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의정부와 양호도순무영에 보고함[同日報議政府兩湖都廵撫營]
첩보(牒報)하는 일입니다. 의정부에서 계하(啓下)받아 보낸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10월 19일부터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15개 고을을 나누어 맡아서 의병을 규합하고 비류들을 토벌하였으며 그 상황을 이미 등보(謄報)하였습니다. 상주는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적의 소굴이 위치하여 거괴(渠魁)가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격장 김석중(金奭中)을 보내어 그에게 앞으로 나아가서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도착한 동 유격장의 치보(馳報)에 “11월 27일에 충청도 보은(報恩) 점동(店洞)에 도착하여 남진갑(南眞甲)을 잡았습니다. 이놈은 전에 총을 맞고 도망간 놈으로 죽다가 살아난 자인데 지금 다시 잡았으니 잠시도 살려둘 수가 없어 바로 총살하였습니다. 29일에는 충경포(忠慶包) 접사(接司) 여성도(呂聖度)와 같은 무리 김성칠(金成七), 청산읍(靑山邑)의 거괴(渠魁) 강경중(姜敬重)을 잡아 모두 청산읍 동시(東市)에서 총살하였습니다. 12월 초 2일에 청산 거남리(車南里)에 들어가서 비류의 선봉장 서오덕(徐五德)과 포덕장(布德將) 김경연(金景淵)을 잡아 그날 총살하였습니다. 초 4일에 옥천(沃川) 횡지(橫池)에 도착하여 옥의포(沃義包) 대장(大將) 정윤서(鄭允瑞)를 사로잡아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군대를 돌려 영동(永同)으로 향하여 또 좌익장(左翼將) 장여진(張汝振)을 잡아서 초 5일에 황간(黃澗) 수석촌(水石村) 앞에서 총살하였으며, 그대로 회군하여 초 8일에 상주목(尙州牧)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관은 11월 29일 이후 교졸(校卒)을 많이 징발하여 사방으로 보내어 탐문하게 하여 이득이(李得伊), 박기봉(朴起奉), 권화일(權和一), 김순오(金順五), 이도생(李道生), 배춘서(裵春瑞), 박창현(朴昌鉉) 등 7놈을 잡았는데, 이들은 모두 동도(東徒)의 거괴(渠魁)들로서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달 12일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과 함께 4거리에서 개좌(開坐)하여 이득이와 박기봉은 효수하고 권화일 등 5놈은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습니다. 적도(賊徒)들이 또 무주(茂朱)에서 크게 기포(起包)하여 이미 청산, 영동, 황간 등의 고을을 함락하고 곧장 상주목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격장을 도로 보내어 군사 200명을 통솔하고 나아가서 적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해목(該牧, 상주목) 부근의 각 면에 명령을 내려 신칙하여 우선 협력하여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또 안동, 문경, 예천, 의성, 함창, 용궁 등 6개 고을에 감결로 신칙하여 그들에게 군사를 일으켜서 구원하러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고을의 군대는 아직 모두 도착하지 않았는데 적의 세력은 갈수록 불어나서 그 숫자가 수천 혹은 수만 명이나 됩니다. 비록 현재의 상황을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적은 강한데 우리의 병력은 적으므로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여 적을 무찌르려고 합니다. 사태가 매우 급박하여 계본(啓本)을 작성하지 못하고 우선 사실에 의거하여 첩보(牒報)를 올리니 순무영(巡撫營)에서 특별히 본 도의 감영과 양호(兩湖)의 각 고을에 관문으로 신칙하여 빠른 시일 내에 적을 소탕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의정부의 제사題辭에 “연이어 승리를 거둔 일은 매우 가상하다. 첩보한 바에 따라 관문으로 각처에 신칙하였으니 앞으로 적을 토벌하는 일에 더욱 분투하여 빠른 시일 내에 소탕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순무영의 제사에 “도착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