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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소모사실(상주) 召募事實(尙州)
  • 기사명
    1894년 12월 21일 본도 감영에 이문을 보냄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12월 21일
일러두기

21일. 본도 감영에 이문을 보냄[同日文移本道監營]

상고할 일입니다. 지금 적의 경보가 시급한 가운데 감영과 고을에 요청한 병정들이 차례차례 도착하고 있습니다. 귀 감영의 병정 50명, 용궁(龍宮)과 함창(咸昌)의 포군 각 20명, 상주진(尙州鎭)에 소속된 고을인 개령(開甯)의 창수(槍手) 100명은 모두 15일에 와서 대령하였습니다. 그래서 귀 감영의 병정은 화령(化甯) 장터로 보내고, 함창과 용궁 두 고을의 병정은 유격대로 보내어 협력하여 함께 진군하도록 하였으며, 개령의 창군(槍軍)은 성 아래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17일에는 안동의 총수(銃手)와 창수(槍手) 350명이 도착하였으며, 18일에는 예천의 포군 360명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보(塘報)를 보니 적이 조금 물러갔으며 유격대에 의해 쫓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 고을의 군사들을 오래도록 기다리게 할 필요가 없어서, 안동과 예천의 군사들은 19일 아침 일찍 각각 돌아갈 여비 100금(金)씩을 지급하여 일제히 돌려보냈으며, 각자가 지니고 온 5일치의 양식은 그곳 읍(邑)에 폐가 될까 염려되어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다만 안동 관포(官砲) 40명은 남겨두었다가 같은 날 오시(午時)에 상주 포군(砲軍) 40명, 상주진(尙州鎭) 나포(羅砲) 10명과 함께 본관이 인솔하여 화령(化甯)으로 출진(出陣)하였습니다. 구원하러온 감영과 고을의 병사들의 숫자는 많으나 실제 군량으로 쓸 관아의 돈과 곡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량(募糧, 모아놓은 양식)으로 군사들을 먹여서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였습니다. 모량이라는 것은 본주의 유궁(儒宮, 서원)과 세력가들이 먼저 의연하고 또 사대부 집안이 추가로 출연하였던 것이며, 평민들은 처음에는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적의 경보가 있은 이후에 평민들 가운데 조금 지각있는 자들이 군량이 없으면 군대가 없고 군대가 없으면 적을 방어하여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알고 각자 정성껏 군량으로 낸 것이 또 어느 정도 있습니다. 거두어들이고 사용한 수량은 당연히 성책(成冊)을 작성하여 보내겠습니다. 본관이 업무를 본 이후 본 주에서 새로 설치한 별포군(別砲軍)이 200명인데, 이들은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설치한 이상 군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맞이한 군사들의 숫자도 사실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관아의 비축은 고갈되어 유용할 곡식이 없습니다. 귀 감영에서 거듭 이문(移文)을 보낸 것이 백성들을 아끼고 돌보아주라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별달리 변통할 방도가 없어서 편리한 대로 모량(募糧)을 가져다 사용하여 당장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대처하며 월급을 지불함에 있어 계속 모량(募糧)을 취하기는 어려워서 이에 이문(移文)을 보내니 전후의 사정을 살펴서 적절한 대책을 세워주어 궁핍하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고을을 순시하는 일은 본도의 감영과 상의하여 조처하라는 의정부의 제사(題辭)를 방금 받았으니 이 일도 함께 그 편의여부를 헤아려서 구체적인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당보(塘報) 척후병이 높은 곳에 올라서 적의 동정을 살펴 알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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