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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1월[十一月]

소모영 유격장(遊擊將)의 직책으로 한 부대를 맡아 적도(賊徒)를 섬멸하기를 청하였다.

소모사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도와 달라고 청하여 이에 들어가 뵈었다. 소모사가 말하기를, “나는 평소 방략도 없는데 외람되이 무거운 직책을 맡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만 어떤 계책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대[君]는 독서하고 궁리하여 경륜을 잘 알아서 계책을 잘 낼 것이니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 적도가 멋대로 횡행하여 임금이 엄숙하게 군사를 모으도록 명하였으니 어찌 한 둘에 그치겠습니까? 각 영(營)이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감히 적에게 대항하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통곡스럽고 한숨나오는 지경입니다. 하물며 이제 공께서 사람들에게 크게 신망을 받고, 또한 큰 책임을 맡았는데 다른 영들과 함께 세월만 보내고 말겠습니까? 아니면 죽고 사는 것은 도외로 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이 적들을 멸하기로 맹서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모사가 답하기를, “저는 차라리 적에게 달려가 죽을지언정 생령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저에게 한 부대의 병사를 맡겨주십시오. 비록 제가 불민(不敏)하지만 가까이서 공에게 도움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격장의 임무를 맡겨 한 부대를 담당하였다.

13일[十三日]

소모사가 별포(別砲) 20명을 가려 붙여 주고 전령(傳令) 1장과 환도(環刀) 1자루를 주어 영(領)·초장(哨將)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어하게 하였다. 영·초장 및 군관(軍官)·별포를 집합시켜서 군례[軍禮]을 강(講)하였다.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렸다.

1. 지나치는 마을들은 감히 조금이라도 침범하지 말 것.

1. 대장의 명령이 한번 나가면 감히 망령되이 시비를 가리지 말 것.

1. 대오를 정렬하여 행군하면서 감히 귀엣말 하거나 서로 소리치지 말 것.

1. 지명(指名)하여 적을 잡되 감히 다른 사람을 오인하여 범하지 말 것.

1. 이미 잡은 적의 괴수는 감히 정에 끌려 멋대로 풀어주지 말 것.

1. 적과 맞서 공격할 때에는 감히 뒤를 돌아보고 물러나지 말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군율(軍律)로 다스릴 것.

이날 삼경(三更, 오후 11~오전 1시)에 군을 출발시켜 상주 북야문(北夜門)을 나와 모동면(牟東面)으로 향하였다. 참모인 사인(士人) 성호원(成灝源)·윤흥렬(尹興烈)·성걸(成杰), 내 동생인 김직중(稷中) 및 초장 박유현(朴裕顯)·김상오(金常五)·유우석(劉禹錫) 등과 동행했다.

14일[十四日]

적의 괴수인 접주 남진갑(南進甲)·이화춘(李化春), 접사(接司) 구팔선(具八善)·김군중(金君仲) 및 상주에서 군기(軍器)를 약탈한 적 유학언(劉學彦) 등을 중모(中牟) 장터에서 총살하였다. 방문(榜文)을 내어 백성을 안심시켰다.

어제 밤 삼경에 병력을 인솔하여 백학점(白鶴店)에 이르러 병력을 두 길로 나누어, 성(成, 성걸)·윤(尹, 윤흥렬)·유(劉 , 유우석) 등은 모동면 용호리(龍湖里)로 가서 남(南, 남진갑)·이(李, 이화춘) 2 명의 적을 사로잡게 하고, 나와 김직중·성호원·김상오 등은 모서면 사제리(社堤里)로 가서 구(具, 구팔선)·김(金, 김군중)·유(劉 , 유학언) 3 명의 적을 사로잡기로 하였다. 매상(昧爽, 먼 동이 틀 무렵)에 총을 쏘는 것을 신호로 하여 양쪽 병력이 일제히 착수하기로 하였다.

서둘러 사제리 뒷산에 도착하자 하늘이 비로소 밝아졌으며, 멀리 용호리에서 포성이 들려 일어나 호응하여 진군해 적 5명을 사로잡았다. 대개 남적(南賊, 남진갑)은 접주로서 통솔하는 사람이 수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상주 변란을 겪은 후 그 무리와 몰래 통하여 또 기포(起包)하기로 하였다. 김·구 2적도 기포하자는 통문을 만들어, 11월에 거사하여 유·이 2적이 상주에 들어가 함락시키고 먼저 무기를 탈취하기로 하였다.

이날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정각에 인민을 중모면 장터에 크게 모아 문초하고 총살했으며, 위협 때문에 추종했던 자들은 각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소모사 영에 문서로 보고[牒報]하였다.

도적 남진갑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어, 사방으로 사람들을 보내 쫓아가 잡게 하였다. 대개 포군이 쏘았으나 명중하지 못해 시체와 다름없는 몸으로 달아났다. 이날 밤 신천(新川)으로 향하였다.

15일[十五日]

방향을 바꿔 판계리(板溪里)로 가서 군사들을 먹이고 주둔하였다. 방문을 내어 백성을 안심시켰다. 밤 오경(五更, 오전 3~5시)에 이른바 편의장(便義將) 조왈경(趙曰京)이라는 큰 괴수를 왕곡(旺谷)에서 생포하였다.

방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관군은 지나가는 곳을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며 다만 적의 괴수만 잡고 협박으로 추종한 자는 불문에 붙인다. 그러니 각자 안심하고 우리 임금을 위호하라. 운운”

이날 일부러 이곳에 주둔하고는 장차 황간(黃澗) 등지로 갈 것이라고 드러내놓고 말하면서 병력을 하루 종일 휴식하게 하였다. 술시(戌時, 오후 7~9시) 정각에 김상오·박유현·유우석 등에게 몰래 명령을 내려, 군졸들의 입에 나무막대기를 물리고[銜枚], 급히 달려 왕곡에 들어갔더니 조적(趙賊, 조왈경)은 옷짐을 꾸려 도망가려는 찰나였다. 관병이 둘러싸고 크게 고함을 지르자 뒷문을 열어 산골짜기로 달아나서 거의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별포 이동인(李東寅)이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가서 검을 뽑아 크게 소리를 지르니 마침내 적이 넘어져 생포하여 돌아왔다.

16일[十六日]

조왈경을 판계점 앞에서 총살하였다. 소모사 영에서 포군 30명을 더 보내주었다. 왕곡에 사는 사람들 중 조적에게 미혹된 자들이 모두 조적의 집에 모여 명부[名帖]를 불태우고 그의 죄악을 헤아렸고, 춤추며 귀화하여 진심으로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날 밤에 율계리(栗溪里)에 머물러 본면(本面, 모서면) 약정(約正)과 힘을 합쳐 적을 막을 책략을 상의하였다. 소모사 영에 문서로 보고[牒報]하였다.

17일[十七日]

화동면(化東面) 덕곡(德谷)에 들어가 분수를 범하여 강상을 어지럽힌 적 안치서(安致瑞)를 사로잡고, 그곳에 사는 백성을 타일러 귀화하게 하였다. 접주 신광서(辛光瑞)·정기복(鄭奇福) 등을 쫓아가 잡게 하였다.

본동은 호서와 영남의 경계로 적도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다. 신(辛, 신광서)·정(鄭, 정기복) 2적은 기미를 보고 먼저 도망갔고, 안적(安賊, 안치서)은 마침내 사로잡혔다. 격식에 맞게 가둔 후 날이 밝은 후 무리를 타이르고 일을 매듭짓기 위해 홀로 촛불을 켜고 앉아서 『송사(宋史)』당질숙공전(唐質肅公傳)을 읽었다. 밤중에 파수하던 병사가 소리치기를 “적이 달아났다. 적이 달아났다”라고 하여 여러 병사들이 매우 떠들썩하게 자취를 찾았다. 나는 그대로 책을 읽으면서 “적이 달아난 지 이미 오래니 간계에 빠지지 말라” 고 명하고 여러 병사들을 다시 모아 편히 잠들게 하였다. 대개 격식대로 칼을 씌운 것은 올가미처럼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적이 어찌 벗어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파수하던 병사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가 멀리 도망가기를 기다린 후에 비로소 발견한 것처럼 한 것이다. 또 즉시 파수하던 병사의 죄를 곧바로 조사하지 않은 것은 범한 죄가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는 것에 해당되지만, 별포(別砲)는 모두 훈련받은 병졸이 아니고 민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군율이 어떤지도 알지 못하는데, 이러한 일을 너무 급하게 처리하면 달아나는 자가 과반일 것이기 때문이다. 날이 밝은 후 조사를 시작하여 파수군을 잡아 사형은 감하여 무거운 율로 다스렸다. 즉시 안적의 누이와 그 며느리를 불러 이르기를, “초장 이하 병대(兵隊)까지 말하기를 ‘안치서와 무슨 약속이 있었다’라고 하는데, 만약 너희 집에 뇌물을 요구한 자가 있으면 곧 바로 와서 알리라. 되돌려 주고 너에게 상을 주겠다. 운운”라고 하여 간악한 틈을 막았다.

17일[十七日] 비가 왔다. 덕곡에 주둔하였다.

18일[十八日]

병력을 인솔하여 화서면(化西面)으로 갔다. 밤중에 대곡(岱谷)에 가서 청주 대접주 김자선(金子先) 및 접사(接司) 서치대(徐致大), 접주 정수여(鄭須汝)를 사로잡았다. 방문을 내어 어진 이를 구하였다. 방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극악한 적이 멋대로 포학한 짓을 하여 생민이 도탄에 빠졌다. 임금께서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사에 힘쓰시고 가르친 후에야 형벌을 쓰신다. 내가 비록 보잘 것 없으나 충분(忠憤)을 바친다. 산림에서 덕을 쌓아 적임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나와 함께 원수를 갚자. 운운”

김자선은 원래 보은 장내에 거주하였는데 이른바 대접주로 10월 17일 그 무리 4,500명을 거느리고 청주를 함락하려고 세교(細橋) 장터에 이르렀으나 일본 병력에 패하였다. 또 전봉준과 함께 공주를 함락하려 하였으나 일이 모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상주에 잠입하여 다음 기포를 도모하여 앞서의 치욕을 씻으려 하였다. 정수여·서치대는 사부를 구타하고 재물과 곡식을 빼앗으며, 무기를 탈취하고 남의 무덤을 억지로 파헤치는 등 남을 헤치려는 마음을 품고 모든 방법으로 변란을 모의하는 자들이었다.

19일[十九日]

김자선·정수여·서치대를 화령(化寧) 장터에서 총살하였다.

문초한 후에 형을 집행하고 각 마을에 알아듣도록 타일러 각각 귀화하여 안심하게 하였다. 밤중에 거괴 김민이(金民伊)·원성팔(元性八) 등을 장내 후동(後洞)에서 잡았다. 이 밤에 하늘은 얼음 같았고 달은 서리 같았다. 초경(初更, 一更인 오후 7~9시)에 암호로 병력을 일으켜 보은(報恩) 갈벌동(葛伐洞)에 도착하자 거괴 김민이와 원성팔 등은 이미 먼저 장내 후동으로 도주하였다. 군중에 명령하기를, “힘을 떨쳐 앞서 가는 자는 백금(百金)으로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니 이에 따르는 병사가 28 명이나 되었다. 곧바로 김상오 등과 함께 후동으로 달려 들어가 두적을 사로잡고 병력을 돌려 광주원(廣周院)에 이르자 하늘이 이미 밝았다. 이 밤에 80리를 행군하였다.

20일[二十日]

새벽에 병력을 3개 부대로 나누어 평원동(平原洞)에서 김철명(金哲命)·강만철(姜萬哲)·김달문(金達文) 등 적 셋을 사로잡았다.

오시 정각에 난을 일으킨 괴수 원성팔·김달문·김철명·강만철을 광주원에서, 거괴 김민이는 봉암(鳳巖)에서 총살하였다.

원적(元賊, 원성팔)은 손으로 사족(士族)을 때려 이빨 2개를 부러뜨리고 양반 부인을 겁탈했으며, 그 무리들과 함께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강제로 무리에 들게 하였다. 김달문은 노비로서 주인을 욕보여 강상죄(綱常罪)를 저질렀다. 김·강 2적은 사악한 것에 물든 지 10년에 끝내 귀순하지 않았으며 밤이면 밤마다 하늘에 제사지내 적이 부흥하기를 빌었다. 김민이는 적의 거괴가 되어 사녀(士女)를 묶어 협박하고 재물과 곡식을 약탈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며, 무리 수천 명을 일으켜 김자선과 청주를 함락하려고 했던 자이다. 만 번 도륙하여도 죄에 비해 가벼우나 문초하여 무리를 경계하였다.

21일[二十一日]

큰 눈이 왔다. 사곡(沙谷)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본동 사민(士民)이 의연금을 내고 나와서 맞이하여 소를 잡아 군사를 대접하니 병사들이 기뻐하였다.

진사 이건만(李建晩), 석사(碩士) 김기락(金基洛) 및 원근의 여러 친구들이 모두 모여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22일[二十二日]

눈이 더욱 심하게 왔다. 오후에 진을 화령 장터로 옮겼다.

이때 소모사는 영남 감영에 행차하였다가 아직 진에 돌아오지 않았다. 동도배(東徒輩)는 유언비어로 선동해, 유격장이 그의 군사를 모아 물러간다는 모함을 꾸며서, 상주목사가 초장이 있는 곳에 과연 반사(班師, 군사를 돌리는 일)의 명령이 있었느냐고 물어왔다. 곧바로 명령하기를, “장수가 외방에 있으면, 임금의 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물며 나는 소모사의 절제를 받으니 어찌 마음대로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겠는가? 만일 다른 말하는 자가 있으면 군율로 처리할 것이다”라고 하니 모든 병사가 숙연하게 명령을 따랐다.

23일[二十三日]

화령 장터에 주둔하였다.

24일[二十四日]

밤에 김상오를 보내 가항(駕項)에서 김항우(金項羽)·박시창(朴時昌)을 사로잡고, 묘막(妙幕)에서 정한(鄭汗)을 사로잡아 왔다.

25일[二十五日]

묘막에서 잡은 정한을 석방하고, 김항우를 시사(市舍)에 가두었다.

정한을 자세히 조사하니 비록 비도(匪徒)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귀화한지 오래되었으며, 한 자루의 보리를 사서 생계거리로 삼았다 하므로 즉시 풀어주었다. 김항우는 변명하며 불복하는 까닭에 다시 사람을 보내 자세히 탐지한 후 처리하려고 장터에 가두었다. 대개 정탐한 사람이 지나치게 하여 사실과 다를 염려가 있어서이다.

26일[二十六日]

저녁에 영관(領官) 박명현이 병사 80명을 거느리고 와서 소모사의 전령을 전해주었다. 진군하여 섬멸하게 하였다.

이에 사기가 크게 격려되어 모두 한번 떨쳐 일어나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말렸으나, 끝내 기운을 모아 돌진할 때를 기다렸다. 밤중에 여러 병사들을 순시하여 노고를 위로하였다.

27일[二十七日]

진군하여 와지(瓦池)로 가서 접사 여성도(呂聖度)를 사로잡았다. 밤에 병력을 네 부대로 나누어 청산과 보은의 네 마을로 들어가 최시형(崔時亨)이 왕래하는 소굴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았다.

여적(呂賊, 여성도)은 기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로 가서 성을 함락하고 무기와 군목(軍木, 군사에 쓸 무명)을 탈취했으며, 상주의 변란 후에 다시 기포하려고 꾀한 자이다.

당시 최적(崔賊, 최시형)의 소재를 탐문한 자가 와서 말하기를, “최시형이 왕래하면서 청산 대사동(大寺洞)의 원씨 성을 가진 사람[元漢], 월남(月南)의 박해수(朴海壽), 보은 점동(店洞)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李漢], 마로(馬老)의 현면상(玄緬相)의 집에 숨는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밤 삼경에 네 길로 나누어 진격하면서 약속하기를, “내일 새벽 밝을 무렵에 일제히 착수하되 만약 최적을 사로잡으면 신호로 총을 연달아 3번, 소굴의 우두머리를 잡으면 2번, 모두 잡지 못하면 1번 쏜다. 네 방면에서 응답한 후 모두 월남 전점(前店)에 모인다. 지명한 적은 잡되 추호도 다른 이는 침범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3번을 거듭 밝히고 진격하였으니 대개 청산·보은 2읍은 전혀 귀순하지 않아 완악함을 믿고 무리를 끼고 있으며, 또한 우리 병력은 매우 적은 데다 넷으로 나눠져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신호 총소리 한 번에 시각을 맞춰 모두 한꺼번에 모이게 하여, 먼저 도착하고 나중 도착하는 일이 없게 하려 한 것이다. 먼동이 틀 무렵 네 방면에서 신호 총소리가 일제히 울렸는데 모두 두 번이었으니 최적은 잡지 못한 것을 이로써 알 수 있었다. 매우 한스럽고 매우 한스럽다. 해 뜰 무렵[平明]에 모두 월남 전점에 모였는데 중모 장터에서 도망간 적 남진갑을 현면상의 집에서 잡아왔다. 이른바 소굴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변명하며 불복하여 엄히 형벌을 가한 후 풀어주었다.

28일[二十八日]

월남 전점에서 다시 남진갑을 총살하고, 청산 효림(孝林)에 들어가 굶주린 사람들 20호를 구제하였다.

남적의 몸을 자세히 검시하니 네 곳에 총을 맞았으나 모두 옆으로 맞고 명중하지 않아 도망쳐 살았다. 이곳에 이르러 또 비류(匪類)를 결집하였으나 뜻밖에 사로잡힌 것이다. 대개 죄가 크고 악이 극에 달하면 귀신이 막고 묶어서 그물을 벗어나 도망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병력을 돌려 와지로 갔으며, 소모사 영에 보고하였다.

29일[二十九日]

병사 5명을 보내 거괴인 이른바 운량도총관(運糧都總管) 배학수(裴學秀), 팔로도집강(八路都執綱) 김경연(金景淵)을 청산읍에서 사로잡게 하였다. 청산읍 본관(本官, 수령) 조만희(趙萬熙)가 배적(裴賊, 배학수)을 관아의 안채에 숨겨두고 유격장에게 편지를 보내 목숨을 구걸하였다.

당시 각 읍의 수령은 모두 힘써 적을 무찔렀다. 그런데 청산은 적괴 최시형의 소굴이어서 비류가 없는 집이 없었다. 또 배학수는 사과(司果)로 운량관이 되어 관아를 출입하면서 정을 쌓아 친해져 병부(兵符)를 받았고, 김경연은 임시 아전으로 집강이 되어 촌읍을 연결하고 멋대로 하여 꺼림이 없었다. 수령은 여러 신을 모신 사당의 귀신처럼 정신을 빼앗겨 그가 사주하는 대로 따라 조석(朝夕)을 보전하였다.

관군이 경내로 들어오자 분주하게 바라지하고는 “적이 없다”며 병력이 물러가도록 하고, 적괴는 좌우에 숨겨두어 앞에서 가리고 뒤에서 보호하였다. 이 때문에 옥천(沃川) 의병장 박정빈(朴正彬)도 그 거짓말에 빠져 청주에서 풀어주었다. 사녀들이 한숨쉬고 한탄하며 이웃한 고을에서도 모두 분하게 여겼다. 오늘에 이르러서 또 배적을 관아 안채에 숨기다가 군사에게 발각되자 편지를 보내 살려주기를 청하여, 서리인 김가에게 부탁하였으나 적들이 모여 있는 곳에 알린다고 먼저 도망갔다. 일찍이 “유경승(劉景升)의 아들도 이와 같이 부진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하고 통탄스러우며 분하고 통탄스럽다. 밤 삼경에 병사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含枚] 청산읍에 들어갔다.

30일[三十日]

동이 틀 무렵에 배·김 2적의 집을 포위하여 주둔하였으니 이른바 팔로도성찰(八路都省察) 강경중(姜敬衆), 부성찰(副省察) 허용(許用) 등을 잡아 청산 동시(東市)에서 총살하였다. 수리(首吏)로 안씨 성을 가진 자[安漢]를 말머리[馬頭]에 결박하여 읍리들이 힘을 합쳐 김경연을 잡도록 하였다. 방문을 내어 백성을 안심시키고 충의를 격려하고 권장하였다.

방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 너희 청산은 적의 피해를 홀로 많이 받았으니 최적은 연이어 소굴로 삼았고, 배적은 적들을 못된 짓 하도록 인도[倀鬼]하였으며, 김리(金吏)는 위협하고 공갈하여 한 읍이 모두 넋을 빼앗겼다. 우리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우리 관리를 살해하며, 우리 성지(城池)를 함락하고, 우리 부녀를 겁탈하였다. 임금의 진노가 일어나[雷霆], 임금의 법이 이에 엄숙하게,[王章斯肅] 장수에게 명하여 섬멸하게 하자, 의사(義士)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너희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을 풀어주었으니 모두 새롭게 되어라. 선비·농민·공장·상인과 노비·백정들이라도 특별한 재주가 있으면 군문에 와서 함께 힘을 합쳐 이 적을 멸절할 것을 서약하라. 운운”

강(姜, 강경중)·허(許, 허용) 2적은 1읍에 독을 퍼뜨렸으므로, 모두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김경연은 관장을 협박하고 제어했으며 위협과 공갈을 그치지 않았고, 무리를 미혹하여 나라에 대항하게 하였으나, 최적의 심복이고 이목(耳目)이어서 감히 아무도 어찌할 수 없었다. 수리를 결박한 것은 그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힘을 다해 김적(金賊, 김경연)을 체포하도록 하려는 계책이었다.

수령 조만희가 보러 왔기에 적을 보호한 까닭을 꾸짖어 물으니 극구 변명하기를, “나도 적을 보호하는 것이 죄가 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거스르면 목숨이 어떻게 될까 알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그들의 제어를 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대가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여, 사방의 경내를 보호하고, 이 몸을 살려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운운”

주석
소모영 유격장(遊擊將) 김석중임. 자신의 활동을 이글에 적어 남겼다.
청주를 함락 북접의 일부 농민군과 남접의 김개남 농민군이 전봉준이 지휘하는 공주에 참여치 않고 청주병영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강상죄(綱常罪) 삼강과 오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죄. 노비는 상전이 반역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전을 능멸할 수 없다. 이를 아들이 아버지, 신하가 임금, 지어미가 지아비에게 저지른 죄와 같이 강상죄로 다루었다.
유경승(劉景升) 후한의 벼슬아치로 이름은 표(表)요 경승은 자이다. 조조와 원소가 싸울때 원소의 편을 들어 전투에 나서려다가 종기가 나서 죽었다. 그의 아들도 연락을 맡아보면서 부실한 짓을 하였다 한다.(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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