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장계로 보고함[同日啓聞]
승선원(承宣院)에서 열어보십시오. 구함(具銜) 신(臣) 정(鄭, 정의묵)
이번에 의정부에서 계하(啓下)받은 내용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양호(兩湖)의 비류(匪類)들을 지금 순무영(廵撫營)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하니 멀고 가까운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 가운데 틀림없이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나주목사(羅州牧使) 민종렬(閔種烈)과 여산부사(礪山府使) 유제관(柳濟寬)을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에 추가로 차하(差下)하고, 홍주목사(洪州牧使) 조재관(趙載觀)과 진잠현감(鎭岑縣監) 이세경(李世卿)을 호서소모사(湖西召募使)로 차하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병을 모집하여 하루속히 소탕하도록 하고, 영남(嶺南)은 창원부사(昌原府使) 이종서(李鍾緖)와 전 승지(前 承旨) 정의묵(鄭宜默)을 역시 소모사로 차하하여 함께 방어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를 윤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지금 감영에 도착한 의정부(議政府) 관문(關文)에는, “전교의 내용대로 받들어 시행하라. 창원부(昌原府)에는 관문으로 신칙하고 전 승지 정의묵의 집은 상주(尙州)에 있으니 속히 통지하여, 힘을 합하여 서로 도와 비류들을 소탕하고 이후의 상황을 계속 신속하게 보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의정부의 관문에 의거하여 감영에서 상주에 보낸 관문에는, “소모사 전 승지 정의묵은 집이 본 고을에 있으니 감결(甘結)이 도착하는 즉시 본가에 통지하여 그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창원부사는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협력하고 도우는 방도는 그가 부임하기를 기다렸다가 서로 의논한 뒤에 조치하라고 통지하라. 감결이 도착한 일시와 통지한 상황을 속히 보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관문과 첩정의 내용이 같았습니다.
신은 천박한 재주로 외람되이 성은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노모가 죽을 날이 가까워 오랜 병으로 고생을 하자, 신은 병수발을 들면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궁벽한 산속에 엎드리고 있으면서 한갓 대궐을 간절히 그리워한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하(啓下)하신 명령을 받았으나, 어리석고 미천한 신이 어찌 그 직임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명분과 의리로 보아 편안히 있을 수만은 없기에 바로 일어나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조령(鳥嶺) 이남은 평소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성인의 교화에 푹 젖고 현자의 가르침을 익히며, 선비는 올바름을 추구하고 백성은 풍속이 순후하여 성대하게 국가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종의 요괴의 무리들이 동학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비결(秘訣)과 주문(呪文)으로 속이며 도참설(圖讖說)을 억지로 끌어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고 무리를 모아 날뛰다가 마지막에는 성읍을 불태우고 무기를 약탈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도리를 거스름이 더욱 심해지고 난의 형세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남김없이 토벌하여 섬멸해야 마땅하지만 임금의 은혜는 하늘처럼 커서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둔하고 완고하여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국 이래 처음 있는 극악한 도적입니다.
신은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걱정하며 의병을 규합하여 도적을 소탕할 방도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방문(榜文)으로 효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습니다. 10월 10일에 신(臣)은 상주목(尙州牧)으로 달려가서 우선 거괴(渠魁) 강선보(姜善甫), 강홍이(姜弘伊), 김경준(金京俊) 등 3놈을 잡아 엄히 형문(刑問)하여 공초(供招)를 받아내자 모두들 자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달 초 9일 오시에 신은 상주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 상주진 영장(尙州鎭 營將) 유인형(柳寅衡)과 함께 문루(門樓)에서 개좌(開坐)를 하여, 강선보는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시키고 강홍이와 김경준은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이달 14일에는 선산부(善山府)로 달려가서 적괴(賊魁) 신두문(申斗文)을 체포하여 그 고을의 부사(府使) 윤우식(尹雨植)과 함께 군사와 백성들을 크게 모아놓고 그를 총살하여 백성들을 경계시켰습니다. 상주 고을에서 빼앗긴 무기는 차차 거두어들여, 총 83자루, 창 33자루, 환도(環刀) 15자루를 환수하였습니다. 그밖에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무리들은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명을 이미 내렸기 때문에 본 주(州)의 경내에서 마음을 고치고 귀화하겠다고 서로 이끌고 달려와서 호소한 자가 1,630명인데, 그들이 호소한 사정을 듣고 정상을 참작하여 편안히 농사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렸습니다.
비류들을 방어하는 대책은 오로지 의병을 일으키는 데 달려있습니다. 본 고을의 유생(儒生), 아전, 백성 가운데 애당초 동학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팔을 걷어붙이며 신속하게 단결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정예를 뽑아 별포군(別砲軍) 200명을 창설하여 현재 매일 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위급한 때에 투입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거듭 흉년이 들고 난리를 겪은 나머지 관아와 민간의 곳간이 모두 텅 비어서 군량을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이 거족과 부호들이 의로운 마음으로 힘을 보태어 당장 시급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하였으나 만약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계속 버틸 방도가 없을 것 같아 벌써부터 매우 걱정이 됩니다.
신은 이달 17일에 본도 감영으로 가서 도신(道臣, 관찰사) 조병호(趙秉鎬)와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창원부사(昌原府使) 이종서(李鍾緖), 대구판관(大邱判官) 지석영(池錫永), 인동부사(仁同府使) 조응현(趙應顯), 거창부사(居昌府使) 정관섭(丁觀燮)도 모두 소모사(召募使)와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편의에 따라 협력하도록 하고, 부근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맡아서 일체로 방어하는 방도를 마련하였는데, 신이 맡은 고을은 안동(安東), 상주(尙州), 청송(靑松), 순흥(順興), 문경(聞慶), 예천(醴泉), 영천(榮川), 풍기(豊基), 의성(義城), 용궁(龍宮), 봉화(奉化), 진보(眞寶), 함창(咸昌), 예안(禮安), 영양(英陽) 등 15 개 고을입니다. 신(臣)은 즉시 이들 고을을 순시하여 그 허실(虛實)을 살피고 의병들을 규합한 뒤에 보고할 계획입니다. 다만 이렇게 바둑알처럼 널려있는 여러 고을은 그 면적이 넓기 때문에 이곳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규찰한다면 정밀하게 살피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응교(前 應敎) 장승원(張承遠), 유학(幼學) 강석희(姜奭熙), 박해조(朴海祚), 조희우(曺喜宇) 등 4인을 자벽(自辟)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이들에게 임무를 맡겨 파견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신(臣)은 19일에 대구부(大邱府)를 떠나 22일에 상주목에 돌아와서 상주목사 이만윤과 함께 거괴(渠魁) 남계일(南戒一), 손덕여(孫德汝), 최선장(崔善長), 이의성(李義城), 장판성(張判成), 피색장(皮色匠) 억손(億孫) 등 6놈을 잡았으며, 24일 신시에 신과 당해 목사 이만윤, 상주진 영장 유인형과 함께 문루에서 개좌하여 이들을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부근 여러 고을에서는 비류들이 무리를 모아 소란을 일으키는 곳이 일단 사라졌습니다. 다만 본 주의 형세는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와 접하고 있으며 적의 소굴이 위치하여 거괴(渠魁)가 출몰하고 있습니다. 온 영남이 동학에 물든 것은 전적으로 저들이 무리를 불러 모아서 사악한 설을 퍼뜨리기 때문이므로 저들을 소탕하는 방도를 다른 고을보다 더욱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주(本州)의 유학 김석중(金奭中)은 학문과 재주가 일찍부터 향리에 알려졌으며,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침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여 한 무리의 부대를 통솔하여 흉괴(凶魁)들을 섬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편의대로 그를 유격장(游擊將)으로 차출하고 정예 포군 20명을 주어 계획을 세워 적을 잡으라고 하였더니, 용감하게 전진하여 우선 거괴(巨魁) 구팔선(具八善), 김군중(金君仲), 유학언(兪學彦), 조왈경(趙曰京), 정순여(鄭順汝), 서치대(徐致大), 김자선(金子仙), 김민이(金民伊), 원성팔(元性八), 김달문(金達文), 강만철(姜萬哲), 김철명(金哲明), 이용복(李用卜) 등 13놈을 잡아 일일이 공초를 받고 사정을 알아낸 뒤에 모두 시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총살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기뻐서 복종하였으며, 그 덕분에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임무를 맡기고 성공을 기대하였더니 기대 이상의 훌륭한 공을 세웠습니다. 난리는 극에 달하고 인재는 구하기 어려운 이 시기에 일개 의사(義士)를 얻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격려하고 권장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상황을 함께 보고드립니다.
개국(開國) 503년(1894년) 11월 29일. 서목(書目)을 갖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