 소모영을 설치하여 방어하려는 것이다. 가볍지 않고 중요하나 300년 동안 훈련을 받지 못한 병졸들과 갑작스럽게 모인 오합지졸들이어서 장수는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는 전투를 알지 못한다. 총을 들고 군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한갓 인의(仁義)만 떠들어대고 있다.

이들이 갑자기 적을 만나면 전투도 하기 전에 스스로 와해될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독서하는 선비들이 지금 조정의 명령 아래에서 의분을 떨치며 충성을 바치는 것이 비록 매우 가상하기는 하지만, 대오를 나누고 병졸들을 통솔하는 것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과 같으며, 절제(節制)하는 사이에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 지나치게 심하며, 직무를 나누어 정할 때에 사람에 따라 애증의 감정이 생기니, 전쟁을 어린아이 놀이로 생각하고 와언(訛言)을 책략으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소모사와 의병장 사이를 이간질하고 참소하는 말을 만들어서 틈을 벌이려고 한다. 이는 곧 근본을 살피지 않고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의병을 일으킨 것은 소모사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효유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의병으로써 창의(倡義)를 공격하는 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돌이켜 반성할 따름이다.

○ 탐리 이건영(李建榮)과 박성은(朴性誾)을 강좌(江左), 경상좌도의 여러 고을로 보냈다.

초 6일 [初六日]

추위가 더욱 심해짐. 부수(副帥)가 집으로 돌아갔다.

○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청산으로부터 영동으로 가서 동학의 무리 김경연 등 4놈을 총살하니 호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군대의 위력을 크게 떨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의병장 어른이 기치를 세우고 대장 단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것 또한 처음부터 잘못된 관례이며 막하(幕下)의 여러 유생들이 의병장을 잘못 인도하였으니 한탄스럽다. 의병소(義兵所)에 가서 보니 많은 선비들이 운집해 있고 병정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그 위엄 있는 모습이 찬란하여 볼만하였다. 그런데 부수와 방장들은 부모를 뵈러 간다고 핑계를 대거나 혹은 서울로 간다는 구실을 대서 맡은 일을 폐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좌초관(左哨官)과 우초관(右哨官)를 데리고 먼저 사정(射亭)에 가서 무예를 시험하였다.
얼마 후에 의병장 어른이 나왔는데 앞에는 병정들이 옹위하고 뒤에는 유생들이 호위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피리를 불면서 장수의 막사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장수의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을 하였으며 여러 유생들도 따라서 절을 하였다. 이것이 과연 옛날의 예법에서 나온 것인가는 모르겠으나 적을 토벌하여 임금의 걱정을 덜어드리겠다고 병사들과 맹약을 하였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격시합을 한 뒤에 큰 소 1마리와 쌀 50되를 내어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 300명의 포졸과 많은 영관들이 모두 몰려와서 하소연하였다. 그 사정을 살펴보니 의병장이 한 달 동안 출좌하다가 하루아침에 독단적으로 통제를 하니 생소하다고 하였다. 소모사가 왕명을 받들어 진무(鎭撫)를 하고 있는데다 또 순영의 감칙(甘飭)도 오래되어서 바꾸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병장 어른의 체면을 보아서 이들을 타이르고 꾸짖어서 돌려보냈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우산(愚山)의 집으로 어머님을 뵈러 가려고 말을 내어 와서 출발하려던 때에 영관과 초장들이 300명의 포수를 데리고 와서 앞을 호위하며 소모사인 나를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끓는 물과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죽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뜻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나 그것을 그대로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소모영에 돌아온 뒤에 도와달라고 신칙하여 되돌려 보내고 단지 병정 10명, 사령 2명, 통인 2명만 데리고 갔다. 남장사(南長寺) 앞에 도착하여 회군하는 유격대의 행렬을 만나서 출진한 이후의 전말을 대충 들었다. 그리고 사졸들이 한 달 내내 갑옷을 입고 있어서 매우 피로한 기색을 하고 있음을 보고는 따뜻한 술 2항아리를 사서 장수와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영관에게 고을로 돌아간 뒤에 소를 잡아서 사졸들을 먹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저물녘에 우산에 도착하니 노모는 문에 기대어 서 계시고 어린 아이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가 되고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술 1항아리와 곶감 1접을 내어서 데리고 온 병졸들을 먹여 추위를 녹이도록 하였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진시에 초장 2명이 뜻밖에 찾아왔다. 이들이 가지고 온 유격장의 편지를 보니, “영동 수령의 급보 내에, 호남의 비도들이 무주(茂朱)의 설천(雪川)과 영동의 월전(月田)에서 의병과 접전을 하였는데 저들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 의병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사태가 매우 위급하므로 밤을 새워 달려와서 구원해달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선 영리한 아전 2명을 급히 보내어 탐문하도록 하고 초장과 병정을 유격대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김산소모사(金山召募使)의 공문이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무주의 비류들이 장차 영남으로 가려고 하니 이들을 방어하는 데에는 귀영(貴營), 상주소모영과 폐영(弊營), 김산소모영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속히 정예포수 200명을 선발하여 추풍령(秋風嶺)으로 가서 막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화 등지는 폐영상주소모영의 요충지이여서 우리 군대는 이곳을 방어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귀영김산소모영이 추풍령을 방어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내용으로 즉시 답장을 하였다.

○ 유격장에게 특별히 군사들을 교련시키고 가서 힘껏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미시(未時)에 종사(從事)인 사돈 박자교 형님이 내방하여 함께 방책을 논의하였다.

○ 고을 수령의 편지와 유격장의 서찰이 급히 도착하였는데 거기에는, “호남의 비도들이 혹은 수만 명이라고 하고 혹은 수천 명이라고 하는데 지금 황간과 영동 등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영동과 청산의 여러 아전들이 본진(本陣)에 사통을 보내어서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김유격장으로 하여금 포수 150명을 데리고 중모(中牟)지역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서 진격하도록 하였으며 또 세작(細作)을 각처로 나누어서 보냈다.

11일 [十一日]

맑음. 특별히 탐문하여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유격대의 주둔지에 내렸다.

○ 선교의 참봉 이경식과 연사(蓮史) 숙부가 왔다.

○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동각(東閣)의 거처에서 급보가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청산·황간·영동 3개 고을의 성이 이미 함락되어 본주(本州)의 인심이 동요하고 있으니 빨리 와서 진어(鎭禦)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하다가 이 급보를 듣고는 편안히 앉아서 먹을 겨를도 없이 급히 먹고는 행장을 꾸려서 조카 재덕(在悳)과 연사 숙부와 함께 즉시 어려운 행보를 시작하였다. 내현(柰峴)을 넘으니 하늘에서 눈이 내려 날씨는 더욱 추워졌고 밤에 더욱 심해지려 하였고 말도 굶주렸다. 횃불 하나를 밝혀서 앞길을 인도하도록 하여 말을 달려 숲을 통과하였다. 재종숙 향숙(香叔)과 말을 탄 채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경(四更, 오전 1~3시)에 연빈관(延賓館)에 도착하니 눈은 미끄럽고 길은 캄캄하였으며, 말은 얼어서 넘어지고 사람은 굶주려서 축 늘어져 참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군성(郡城)에 도착하여 비로소 음악소리를 들었으며, 마중을 나온 아전이 등불을 밝히고 위의(威儀)를 베풀었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니 종사관인 친구 강석희와 조희우(曺喜宇)가 중도에서 나를 맞이하여 함께 들어갔다. 본영(本營)에 도착하자 성주(城主)와 종제 정시묵 및 강치원형님이 내방하였다. 이들과 함께 걱정을 하며 적을 방어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100여 명의 의병들과 기치를 세웠던 의병장이 하루아침에 모두 흩어져서 성이 텅 비고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고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 본영에 도착하여 유격장의 급보를 보니, “그간에 호남의 동학무리와 영동의 용산(龍山) 뒷 골짜기에서 접전을 하여 비도 1놈을 사로잡고 조총 2자루를 회득하였습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려고 할 때에 사방을 돌아보니 적의 세력이 매우 크고 사방이 산과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병(奇兵)을 이용하여 적을 묶어놓고 서서히 퇴각하여 율계(栗溪)에 주둔하고 있으니 병정들을 더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40명과 탄약 200근을 보내주었다. 그날 밤에 당장 관문을 발송하여 안동·주천·의성·문경·대구·용궁·함창 등의 고을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작성하여야 할 문서는 엄청나게 많은데 이를 작성할 사람은 단지 영리 2명과 서기 몇 명뿐이었다. 문서를 발송할 때는 닭이 이미 울고 있었다. 그리고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였다.

12일 [十二日]

추움. 새벽에 일어나서 수령에게 전갈을 하였다.

○ 유격장의 11일 첩보를 보았는데 내용은 지난번의 첩보와 대동소이하였다. 그런데 가장 급박한 것은 온 성내의 인심이 새와 물고기가 놀란 것처럼 마치 끓는 솥과 같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직접 다니면서 효유하고 또 일을 잘하는 노련한 아전들을 뽑아서 4곳 성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 사방의 면에 전령을 보내어 동북지역의 촌정(村丁)들은 성으로 들어와서 성의 수비를 돕고 서남지역의 촌정들은 주요 도로를 방어하도록 파발을 띄워서 지시하였다.

○ 향원들 가운데 고을에서 의병의 주둔지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 간간이 내방하였다.

○ 아침을 먹은 뒤에 군사와 백성들 1,000여 명을 소집하여 남사정에 나가서 2놈을 효수하고 4놈을 총살하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또 적을 방어할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 연이어 유격대의 첩보를 보니, 11일에 접전한 이후로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져서 이미 산안(山岸) 땅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는데 그 숫자가 매일 1,000명을 헤아렸다. 비록 삼부(三府)가 직접 다니면서 강력히 금지하였으나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9월의 변고 때 혼이 났기 때문이다. 성 안팎이 어수선하여 마치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즉시 정부와 순무영에 보고하였으며, 본주本州의 아전을 각 고을로 파견하여 병사를 구한다고 하였다. 구원병이 온다고 하고는 오지 않은 것은 적병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언비어가 날마다 생겨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수선함이 끊이지 않았다. 새벽닭이 운 뒤에야 조금 눈을 붙였다.

13일 [十三日]

새벽에 일어났다. 연이어 화서(化西) 약정의 첩보를 보니 동적(東賊)이 청산으로 가서 청주의 군대와 용산에서 접전을 하였는데 청주의 군대가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여 청산 대동(大洞)에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급히 안동·주천·의성에 관문을 보내어 군대를 데리고 출정해 줄 것을 재촉하였으며 또 군대를 보내어서 구원해달라고 남영(南營)에도 재촉을 하였다. 연이어 상주 본토의 촌병(村兵)들을 보내어 화서와 모서(牟西)의 여러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고, 내서(內西)의 병사들로 율원(栗院)을 지키도록 하고, 북장(北長)과 외서(外西)의 병사들로 삼령(三嶺)을 지키도록 하고, 남면(南面)의 병사들로 수내(藪內)를 지키도록 하고 북면(北面)의 병사들로 성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것은 시장사람들을 내몰아서 전투를 하도록 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우리 군대의 위용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오후에 병사와 백성들을 태평루(太平樓)에 대대적으로 소집하여 군대의 위용을 검열하였다. 이방(吏房) 이하 모두 무기를 들고 옹립하였으며 창수(槍手)와 총수(銃手)들이 꽤 볼만하였다.

○ 박종사(朴從事)형님과 장고성령(張固城令), 수령명칭이 멀리서 와서 본영의 막사에 거처하며 함께 대책을 의논하였다.

○ 달성(達城)에서 돌아온 뒤에 장계를 작성하여 그간의 경과 및 유격장을 편의(便宜)대로 차출하고 종사관을 자벽(自辟)하여 보좌하도록 한 사실 등을 낱낱이 기록하여 친구 강심형을 시켜 서울로 보냈는데, 이 장계에 대한 정부의 회제가 오늘같이 어수선한 때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비적의 괴수를 박멸하고 잔당들을 귀화시켜 한 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사람들의 마음이 고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 종사관과 유격장을 거론한 것에 대하여는, 소모사는 원래 장계로 보고하는 규례가 없으며, 또 관원을 임명하라는 조정의 명령도 없었는데 어떻게 편의대로 차출하였다느니 자벽하였다느니 하는 내용을 갑자기 등철(登徹)하는가? 매우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원래의 장계를 되돌려 보낸다.
의로운 마음을 내어서 협조한 신사(紳士)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알기 바란다. 추운 계절에 많은 지역의 시골용사들이 야외에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애처롭다. 먼 지역에서 모집해온 용사들은 차차로 돌려보내고 본 지역의 민병(民兵)만으로써 방어하도록 하라. 지역을 나누어서 순행(巡行)하는 일은 본도의 감영과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며 일을 더 키워서 도리어 민폐를 끼치도록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순무영(巡撫營)의 회제에, “군량미가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부호들에게 곡식을 빌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다. 또 ‘담박(澹泊)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가 없고 영정(寧靜)하지 않으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힘써야 할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 강심형님의 편지를 보고 비로소 현재 소모사와 소모관으로 순무영에서 파견된 자들이 거의 수십 명에 이르며 또 순무영에서 임명한 별군관(別軍官)과 종사관도 수십 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전쟁터에 나아가서 적을 토벌할 때에 폐단을 짓는 일이 없을 수가 없어서 도리어 황송한 처분을 받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주유격장 김석중이 청산으로 갔을 때 읍리(邑吏) 중에 거괴인 자 1명을 체포하였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금백(錦伯)에게 모함을 당하여 정부에 전보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영영(嶺營), 경상감영으로부터도 금백이 한 것처럼 헐뜯는 말을 많이 들었다. 호서와 영남에서 번갈아가며 헐뜯으며 곳곳에서 비방의 말이 떠도니 순무사도 불안하여 이러한 회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만약 정부의 회제의 내용대로라면 그 공적을 칭찬하고 그 군사들을 위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래의 새로운 규례에는 도백(道伯)이나 초토사가 아니라면 관원을 자벽하거나 편의로 차출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소모사가 제멋대로 계문(啓聞)한 것을 법도에 어긋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유격장의 일에 관해서는 그를 조정에 헐뜯는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어서 결국은 상하의 거리가 현격하게 벌어져서 참된 마음을 전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분하고 억울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응교(應敎) 사촌이 승선 정대경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대략적인 내용에, “정부와 순무영의 회제를 받아보고 매우 의아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두렵고 불안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종사관과 유격장을 차출하는 일을 장계로 보고하는 규례는 원래부터 없다고 운운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임진1592년과 병자1636년 이래 우리 영남의 선배들 가운데 이 소모사의 직임을 맡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종사관을 맡을 만한 사람들 몇 명을 자벽하고 계문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은 뒤에 임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글들이 이들의 유집(遺集)에 실려 있습니다.

저는 시골구석에서 과문한 탓으로 옛 규례만 알고 최근의 규례는 알지 못하여 이처럼 법도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살펴보면 용서할 만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유격장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모사의 책무는 오로지 의병을 불러 모으는 것이며 의병의 파임은 이른바 조방장과 좌우부장(左右部將) 및 유격장 등의 명색이 있으며, 이 또한 선배들의 기존의 규례임은 임진년과 병자년 이래 영남의 여러 창의록(倡義錄)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번의 장계에 ‘편의대로 임명하였다’는 등의 말을 감히 특별히 적었는데, 이는 얼핏 보면 혹 괴이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적을 논하자면 그들을 임명한 사실을 덮어두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애당초 마음대로 관직을 주려고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소모사인 제가 비록 사리에 밝지 못하고 예법에 어둡기는 할지언정 어찌 감히 조정의 명령도 없고 옛 규례에도 없는 일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총재(摠裁)어른께서 이 점을 헤아리시지 못한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청곤(淸梱), 충청도병마절도사이 유격대가 와서 청산의 백성들을 괴롭힌다고 전신(電信)으로 정부에 보고하자, 정부에서는 영영(嶺營)에 전신으로 신칙하였으며, 다시 영영에서는 소모영에 문서로 지시를 내려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를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 유격장 김석중은 백면서생으로 적의 창끝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공로를 세운 점은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병사들을 데리고 적도들을 체포하고,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추호도 양민들이나 귀화한 자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니, 그에게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한 지역이 그 덕택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도 경계를 넘어서 다른 지역을 침범한 것도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적도를 체포할 때에 오직 적도들만을 따라가다 보니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호서 4개 고을의 경내로 깊이 들어가서 며칠 동안 돌아다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우두머리 4~5놈을 잡자 호서와 영남 2개 지역의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 4개 고을의 비당(匪黨)들이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그것이 청곤의 귀에 들어가고 서울과 지방 각지에 소문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을 더 이상 소모영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어찌 안타까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호서지역에 있을 때는 비류들이 두려워서 움츠리고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상주로 돌아오자마자 호남으로 흩어져 도망갔던 적도들이 다시 무주에서부터 차례로 기포(起包)하였습니다. 이들이 영동을 거쳐 청산에 이르자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영동 수령은 이 사람의 계책이 믿을 만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는 편지를 써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미 군대를 인솔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향후의 승패는 아직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청곤이 보고한 바와 같다면 영동 수령이 어찌 반드시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굴러가는 구슬은 움푹 패인 곳에서 멈춘다’고 하였습니다. 정승에게 이런 사정을 잘 이야기하여 잘 처리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비록 사리에 어두우나 결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 때문에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습니다. 이 또한 함께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하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순무영의 회제에서는 또 ‘군량미가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사가 없으면 어떻게 적도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적도들이 물러나지 않고 쳐들어오면 관부와 민간에서 축적해둔 것들이 적도들을 위해 축적한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도 이 도리를 알고 있는데 대원융(大元戎), 도순무사의 식견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니 매우 의혹스럽습니다.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서는 진정으로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도 되며 이렇게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국가의 존망이 눈앞에 닥친 때에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가 아무런 까닭 없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며 집안과 국가의 화를 재촉하겠습니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구미에 맞는 평온(平溫)한 약제로 관격(關格)이 되어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증상을 치료하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틀림없이 적의 세력을 도와서 충의(忠義)의 마음을 꺾으려는 것이니 더욱 통탄할 노릇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종형(宗兄)께서는 평소에 믿음이 두터우며 나라를 위하여 모든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회제를 받은 이후로는 불안해하면서 빨리 소장(疏章)을 올리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강력한 적도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매우 위급하기 때문에 절목(節目)을 작성할 여가가 없습니다. 여러 번 생각한 끝에 형에게 부탁을 드리니 이곳의 사정을 깊이 살피시어 정승에게 자세하게 말씀드려서 뒷마무리가 잘 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유격대가 와서 청산의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한 것은 변명을 하지 않아도 그것이 거짓임이 분명합니다. 이는 당시 청산 수령 조만희(趙萬熙)가 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격대가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고 의분을 떨치고 있음을 크게 칭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충후(忠厚)하고 청렴하신 종형께 보답하기를 바란다면 제가 비록 사리를 모른다고는 하나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과연 순무영의 말대로 하여 군량이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는다면 소모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적도들을 없애지 않으면 나라는 하루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형께서 정사를 보시던 초기에 우선 유궁(儒宮)과 계가(契家)에서부터 양호(良戶)와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의껏 의로운 마음을 발동하여 재물을 출연하여 군수에 보태어서 힘들이지 않고도 군량이 풍부해졌습니다.
동학의 난 이후에 상주에는 집강소가 생겨났으니 이는 성 안팎의 인민과 이서(吏胥)들이 조직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군대를 조직하였으니 군사들은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모였습니다.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부호들에게 고을을 곡식을 빌리는 일은 애당초 한 적이 없습니다. 이에 정형(鄭兄)에게 보내는 청산 수령의 편지를 동봉하니 이것을 가지고 이곳의 사정을 여러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밝혀주시면 서울의 들뜬 논의가 자연히 분명하게 밝혀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4일 [十四日]

맑음.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적도들은 청산에 머물고 있으며, 청주의 군대는 퇴각하여 원암(元巖)에 주둔하고 있고, 일본군은 황간에 있으면서 김산 소모영의 군대와 서로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그 위세가 상당하다고 하였다. 여러 고을의 군대는 아직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남영(南營), 진주병영의 군대는 오래 전에 출발하였다고 하나 전혀 보이지가 않으니 답답하였다. 사돈 박형(朴兄)이 돌아왔는데, 그가 가지고 온 순영의 공문을 보니, 유격대가 경계를 넘어가서 백성들을 괴롭힌다고 금백이 정부에 전신으로 보고를 하자, 정부에서 영영(嶺營)에 전보로 신칙하였으며, 영영에서는 본영(本營), 상주소모영에 공문을 발송하여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사람이 포의로 공을 세운 사실은 이제까지의 문첩(文牒)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공을 덮어두고 그 죄를 나무라는구나. 이는 맹영재와 선봉장 이규태가 앞장서서 적을 토벌하여 임금께서 그 공적을 칭찬하셨는데도 사람들의 비방을 받아 그를 소환하여 논죄하라는 의논이 생겨나기에 이른 것과 같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남촌(南村)의 거괴 4놈이 9월의 변고 이후에 호서로 도망가서 최적(崔賊) 및 이괴(李魁)와 함께 몰래 무리를 모아 무주로 가서 오늘의 화를 조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몰래 남촌으로 들어와서 기포하여 내응하고자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래서 즉시 정예 포수를 출동시켜 이들을 잡아다가 엄히 조사하여 승복을 받아내었다. 그래서 당일 오시에 문루(門樓)에서 개좌(開座)를 하여 이들을 모두 효수하자 온 경내가 썰렁하고 부중(府中)이 숙연해졌다.

○ 8월 이후의 조지(朝紙)를 보니, “동학의 난이 크게 발생하여 난리가 생기지 않은 곳이 없다. 해주(海州)와 관동(關東)도 모두 소란스러우나 한편으로는 토벌하면서 한편으로는 위무하고 있다. 양호지역은 죽은 자가 몇 만 명이나 되는지 모르고 전투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재물이 어찌 부족하지 않고, 백성들이 어찌 궁핍하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나랏일을 걱정하며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었다. 비류들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이는 본디 천벌이다. 그러나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어, 고향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군수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전쟁터에 나간 자들은 전투를 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으니 더욱 걱정이 되고 답답하였다.

15일 [十五日]

구름이 끼고 흐림. 새벽에 유격장의 편지를 보니, “황간에서 온 일본군이 16명이며, 또 추후에 65명이 더 왔습니다. 김산 소모영에서도 유격장이 군대를 이끌고 왔으며, 청주의 군대도 멀리서 주둔하며 서로 돕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일 적을 토벌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 의성의 장교(將校)가 와서 알현하고 말하기를 장차 300명의 포수를 데리고 당도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들으니 안동 좌익장(左翼將) 권수종(權秀琮)이 300명의 포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고 하였다. 용궁과 함창에서도 군대가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기다렸으나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천에는 새로 편성한 수천여 명의 포군(砲軍)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이들은 줄곧 구원하러 와달라는 부탁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래서 거듭 관문으로 신칙하였다.

○ 영금(靈金)을 한양으로 보내어 정부와 순무영에 첩보를 전하도록 하였다. 첩보의 내용 중에 유격장의 일에 대해서는 단지 옛 규례만 알고 최근의 규례는 알지 못한다고만 하였다.

○ 저녁에 용궁 포수 20명과 함창 포수 19명이 도착하였다.

16일 [十六日]

닭이 울 때 군관 차재형(車載亨)이 용궁과 함창의 포수들을 데리고 와서 유격장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때는 새벽이었는데 유격장의 편지를 보니, “일본군 16명이 다시 율계에 모여 있는데 장차 성현(星峴)으로 옮겨서 주둔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적도들은 지금 청산읍에 머물고 있는데 서쪽 옥천(沃川)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청주의 군대와 이들을 협공하려고 약속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밀양 관아에서 온 편지를 보러 동헌으로 들어가서 수령들의 고과 기록을 보니 밀양은 중중(中中)이란 낮은 평가를 받았다. 노인의 처지가 매우 딱하게 되었다.

○ 오시에 남영의 군대가 비로소 주(州)에 도착하였다. 날씨가 추움을 빙자하여 술로 몸을 녹인 뒤에 내일 군진(軍陣)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 진장(鎭將)의 첩보를 보니 개령의 창수(槍手) 100명이 상주진(尙州鎭) 관하로 징발되어 멀리서 와서 대령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잠시 성 밖에 머물면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훈련받지 않은 병졸들이 머물러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군량만 축낼 뿐이었다.

○ 저녁에 동헌에 들어가서 진장(鎭將)과 군량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 공전(公錢)과 출연한 곡식으로 시급한 부분부터 지급하기로 하였다.

○ 화서의 첩보를 보니, “적도들이 지금 보은의 관기(館基)로 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군관 차재형이 올린 고목(告目)을 보니, “유격대는 보은의 마로시(馬老市)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일본군과 우리 군사를 합한 숫자가 231명이고, 용궁과 함창의 포수가 도합 270명입니다. 남영의 군대와 김산의 군대도 와서 유격대와 만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저녁에 성을 순시하며 군사들을 위무하였다. 닭이 울고 난 뒤에 잠시 눈을 붙였다.

17일 [十七日]

맑음. 추위가 사람을 괴롭혔다. 새벽에 남영의 군사 50명을 징발하여 화서 광주원(廣酒院)으로 보냈다. 개령의 창수 100명을 유격대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적을 토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연도(沿道)에서 폐단만을 일으킬 것 같은 생각이 곧바로 들어서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하였다. 하루 종일 유격장의 편지를 보지 못하여 매우 답답하였다.

○ 안동의 군사 300여 명이 왔는데 총[砲]을 가진 자가 100명이었고 창을 가진 자가 200명이었다. 이들을 통솔하여 온 자는 참봉(參奉) 권수종과 서기(書記) 권재중(權在重)이었다. 음식 한 상을 보내어 그들을 대접하였으며 또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궁핍한 시기에 많은 군사들을 먹일 양식과 멀리 출정하는 군대의 경비 등 소용되는 물자가 매우 많았으나 재물을 담당한 여러 아전들이 여기저기에서 주선하여 부족하지 않게 충당할 수 있었다.

18일 [十八日]

맑고 추움. 안동의 군대가 추위를 무릅쓰고 멀리서 와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 적의 사정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하루를 머물면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오시에 유격장이 15일에 보낸 편지를 보았다. 이것은 군관 차재형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 편지에는, “지금 일본군과 함께 청산에 주둔하고 있는데 내일 보은의 원암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 선무사 이중하가 내무협판(內務協辦)으로 소환되어 한양으로 가다가 지나는 길에 본영(本營)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에게 소모의 전말에 대하여 대충 설명을 하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간 뒤에 응교사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김유격장의 북곡(北谷)의 승리는 그 공적이 과오를 덮기에 충분하다고 말하였다. 아, 이선무사는 김유격장의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과오를 덮는다”라고 말을 하였다. 중간에 호서와 영남의 유언비어에 미혹되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 주천의 병사 500여 명이 예리한 무기를 들고 총을 쏘면서 북문으로 들어왔는데 마치 본 고을에서 일을 벌이려는 듯이 그 기세가 매우 난폭하고 행실이 법도에 어긋났다. 북쪽사람들의 용맹으로써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공을 믿고 무력을 자랑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세상의 수준이 더욱 낮아지고 군사제도가 규율이 없어졌음을 이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단호하게 군율로 다스려야 하였으나 적이 가까이 있는데다 또 들으니 호서의 단양(丹陽)과 영동 등지의 사태가 급박하다고 하여 잠시 물러나서 본읍(本邑)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 밤에 하현(下縣)의 종제 정홍묵의 편지를 보고, 적도들이 보은부(報恩府)에 머물러 있고 유격대는 원암시(元巖市)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유시(酉時)에 보낸 편지에, 유격대가 어제 종곡(鍾谷)으로 들어갔으며 포성(砲聲)이 크게 들렸다는 내용을 보고는, 유격대가 적도들과 접전을 벌이면서 그들을 추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19일 [十九日]

맑음. 추위가 맹위를 떨쳤다. 새벽에 운량색리(運糧色吏) 박시범(朴時範)의 고목을 보니, “유격병과 청주의 군대가 17일에 적도들과 보은의 풍취점(風吹店)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밤새도록 포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산의 유격장이 선산의 군사 150명·개령의 군사 150명·인동의 군사 100명·성주의 군사 20명 및 남영의 병사 149명을 데리고 어제 율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주 소모영의 군량을 이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후 이들은 눌암시(訥巖市)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 식사 후에 안동과 주천의 군대를 돌려보내고 돌아갈 때 필요한 경비를 지급하였다. 다만 안동 포수 40명과 본읍의 포수 40명과 함께 화서로 출발하였다. 유격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가 직접 전선으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갈 때 데리고 간 사람은 조카 정재덕과 연사(蓮史) 숙부였다. 강진규는 영관으로 따라갔고, 박규홍(朴圭洪)은 전병(典兵)으로 따라갔고, 강덕상(姜德相)은 서기로 따라갔고, 이용필(李容弼)은 사화(司貨)로 따라갔고, 김수영(金守永)은 교련으로 따라갔다. 영리 권윤장은 별선(別選)으로 따라갔고, 군관 차재형과 통인(通引) 차재욱(車載旭)·박갑금(朴甲金)도 모두 따라갔다.
신촌(新村)에 도착하여 잠시 쉬면서 마을의 장정들을 효유하였다. 율원에 도착하여 또 신촌에서처럼 효유하였다. 저녁에 화서시(化西市)에 도착하여 회군하는 유격장 김석중과 만났다.
그가 보고하기를, “16일에 청산에서 군대를 출발하여 보은·수피(水陂)·원암·신전리(薪田里)에 도착하니, 적도 수만 명이 보은읍으로 가는 길에 공해를 부수고 민가 2채를 불사르고 한 부(府)를 분탕질한 뒤에 풍취점에 머무르고 있는 적도들과 합세하여 종곡촌(鍾谷村)으로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일 밤 삼경(三更)에 귀인교(貴人橋)에서 식사를 하고 의병 포수 200명·일본군 43명·저의 동생 김직중·성귤·성걸·김제홍·황교택(黃敎澤) 등과 약속을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종곡의 동구(洞口)에 이르자 적도 4명이 불을 피워놓고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칼로 3명을 찌르고 이어서 한 놈을 묶은 뒤에 일일이 취초(取招)하자, 적도들이 청산에서 이 동(洞)으로 와서 머무르고 있으며 지금 금소촌(金召村)의 촌가(村家)에 있는 자들은 바로 동학의 괴수 4~5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달려가서 그 집을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더니 총에 맞아 즉사한 자가 3명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국호와 정대춘이 그 안에서 죽었다고도 하였으나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이때 문득 사방을 돌아보니 적도들이 종곡 대촌(大村)에서 총을 난사하여 총알이 빗발치듯 하였고 그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좌대(左隊)와 우대(右隊)로 나누었으며, 일본군이 가운데에 위치하고 우리 군사들은 좌우를 맡아 협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이때가 바로 17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였습니다. 해시부터 18일 날이 밝을 때까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전진하였으나 승패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주위를 둘러보니, 흰옷을 입은 적도들이 마치 화살촉과 삼대처럼 빽빽하게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적도는 많고 우리는 적으며, 적도는 높은 지역에 있고 우리는 낮은 지역에 위치하였습니다. 우리 군사를 하나하나 둘러보니 모두 승리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며 혹은 겁이 나서 도망치려는 자도 있었습니다.
저는 고함을 지르면서 군사들을 격려하고 성귤, 성걸과 김제홍 등을 다그쳐서 칼을 뽑아들고 군사들의 뒤에 서서 물러나지 말라고 엄히 신칙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원숭이가 기어오르고 호랑이가 포효하듯이 한 걸음에 총 한방씩 일제히 총을 쏘면서 전진하여 산허리에 다다르니 적과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이에 더욱 총을 빗발치듯 쏘아대자 적도들 가운데 총탄에 맞아서 꺼꾸러져 절벽 아래로 추락한 자들이 거의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적의 기세가 조금 꺾여서 퇴각하여 긴 언덕에 의지하였는데, 그 언덕은 산 정상에서 100보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정상을 탈환하자 일본군들도 봉우리의 좌측에서 올라왔으며, 늘어서서 총을 쏘아대자 마침내 적도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습니다. 총에 맞아 즉사한 자들이 전후하여 모두 395명이었으며 그밖에 뒷 골짜기의 시내와 숲 속에서 죽은 자들이 골짜기와 계곡을 가득 메웠는데, 이들은 서로 뒤엉켜 있어서 그 숫자가 몇 백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적도들이 물러간 뒤에 날은 이미 미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전부 죽이지 못한 이유는 총알이 떨어지고 배고픔이 심하였으며 뒤에서 지원하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사들을 정돈하여 마을로 들어올 때에 갑자기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청주의 관포(官砲)와 옥천의 의병들이 나타나서 나머지 적을 추격하여 남악(南岳)으로 가는 길에서 27명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상주의 군대가 공을 세운 것을 부끄럽게 여겨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고 급히 나머지 적들을 추격하여 갔습니다. 마을에 들어간 뒤에 적도들의 군수물자(輜重)를 획득하였는데, 우마(牛馬) 100여 필과 양총(洋銃)·약환(藥丸) 및 상당수의 집물(什物) 등을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일본인들이 가져가고 우리 군대가 얻은 것은 단지 우마 112필·환도(還刀) 15자루·철창(鐵⊙) 42개·기치 10면·나팔 1쌍 뿐이었습니다. 보은수령 이규백(李圭白)이 적을 격파하였다는 첩보를 듣고 군문까지 걸어와서 매우 감사해 하였으며 유격대를 고을로 들어오라고 극구 초청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성에 들어가서 유숙하고 오늘 화서로 돌아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군대가 이르는 곳에서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율계를 떠난 뒤로는 상주에서 출연한 곡식을 조달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나는 마을에서 모두들 의로운 마음으로 출연하여 도와주었으며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종곡에서는 적도에게 획득한 군수물자 가운데서 큰 소 2마리를 동중(洞中)에 내어 놓아 난리가 끝난 뒤에 경작할 때 사용하라고 하자 길가던 사람들이 모두들 숙연해 졌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산·남영·선산·인동·개령의 군사들은 우물쭈물 관망하다가 겨우 보은에 도착하였으나 적도들은 이미 격파된 뒤였다. 화서로 가서 주둔한 대구의 군사 50명은 시장의 가게에 드러누워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급하게 소집하여도 버티면서 명령을 듣지 않고 도리어 말썽만 일으켰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화시(化市)에 있던 군사 400여 명과 종군색리(從軍色吏)에게는 의연곡식을 특별히 지급하였다.

20일 [二十日]

적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들렸다. 군대를 돌려 북정(北亭)에 이르자 성주(城主)가 육방(六房)과 삼현(三絃)을 데리고 와서 유격대를 보고는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 뒤에 출발하였다. 악기와 기치가 전후에서 호위하였으며 사이사이에 마을의 장정들이 창을 들고 북을 치며 춤을 추었으니 마치 태평시대와 같았다. 토성(土城)에 도착하자 진장(鎭將)이 일행을 인도하여 남문을 통해 들어갔다. 태평루(太平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었으며 군사들은 모두 기뻐서 춤을 추었다. 남영의 초장이 비로소 50명을 데리고 뒤이어 성으로 들어오자 성주가 그를 누대 위로 불러서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구원하러 온 군사들이 시장에서 드러누워 나라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상영(上營), 남영의 본뜻이겠는가? 나는 이를 자세하게 남영에 보고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리를 파하였다. 인동토포사 조응현이 군대를 데리고 출발한 뒤에 선산에 이르러 본부(本府)에 노문(路文)을 보내왔다. 그래서 본부에서 편지를 보내어 출정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적을 물리친 뒤여서 더 이상 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21일 [二十一日]

맑고 화창함. 객사(客舍)에서 군사와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안동·용궁·함창의 군대를 돌려보내었으며 각각 노문을 지급하였다. 대구의 군대에도 마찬가지로 경비를 지급하였으며, 그간에 적을 격파한 사실을 모두 적어서 순영에 문서로 보고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기생들을 불러들여 즐겼다. 김유격장의 병정들도 모두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며 춤을 추었는데 그 기상이 볼만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남사정에 가서 1명을 효수하고 9명을 총살하였다. 이어서 들으니 적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혹은 청천(靑泉)으로 달아나고 혹은 괴산(槐山)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탐문하고 그간에 적을 추격하고 접전하였던 때의 일들을 정부와 순무영에 보고하였다. 또 유격대의 일과 군대를 퇴각한 일에 대하여 별도로 별단(別單)을 작성하여 본부(本府)의 관노(官奴)를 시켜 보냈다.

23일 [二十三日]

맑고 추움. 남정(南亭)에 나가 사격훈련을 하였다. 순영이 본부(本府)에 답한 관문을 보니, “유격대가 세운 공적이 보고한 바와 같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이에 의거하여 정부에 답전(答電)을 보낼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실과 어긋난다면 후일에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바람이 불고 추움. 사정에 나가서 사격훈련을 하고 동학의 괴수 3놈을 죽였다.

○ 순영에서 염리(廉吏)를 보내어 5가지 사안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그것은 군량미의 확보·군사의 모집·유격(遊擊)·출전(出戰) 및 의병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 문제에 대하여 조금의 잘못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대답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매우 추움. 평부소(平賦所)에서 별포(別砲)의 정월 급료와 관포(官砲) 및 여러 집사들의 급료를 이전의 수량과 같이 지급하였다.

○ 김산소모영에 비류 1명이 있는데 그가 무주의 적도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소문은 믿기가 어려워서 김산소모영에 편지를 써서 상황을 알아보았다.

26일 [二十六日]

맑고 추움. 중부(仲父)께서 편지를 보내셨는데 집으로 돌아오신 다음에 부치신 것이었다. 늘그막에 관직을 사임하시고 추위를 무릅쓰고 먼 길을 오셨으니 매우 안타까웠다.

○ 적을 물리친 뒤에 처음으로 순영의 공문을 보니, 정부와 순무영에서 방백에게 신칙하였는데, 그 내용은 고을을 순행하지 말고, 폐단을 일으키지 말고, 종사관과 유격장에 관하여 공문을 올리지 말고, 군사를 모집하는 일에 더욱 만전을 기하라는 등의 일이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칠 것을 자나 깨나 근심하고 있지만 재주는 얕고 사안은 중대하여 걸핏하면 방해만 되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 본영(本營)에서 200금을 내어서 서쪽으로 전투를 하러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27일 [二十七日]

맑고 화창함. 김산소모사의 답장을 보니, “영동과 옥천에서 기포한 놈을 잡았는데 바로 보은의 거괴 황하일(黃河一)의 매부였습니다”라고만 하였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후손인 참판 송도순(宋道淳)의 편지를 보니, “그의 동생인 진사(進士)형이 화북(化北)의 광정리(光亭里)로 우거하였는데 동학의 무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군사들에게 학대를 당하여 편안할 날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전령을 보내어서 별도로 그를 지키고 보호하도록 하였다.

○ 박사돈의 편지를 보니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탐문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적을 물리친 소식을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 중부께서 내일 입산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앉아서 행차를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을 먹은 뒤에 말을 타고 가서 뵈었다.

28일 [二十八日]

새벽에 구름이 끼었다가 저녁에는 개임. 본부(本府)에서 이졸(吏卒)들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수령과 함께 수레를 타고 북대(北臺)로 갔다. 먼저 별포(別砲)의 기예를 시험하고 이어서 이졸들을 모집하였더니 그 들쭉날쭉한 보폭과 체계가 잡히지 않은 대오가 별포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 오후에 순영의 공문을 보니 우선 유격대의 통쾌한 승리를 칭찬하고 이어서 군량 모집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였다.

○ 이날 밤에 동헌에서 술 한 통과 안주를 보내왔다. 마침 강성제와 강치원형님 및 종제 성중(聖中)이 동석하였다. 이들과 실컷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닭이 울 때 잠이 들었다.

○ 영리 2명을 안동으로 돌려보냈다.

29일 [二十九日]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꾸렸다. 문 밖에는 눈이 3자나 내렸다. 하인들과 병정들이 모두 눈이 많이 쌓여 길이 험하다고 백방으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난리가 조용해진 이때에 어머니를 모시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정리(情理)였다. 그래서 옷을 털고 말을 탔다. 유격장과 함께 신촌점(新村店)에 도착하니 마침 친구 성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악수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시니 해는 어느덧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유격장을 포정(浦亭)의 본가로 돌려보냈다. 구리현(九里峴)에 도착하니 길 왼편에 초막(草幕)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촌민들이 적을 지키는 곳이었다. 신시에 집에 도착하였다. 난리소식을 듣고 눈을 무릅쓰고 나가서 적을 잡아 회군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위로는 임금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아래로는 노모의 마음을 위로하였으니 금년 한 해를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었다. 밥 짓기를 재촉하여 데리고 온 병정들을 먹이고 또 노자를 주어 떠나보냈다.

○ 13일에 서울로 보낸 하인이 오늘에야 비로소 돌아왔다. 강서기(姜書記)의 편지를 보고 서울소식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첩보의 회제는 아직 얻어 보지 못하였다.

30일 [三十一日]

맑음. 오늘은 섣달그믐이다. 새벽에 선조의 사당을 배알하였다. 진시에 수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이 편지를 통하여 군대를 파한 뒤에 관부(官府)와 양반가의 하인들이 민촌(民村)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어서 엄히 주의를 주었음을 알았다. 여러 부로(父老)들을 배알하였다. 노친을 모시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떡을 굽고 술을 마시면서 밤새도록 즐겼다. 전쟁으로 쌓였던 피로가 오늘 한꺼번에 풀렸다. 잠을 청하려는데 어린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윷을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보면 이 몸이 어린아이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백발이 성성하니 참으로 세월이 빨리 지나감을 느끼겠다.

주석
자아(子牙) 주(周) 여상(呂尙)의 자. 강태공(姜太公)이라고도 하는데, 주 무왕을 도와 폭군 주(紂)를 쳤다.
소식을 들었다 영호대접주 김인배(金仁培)는 순천 광양에 농민군을 이끌고 주둔 하면서 하동을 석권하고 진주병영을 점령하였다.
호남의 비도 손병희의 북접군은 공주전투 패전후 전봉준과 함께 남하하여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임실에 은거중인 최시형과 함께 근거지인 북쪽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수만 명을 헤아렸다. ‘호남의 비도’는 부정확한 표현이다.
청주의 군대 청주에는 충청병영이 있었고 친군영(親軍營)의 하나인 진남영(鎭南營)이 있었다. 이들 군사는 공주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주변 농민군 토벌에 동원되었다.
자벽(自辟) 조선 후기 일부 특정 관직의 임용을 해당 관아에서 독자적으로 행하던 제도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신의 인사는 이조에서 무신의 인사는 병조에서 담당하였으나, 소수의 관직은 해당 관서에서 단수로 추천하여 임용토록 하였다.
유궁(儒宮)과 계가(契家) 유궁은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모신 향교, 계가는 양반 선비들의 친목계 등을 말한다.
북곡(北谷) 보은 종곡(鍾谷)의 잘못 표기. 종곡을 마을사람들이 보통 ‘북실’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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