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월 1일 [乙未正月朔日]
아침에 맑았다가 오후에는 흐림. 새벽에 일어나서 선조의 사당에 공경히 배알하고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렸다. 종족들이 모두 모여 집안이 태평하고 나라가 태평함을 다투어 칭송하였다. 이어서 차례를 지냈다. 진시에 서울로 갔던 하인이 돌아와서 양춘(養春) 형님의 서찰을 전해 받고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의 편지도 보았다. 이를 통하여 근래의 서울 소식을 알게 되었다. 또 수령의 편지도 보았는데, 이를 통하여 순사(巡使), 감사가 상주목에 대단히 화가 나서 수리(首吏)를 잡아들이라고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전에 순영의 군사들이 이 고을에 왔을 때, 겉으로는 구원하러 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폐단을 일으켰으며, 종곡에서의 위기상황을 먼 산 쳐다보듯이 하며 시장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그래서 수령이 태평루에서 이들을 꾸짖었는데 이는 공분(公憤)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영(棠營)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였으니 매우 의아스럽다. 저물녘에 종숙모 의성 김씨(金氏)의 석전(夕奠)에 참석하였다.
○ 아랫마을과 윗마을의 여러 종친들과 옥성·판계·하현의 여러 동생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이번의 모임은 그 기쁨이 전보다 배나 되었다. 이날 밤에 큰 눈이 내려 도로가 막혔다. 오두막이 추워서 모두들 추위에 떨었다. 가난한 친구들과 친척들이 딱하였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새벽에 응교사촌 집에 가서 조전(朝奠)에 참석하였다.
○ 신시에 강성제 형님과 연사 숙부가 내방하였다.
초 3일 [初三日]
구름이 끼고 흐림. 본영에 머물고 있는 병정들이 폐단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어 편지를 보내어 엄히 주의를 주었다.
초 4일 [初四日]
아침에 눈이 오고 오후에 개임. 소모사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받은 이후 수개월만에 비로소 한가한 시간을 얻었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서울로 간 심부름꾼이 차례대로 돌아왔다. 정부의 회제를 보니, 지난날에 유격장의 일은 명쾌하게 밝혀져서 문제 삼지 않았으며 도리어 격려하였다. 이어서 정무정(鄭茂亭)과 이이당(李二堂)의 편지를 보고, 호남의 전봉준과 손화중(孫華仲)이 이미 체포되고 호남과 호서가 평정되어 전쟁이 끝나 조정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논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유격장이 영관과 초장 및 본부(本府)의 아전 16명과 사령 2명을 데리고 방문하였다. 신년하례차 온 것이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영리 권윤장이 와서 알현하였다.
초 7일 [初七日]
낮에는 개였다가 밤에는 눈이 옴. 새벽에 고조부 석파공(石坡公) 휘(諱) 진(辰)의 사당에 다녀왔다.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이날은 증조모의 기일이다. 어지러운 세상이어서 슬픈 감정을 배나 억누르기 힘들었다.
초 9일 [初九日]
맑고 추움. 편지를 써서 당헌(棠軒), 감영에 보냈다.
○ 유격장의 편지를 보았다.
초 10일 [初十日]
맑은 뒤에 흐림. 영리 권석봉과 집사 김규섭(金圭燮)이 방문하였다. 유격장에게 답장을 보냈으며 아울러 수령에게도 편지를 부쳤다.
11일 [十一日]
아침에는 흐리고 낮에는 눈이 옴. 본부(本府)의 아전 박시용(朴時容)이 방문하였다.
12일 [十二日]
맑음. 모서 약정(約正)의 품목(稟目)을 보니, “비도들이 여전히 영동과 옥천 등지에서 선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정탐을 하도록 하였더니, 경군과 일본군이 비도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용산시장(龍山市)에 모였는데 그 숫자가 40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
13일 [十三日]
맑음. 하상(河上)의 생질 유문식이 왔다.
14일 [十四日]
영금(永金)을 서울로 보냈다.
○ 미시에 중부께서 왕림하셨다.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기력이 튼튼하셔서 걱정보다 기쁨이 더 컸다. 본동(本洞)의 민정(民丁) 80여 명을 모아 앞 숲에서 점고를 하였다. 모두들 창을 메고 돌을 들고 나온 것이 제법이었다.
15일 [十五日]
새벽에 눈이 오고 낮에 개임. 선조의 사당에서 차례를 지냈다. 조카 정재덕을 율원으로 보냈다. 사시에 성주(城主)가 왕림하였다. 공형(公兄)들도 와서 알현하였다. 고을의 사정이 어수선하여 왔다가 바로 돌아갔으니 서운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 미시에 양춘(養春) 형님의 편지를 보니, “서울에 갔던 일들은 이미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 연숙(蓮叔)이 내려왔다. 이번에 많은 문서들을 작성한 것은 이 연숙(蓮叔)의 힘에 많이 의지하였다. 그런데 사흘이나 못 보다가 만나니 매우 위로가 되었다.
16일 [十六日]
비가 오고 눈도 내림. 순상이 답장을 보내어, 방어할 병사들은 있으나 군량이 없느니 매우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수령의 편지도 보았다.
17일 [十七日]
맑고 따뜻함. 문득 초봄의 따뜻한 날씨를 만나서 매우 화창한 기운이 감돌아 들에서는 얼음이 녹고 그늘진 낭떠러지에는 눈이 떨어지니, 이를 통하여 군자의 도가 왕성해지고 소인의 도가 쇠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사 숙부 및 조카 정재덕과 함께 본영(本營)으로 돌아갔다. 지나는 길에 초산(草山)에 들렀다. 영빈관(迎賓館)에 도착하니 유격장과 영관이 병정들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시에 성에 들어가서 성주(城主)를 배알하고 진장(鎭將)을 만났다.
18일 [十八日]
맑음. 순영문에서 보낸 공문을 보고 근래 비류들이 차츰 토벌되자 정부에서 각도의 소모사를 줄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인적으로는 신발을 벗고 신선이 되어 올라가는 것과 같았으나 국가의 은혜에 만의 하나도 보답하지 못하였음을 돌아보니 부끄럽고 두렵기 그지없었다.
19일 [十九日]
맑음. 본부(本府)의 이졸(吏卒)들로 부대를 편성한다고 하여 본영(本營)의 군사 200명을 함께 데리고 가서 사격훈련을 하고 날이 저문 뒤에 돌아왔다.
○ 상사(上舍)종제의 편지를 보고, 종곡에서의 전투 이후에 경향(京鄕) 각지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모함을 하여 염찰사(廉察使)가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떠나기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세상일이 태항산(太行山)처럼 험준하여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승선사촌과 개령 이병익이 내방하여, 수령을 불러서 함께 한 바탕 연회를 열었다.
20일 [二十日]
맑음. 소모영의 회계장부를 마감하기 위하여 대안과 하현의 종제를 불렀다.
21일 [二十一日]
비와 눈이 내리다가 오후에 개임.
○ 지역의 사우들이 번갈아가며 내방하여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다.
22일 [二十二日]
눈이 내림. 사촌 정홍묵이 왔다. 그를 통하여 노문사(勞問使) 박준성(朴準成)이 서울에서 파송되어 호서를 지나 호남으로 향하면서 상주를 들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전혀 소식이 없기에 조정에서 지방의 일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장재색(掌財色)에게 장부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23일 [二十三日]
맑고 추움. 봉대(鳳臺)에 가서 친척인 강오수 어른을 뵈었으며 지나는 길에 동곽의 강상사 어른을 방문하고 응교사촌의 집에서 잠시 쉬었다가 돌아왔다. 장부 작성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는데 돌아갈 날은 급하여 사람을 답답하게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본영(本營) 아래에 있는 여러 이졸들을 객사로 불러 모았다. 진장과 유격장도 합석하였다. 자리가 파한 뒤에 이졸들을 불러 무기를 반납하고 귀농하여 각자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였다. 간혹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병졸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바람을 맞으며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5~6개월 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였기 때문이니 그 사정이 또한 측연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가서 진장을 만나고 돌아왔다.
○ 서울로 갔던 심부름꾼이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이이당과 정무정의 편지에는 최근 군대를 철수한 사정을 자세하게 이야기 하였다. 또 서쪽에서 온 소식을 들으니, 박노문사(朴勞問使)가 금영(錦營)에서 곧장 완영(完營)으로 갔다고 하였다.
○ 각처의 인사들이 전별차 방문하여 온 집안에 가득하여 도리어 고민거리가 되었다.
○ 영리를 불러서 봉투를 봉할 때 사용하는 목인을 본부에 전해주어 본부에서 다시 정부에 납입하도록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눈이 내림. 이날 마감한 장부를 1부는 정부로 보내고, 1부는 순상에게 보내고, 1부는 본부(本府)로 보내고, 1부는 소모사가 가지고, 1부는 영리에게 주어 후일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먼저 영리와 마도(馬徒)들을 보내고 이어서 지역의 사우들과 이별하고 길을 떠났다. 연빈관에 도착하니 여러 이졸들이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번갈아가며 술을 권하였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취기를 이길 수 없었으며, 이별의 정 때문에 차마 길을 갈라서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나루터의 정자에서 배회하며 지체하였다. 여러 이졸들은 모두 눈물을 머금고 일제히 절을 하였다. 마침내 말을 타고 떠나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갔다. 별포 수십 명이 중도까지 따라와서 소모사댁의 하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나 도리로써 꾸짖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소모사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받고 말을 타고 떠난 날부터 군대를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모두 100일이었다. 아, 우리나라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여 온 나라가 두루 잘 다스려졌다. 그러나 오백년 동안 태평한 시대가 오래되어 문무관료들은 안일에 젖어있고 백성들을 무기를 알지 못하고 장수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사스런 비도들은 호미와 가래를 잡은 무리들이나 부적을 갖고 주문을 외는 요괴들에 불과하였으나 이들이 고부 한 고을에서 창기하자 나라(海東) 전역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우리 성상께서 발끈 노하시어 장수에게 정벌을 명하시니, 1년 안에 온 나라가 평정되었다.
이 모두는 성상의 계획이 치밀하고 나라의 운명이 긴 덕택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미천한 신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무기를 내려놓고 직책을 그만두고 각건(角巾)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성주(聖主)의 은혜가 아님이 없다. 형은 아우에게 가르쳐주고 아비는 자식에게 일러주어 대대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받고 소모사로 재직하던 기간이 100일이나 되었으니 매일 매일의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에 조카 정재덕과 재종숙 정동철씨와 함께 전말을 기록하니 이상과 같다.
금상(今上) 32년 을미1895년 2월 상현(上弦)에 소모사 정의묵이 산수헌(山水軒)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