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의정부와 양호도순무영에 보고함 감영에 보낸 이문의 내용도 이와 비슷함[同日報議政府兩湖都廵撫營 監營送移文辭意亦倣此]
첩보(牒報)하는 일입니다. 적도(賊徒)들이 11일에 경계를 침범하여 전투를 하였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신속하게 보고하였습니다. 본관은 이달 19일에 안동 관포(官砲) 40명, 상주 별포(別砲) 40명 및 상주진(尙州鎭) 나포(羅砲) 10명을 데리고 화령(化甯)으로 출진(出陣)하여 군세(軍勢)를 서로 호응하였는데, 지금 도착한 김석중(金奭中)이 회군(回軍)하여 보고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달 초 8일에 청산(靑山)의 서리와 군교가 와서 말하기를, ‘적도(賊徒) 수만 명이 무주(茂朱)에서 영동(永同)으로 와서 설천(雪川)과 월전(月田) 두 지역의 의병을 쳐부수고 자신들의 병력이 12만 명이라고 떠벌리며 청산과 상주를 함락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초 9일에 대민(大民)과 소민(小民)들이 빨리 와서 구해달라고 행군소(行軍所)에 아뢰었고, 그날 밤에 영동 수령도 편지를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또 본 경내 각처의 보고들도 끊임없이 위급함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초 10일에 의병 포군(砲軍) 200명을 데리고 영동의 접경 지역에 주둔하며 적의 정세를 탐문하였더니, 적은 이미 영동을 함락하고 황간(黃澗)의 무기를 탈취하여 영동 용산시(龍山市)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본 고을 당남리(唐南里)에 난입하였습니다. 11일 새벽에 군사들을 데리고 즉시 적의 예봉을 막고 전투를 하며 용산(龍山)의 뒷골에 이르자 마침내 적들이 물러났습니다. 의병이 이들을 계속 추격하여 산골로 들어가자 적의 포군(砲軍) 수천 명이 좌우의 산 위를 둘러싸고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아 총알이 비오는 듯하며 상황이 몹시 위태로웠습니다. 의병 포군들은 한참 동안 올려다보며 총을 쏘다가, 총을 한방씩 쏘며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서 마침내 동쪽 맞은 편 산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쏘자 총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 비록 적들이 조금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지세(地勢)가 불리하고 중과부적이어서 부득이하게 군사들을 정돈시키면서 조금씩 후퇴하여 평지로 유인하자 적들도 매복이 있음을 알아채고 끝내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시(申時) 말까지 서로 대치하다가 군사들을 데리고 율계(栗溪)로 가서 주둔하였습니다. 12일에 또 용산에서 총소리가 나서 구릉과 골짜기를 울리는 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더니 청주(淸州)의 병정과 옥천(沃川)의 의병들이 와서 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데리고 40리를 달려가서 앞뒤에서 공격하려 하였으나 청주와 옥천의 병정들은 이미 달아났으며 적들은 승세를 타고 청산읍으로 들어가서 남김없이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군은 율계를 굳게 지키면서 각 고을의 원병들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6일 새벽에 일본군 28인과 함께 청산읍으로 나아갔으나 적들은 이미 보은(報恩)의 원암(元巖), 수피(水皮), 신리(薪里) 등지로 주둔지를 옮긴 뒤였습니다. 이날 한밤중에 일본군 15인이 또 도착하였습니다. 17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청산에서 출발하여 보은 수피에 도착하여 적의 정세를 탐문하니, 한 갈래는 원암에서 보은읍으로 들어가서 관사(官舍)와 공해(公廨)의 문을 부수고 집 2채를 불사르고 그 재산을 탈취하였으며, 한 갈래는 수피 신리에서 풍취점(風吹店)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상주의 부대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두 진영이 합세하여 보은 북실(北實)
에 웅거하며 동네입구 여러 곳에 불을 피워놓고 사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일본군 45인, 용궁(龍宮)과 함창(咸昌)의 포군(砲軍) 각 20명, 본 주의 병정 200명이 함께 귀인교(貴人橋)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그날 밤 해시(亥時)에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서 한 갈래는 북실의 우측 산길로 향하고, 한 갈래는 왼쪽 촌길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오른쪽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비도(匪徒) 4놈을 잡아 먼저 거괴(渠魁)의 소재지와 적의 정황이 어떠한가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거괴(巨魁) 최시형(崔時亨)은 저녁 전에 본동(本洞) 김소촌(金召村)의 집에 있었으나 그 이후의 거취는 알지 못하며, 차괴(次魁)인 임호(林昊, 林局昊), 정대춘(鄭大春), 이국빈(李國賓), 손응구(孫應九)는 함께 그 집에서 지금 밥을 짓고 술을 마시고 떡을 먹으면서 군대를 이동시킬 계획을 의논하고 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민가 곳곳에 가득 차있고, 그 마을의 남녀주민들은 모두 다른 마을로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이 이곳으로 온 연유를 들으니, ‘본래 안성포(安城包)와 관동포(關東包)가 달포 전에 호남(湖南)에서 17차례나 전투를 하고, 이달 초 6일에 무주에 들어가서 설천(雪川)과 월전(月田) 두 지역의 의병을 격파하였으며, 영동을 함락하고 황간의 무기를 빼앗아 영동 땅 용산시(龍山市)로 가서 웅거하면서 수석(水石) 이 판서(李判書)의 집과 양반 정씨(鄭氏)의 집 및 죽전(竹田)의 민가 40여 채를 불태우고 이 판서의 사내종 1명과 양반 노씨(盧氏) 2인을 총살하였습니다. 초 10일에 상주 산내(山內) 당남(唐南)의 경내에 들어가서 바야흐로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려고 하였으나 11일에 상주의 군사들에게 쫓겨 용산(龍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12일에 또 청주의 군사들과 전투를 하여 승세를 타고 청산읍까지 이르렀으며, 거기에서 2일을 머무르고 다시 상주로 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주의 구원병들이 뒤를 추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은, 원암, 수피, 신리 등지로 후퇴하여 2일을 머물렀으며, 또 상주의 군사들이 이미 청산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7일 밤에 모두 북실에 모였으며, 상주와 선산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초한 뒤에 4놈의 입을 즉시 봉하고 일제히 진격하여 먼저 여러 적괴(賊魁)들이 있는 김소촌의 집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총을 쏘아 5놈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불을 질러 시체를 태웠습니다. 그때 갑자기 왼편 산 위에서 총성이 들리면서 총알이 우박처럼 퍼부었습니다. 달빛 아래에서 쳐다보니 저들 무리들은 산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우리 병사들은 골짜기에 있으면서 싸움터 한가운데서 어려움을 겪으며 다급하게 위로 올라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시(亥時) 초부터 더욱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일본군은 가운데에서 싸우고 우리 병사들은 사방에서 진격하여 함성이 산을 흔들고 총성이 골짜기를 울렸습니다. 날이 샐 때까지 싸우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니 적도(賊徒)들은 구름과 안개가 모여 있듯이 온 산과 골짜기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위치한 적과 아군의 높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군사들의 숫자도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적도들은 조수가 밀려오고 비가 퍼붓듯이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 오는데 우리 군사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쳐다보니 모두 의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어 한 번 죽기로 서약하고, 일본군의 대오를 나누어 한 부대는 왼편으로 향하게 하고 한 부대는 오른편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우리 군대는 전면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가 적과 부딛쳐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원숭이가 올라가듯이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총 한 방씩을 일제히 쏘면서 전진하였습니다. 산허리에 이르자 걸음이 더욱 빨라졌으며 산 위의 적들은 총을 쏘는 족족 거꾸러져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어느새 아군이 산의 정상을 빼앗고 적들이 조금 물러가자 오른편의 일본군이 뒤이어 산 위로 올라와서 그들과 힘을 합하여 힘껏 싸웠으며, 왼편의 일본군은 영남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협공하였습니다. 한참을 싸우고 나니 시간이 이미 미시(未時, 오후 1~3시)가 되었습니다. 적세는 점차 위축되어 산을 오르고 고개를 넘어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승세를 타고 급히 총을 쏘며 10리까지 추격하였습니다. 총으로 쏘아 죽인 자가 395명이었으며 그밖에 골짜기와 숲속에는 죽은 자들이 서로 포개져서 이어져 있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흩어진 잔당들이 사방으로 달아날 때 비로소 청주 군대와 옥천의 의병이 앞쪽 산등성이에서 와서 손으로 잡고 총으로 쏘아 27명을 죽이고 달아나는 적의 뒤를 따라 곧장 남악(南岳)의 후령(後嶺)을 넘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아군이 획득한 무기를 헤아려보니, 총 15자루, 환도 9자루, 활 1개, 창 42자루, 탄약 2짐[負], 깃발 10개, 나팔 1개, 전고(戰鼓) 5개, 소와 말 12필이었으며, 그밖에 양총(洋銃), 탄약 및 소와 말 등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 일본인이 가져갔습니다. 데리고 온 사인(士人) 김제홍(金濟洪)과 성걸(成傑), 본 주의 아전 박명현(朴明顯), 차재혁(車載赫), 박시현(朴時絢), 박의영(朴儀榮), 그리고 군교(軍校) 김상오(金尙五) 등은 힘을 떨치고 충성을 바쳐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않았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비류(匪類)의 대포(大包)가 이미 소탕되었으니 많은 군사들을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달 18일에 즉시 철군하여 19일에 출진소(出陣所)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적당(賊黨)이 양호(兩湖) 지역에서 날뛰면서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무리들을 불려서 곧장 큰 고개[추풍령]를 넘어 상주 경계에 육박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의 김석중이 몸을 던져 나가싸웠는데, 병력이 적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지 않고 힘껏 방어하여 상주의 경계를 편안하게 하였으며, 군사들을 이끌어 적을 막고 추격하며 적의 포(包)를 소탕하여 이렇게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으니, 의(義)를 떨치고 잔악함을 제거하는 데 참으로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사인 김제홍, 성걸, 성귤(成橘), 아전 박명현, 차재혁, 박시현, 박의영, 군교 김상오 등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적을 제압하고 힘을 합하여 서로 도왔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그래서 이달 20일에 본관이 이들을 데리고 상주목으로 돌아와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이에 연유를 갖추어서 첩보를 올립니다.(감영에서 보낸 이문(移文)에, “귀 소모영에서 즉시 계문(啓聞)하는 것이 마땅하니 상고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의정부의 제사(題辭)에 “공로를 세운 여러 사람들은 비도(匪徒)가 모두 평정된 뒤에 당연히 상을 내릴 것이다. 각처의 포군(砲軍)은 당해 각 고을에서 관할하여 적을 방어하라고 이문을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순무영의 제사에 “도착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