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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2월 1일[十二月 一日]

청산 의동(義洞)에서 유숙하면서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였다. 청산 수령이 편지를 보내 본 읍에 오래 머물며 적도들을 소탕해줄 것을 청했다. 오시 쯤에 읍리 기영직(奇永稷)·안리(安吏) 등이 김경연을 사로잡아서 군문에 바쳤다. 저녁 무렵 청산 수령이 와서 보았는데 또 속히 돌아가지 말아달라고 청하였다. 이날 밤 수리를 석방하여 읍에 돌려보냈다.

김적이 이미 체포되니 읍 전체가 기뻐하고 치하하며, 문을 열고 반기며 웃는 것이 채주(蔡州)의 부녀(婦女)와 같았다. 의동이 동적(東賊)에게 거듭 탕잔(盪殘)되어 집에 쌓인 곡식이 없었으므로 적중에서 얻은 것을 동네 전체에 나누어 주어 구제하였다. 청산 수령이 또 소모영 종사관소(從事官所)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 “김우(金友, 김석중)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 벗을 위해 힘을 내어 청산에까지 이르렀으니 만리장성처럼 든든합니다. 청컨대 곧 바로 돌아가지 말고 가까운 곳을 구제해주십시오. 운운” 하였다.

2일[二日]

동적이 해주를 함락하여 감사 정현석(鄭顯奭), 군관 이명선(李鳴善)·윤원구(尹元求) 등을 결박하고, 연이어 여러 읍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력을 인솔하여 청산 묘곡(猫谷)에 들어가 최시형의 소재를 추적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거남리(車南里)로 들어가 이른바 대장 서오덕(徐五德)을 잡았다. 오시 정각에 소사동(小巳洞)에서 김경연·서오덕을 총살하였다.

묘곡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본동의 이른바 중군(中軍) 진극출(陳克出), 대장 손양문(孫良文) 등의 꼬임을 받아 집집이 사술에 전염되어 동학을 신명처럼 믿어 사람들마다 어리석고 완고하며, 관군 대하기를 거지 대하듯이 하였다. 본 병력이 외진 곳으로 깊이 들어가니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잠들지 못하였다. 이에 집집마다 타이르고 설득하여 순·역·화·복을 밝히자 이에 본동의 남녀들이 모두 길 왼편에 늘어서서 절하고 말하기를, “오늘 다시 하늘의 해[天日]를 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날 완악하여 알지 못하였는데, 오늘 깨우쳤으니 어찌 귀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후 종곡(鍾谷) 전투에 모두 기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오덕은 기력이 남보다 뛰어나 연달아 총을 7번을 쏘았으나 오히려 몸을 솟구쳐 뛰어오르며 말하기를, “나는 비록 총탄을 맞아도 도력이 있어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3일[三日]

청산 예곡(禮谷)으로 되돌아왔다. 방문을 내어 백성을 타일렀다.

밤 사이 소모사영의 탐세인[探細人, 염탐꾼]인 선달(先達) 박정호(朴貞浩)가 와서 고하기를, “최적(崔賊, 최시형)이 옥천 고관(高寬) 등지에 숨은 것을 5~6일전 확실히 알았으니 급히 가서 체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4일[四日]

새벽에 출발하여 영동군에 도착하자 수령 오형근(吳衡根)이 나와 보았다. 밤중에 조용히 60리를 가서 고관리에 이르러 비괴(匪魁) 대장 정윤서(鄭允瑞)를 체포하였다. 방문을 내걸어 백성을 안심시켰다.

정윤서는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한 달 전 무리 1만여 명을 일으켜 금산(錦山)을 함락하고 참판 정숙조(鄭肅朝)를 살해했으며, 또한 일본 병력과 양산(梁山) 장터에서 싸우다 패하여 달아났다. 그 독이 이웃 지역까지 퍼져있어 그가 죄를 받는 날 이웃지역들이 칭하하였다. 최적(崔賊, 최시형)은 이미 4~ 5일 전 도망쳤다고 한다.

5일[五日]

해가 뜰 무렵[平明]에 정윤서를 총살하고 행군하여 하고관리(下高寬里)에 도착하였다. 동도 7,000명이 또 무주(茂朱)를 무너뜨리고, 영동(永同)·상주(尙州)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관리에서 무주읍까지는 10여리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가산(家産)을 짊어지고 말을 타고 달아나는 것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오늘 이른 새벽에 동도 1만여 명이 갑자기 무주읍에 들어와 읍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서 나도 피난한다.”고 하였다. 이때 군중(軍中)에는 이미 탄약과 탄환이 부족하여 단지 빈주먹만 남았는데, 갑자기 이 말을 듣자 모두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기운을 낼 수 없었다. 즉시 명령하기를, “관군이 이르는 곳에는 적괴가 목을 내놓는데 이제 다시 횡행하여 멋대로 하니 이는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다. 마땅히 무주로 들어가 적을 섬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들을 재촉하여 무주로 향하였으나 여러 군사들은 비록 명령에 따라 진격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장차 실패하여 흩어질 우려가 있었다. 이에 몰래 종자(從者)를 시켜 피난한다고 말했던 사람을 잡아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동도의 군사[行間, 첩자]이다. 잘못된 말을 만들어 관군을 미혹시켜 물러가게 하려는 것이다. 무주읍은 경계할 것도 없다. 운운” 하였다.

이렇게 하자 군정이 안정되고 모두 힘을 내어 무주로 들어가 적을 토벌하려 하였다. 다시 명령하기를, “무주읍에는 이미 적이 없으니 들어갈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대오를 살피며 서서히 물러났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영동에 도착하니 수령 오(吳, 오형근)가 나와 보았다. 모두 무주에 있는 적의 형세를 말하니 수령 오가 말하기를, “이를 장차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기에, 탄약과 탄환이 몇 근이나 있냐고 물었더니, 단지 4~5근만 있다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여러 읍의 군사장비가 모두 이와 같지 않음이 없으니, 적도들이 읍에 들어가기를 무인지경에 들어가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상주로 돌려 준비한 후에 나가 맞서야겠습니다. 그대는 힘써서 잘 지키십시오.”라고 하였다. 잠시 묵었다.

6일[六日]

새벽에 출발하여 수석(水石)에 도착하여 자칭 좌익장(左翼將) 장여진(張汝振)을 총살하였다. 저녁에 상주 적도동(的桃洞)에 도착하자 영관 한명이 병을 무릅쓰고 달려 나와 맞이하였다. 병력을 머물게 하여 밤을 쉬었다.

이보다 앞서서 박명현이 예곡에서 병이 나 적도동으로 돌아가 의원의 치료를 받았다. 이 때 적의 경계(警戒)가 점차 급해지자 인정이 위태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하늘까지 닿는 파도가 땅을 말고 오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모두 짐을 지고 가고 여자들을 밥을 하지 않았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자 밤이 되어도 잠들 수 없었다.

장여진은 적괴 좌익장으로 성주성(星州城)을 거듭 함락하고, 수석에 있는 이태(李台)의 가산을 약탈한 자이다.

7일[七日]

병력을 인솔하여 노전(蘆田)에 되돌아와 주둔하였다. 상주읍과의 거리는 20리이다.

8일[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유점(柳店)에 가서 소모사의 우산(愚山) 행차를 맞이하여 뵈었다. 읍에 돌아와 유진(留陣)하였다.

당시 소모사는 집안 일로 우산에 들어갔다. 말[言]이 적의 변고에 미치자 소모사가 말하기를, “제군이 본읍에 유진하여 병사들을 위무하고 있으면 내가 잠시 갔다가 즉시 돌아와 힘을 합쳐 적을 막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본읍에 들어왔다. 이때 전(前) 자인(慈仁)현감 유도석(柳道奭)이 의병장으로 깃발을 세우고 등단(登壇)하여 적을 토벌한다고 하였다. 내가 밤에 의소(義所)에 나가 적의 세력을 말하자, 의병장이 말하기를, “나는 집안의 개인적인 일이 문경에 있어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치열하여 사방이 무너지고 갈라졌는데 지금 장군께서 흰머리로 깃발을 세워 힘을 모아 적을 토벌하니, 위로는 임금의 밤낮 근심하는 바를 덜고 아래로는 갓난아이와 같은 불쌍한 백성들[赤子]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장군이 되어 한 달을 보내고 적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이는 사사로운 일로 공무를 폐하는 것으로, 장사(壯士)는 흩어지고 인정은 두려워할 것입니다. 청컨대 그대는 다시 생각해 보시고 가십시오”라고 하자, 의병장은 말없이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말하기를, “저 석중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적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풍찬노숙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분에 넘치게 나라의 근심을 갚으려 하는데, 장군은 임금의 낳고 덮어주는 큰 은혜를 입어 다행히 장해(漳海) 혼(魂)이 되는 것을 면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마침 오늘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였다고 어떻게 도모함을 고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또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9일[九日]

아침에 들으니 의병장 유도석이 지름길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오후에 상주 객관(客館)을 나와 병력을 사열하고 탄약을 준비하였다.

밤에 영동 수령이 발 빠른 2인을 보내 편지로 급한 사정을 알리기를, “적도가 가득 차서 황간·영동·금산 등지가 장차 불시에 함락될 것입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반드시 상주·선산으로 가서 지난 가을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속히 의병을 일으켜 수만 생령을 구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운운” 하였다.

10일[十日]

동이 틀 무렵에 청산의 대소민과 삼공형(三公兄)의 문서[文狀]가 모두 도착하였다.

문서는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적도 3~4만 명이 무주로부터 불시에 도착하여 어제 오후에 영동 및 황간을 함락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재물을 탈취하며 지나는 곳마다 다 해치고 죽여서 사람 죽인 것이 난마(亂麻) 같았다. 지금 영동 용산(龍山) 장터에 진을 치고는 큰소리치기를, ‘청산·보은·상주·선산 및 낙동 병참 일로(一路)를 함락하고 한양으로 직향할 것이다. 운운’ 합니다. 화가 조석에 있어서 백성이 모두 무너지고 흩어지니, 청컨대 속히 와서 죄 없는 백성을 구제하여 주십시오.” 당시 본 읍에는 각지에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문서가 한꺼번에 몰려 마치 눈 조각 같았으며, 성 안이 소란한 것이 솥에 물이 끓는 것보다 더하였다.

오후에 보병 150명을 선발하여 마침내 길을 빨리 재촉하여 가서 한밤중에 80리를 행군하였고, 용산 장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참모 김제홍(金濟洪)·성걸(成杰), 영관 박명현(朴明顯), 군관 김상오(金常五), 초장 유우석(劉禹錫)·차재혁(車載赫)·박래홍(朴來洪)·박인계(朴寅啓) 등과 더불어 길을 빨리 재촉하여 가서 적정을 탐문하니, 사방으로 노략질하고 인가에 불을 지르며 주야로 어지러이 총을 쏘아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황망한 것이,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 위에 있는 개미새끼가 나올 곳을 모르는 것과 같았다. 적의 무리가 매우 많아서 혹은 8~9만이라 하고 혹은 10여 만이라 하였다.

11일[十一日]

아침에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는 진군하여 용산에 당도하여 적과 대전을 펼쳤다. 한참 후에 적의 무리가 사면에서 둘러싸는데 그 위세가 철통같았다. 마침내 그 동북쪽을 무너뜨리고 나와 오면(五面)에 복병을 두어 3명을 목 베고 무기와 전마(戰馬) 약간을 탈취하였다. 한편으로는 적을 끌어들이고 한편으로는 눈속임으로 거짓병사들을 만들어서 천천히 후퇴시켜 율계령(栗溪嶺)을 방어하였다.

이날 군사들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적도들이 창궐하여 모든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여러 고을이 무너져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 같으며, 천 리를 돌아다니며 싸워 길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이렇게 며칠을 지나면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은 나라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다. 사직의 안위가 이 일거에 달렸으니 너희들이 모두 나를 따라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나가는 것만 있고 물러나는 것은 없다. 적을 두려워하여 집을 뒤돌아볼 것인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모든 군사[一軍]가 크게 외치기를, “청컨대 공을 따라 함께 죽고, 의를 저버리면서 홀로 살지 않을 것을 맹서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병력을 3부대로 나누어 전초(前哨) 50 명에게 명하기를, “용산 뒤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면이 모두 산이고, 거기에 한 갈래 길이 있는데 아마 반도 못 가서 적이 반드시 와서 충돌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패배한 척, 도망하는 척하여 골짜기 입구로 끌고 나와 동북쪽에서 연주포(連珠砲)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면 몸을 돌려 총을 쏘라.”라고 하였다.

중초(中哨)·후초(後哨)에 명하기를, “용산 골짜기 입구의 산세는 머리 쪽이 높으니 너희들은 좌우 산 아래에 매복하고 있다가 동북쪽에서 포성이 울리는 것을 들으면 일제히 탄환을 쏘라.”라고 하였다. 내가 동북쪽에 올라가 지휘하며 기다렸더니, 전초가 과연 적을 만나 중간에서 총을 쏘며 교전하다가 적이 마침내 먼저 도망가자, 전초가 적이 도망간다고 크게 외치니 복병이 적이 도망간다는 것을 듣고 일제히 와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급히 쫓았다. 마침내 적이 산에 올라 어지러이 총을 쏘아 비가 퍼붓는 것 같았고 그 울림이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대개 아군이 병법을 알지 못하여 적이 달아난다는 소리를 듣고는 용기가 솟아 앞 다투어 쫓아가며 이미 약속을 어긴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어느덧 우리는 골짜기 안에 있고, 적은 산위에 있어 사면을 둘러쌌다. 마침내 내가 달려 들어가 크게 외치니, 전초는 동북쪽으로 무너뜨리고 나와서 몸을 돌려 총을 쏘아 물러났으며, 적을 쫓던 중초·후초는 점점 모여 대오를 정비하고 싸웠으나 한참 후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적을 깨뜨리기 어려웠다. 드디어 앞 골짜기에 50명을 매복시키고 패하여 달아나는 것처럼 하자 적도가 쫓아 올라왔다. 복병이 일제히 총을 쏘아 적 3명을 죽였다. 또 50명에게 두 번째 골짜기에서 엎드리게 하여 총을 수십 번 쏘고 다시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자 적이 또 쫓아 올라오기에 복병이 또 일어나니 적은 크게 놀라 달아났다. 이에 무기·전마 약간을 획득하였다. 마침내 대오를 느슨하게 하고 천천히 행군하며 후초를 시켜 두세 골짜기에 복병을 두어 혹은 손을 휘둘러 적을 부르고, 혹은 왼쪽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들어오고, 혹은 앞으로 나가고 뒤로 앉았으나 적은 의심하고 겁을 먹어 감히 쫓지 못하였다.

적도동(的桃洞)을 지나자 백성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애의 손을 잡은 채로 길을 막고 울며 말하기를, “가까운 동네의 생민이 공의 덕을 입어 다행히 오늘날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은 의병이 어제 이 동네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도륙하고야 말겠다!’라고 큰소리칩니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이곳에 계속 주둔하여 저희 생명을 보전하여 주십시오. 군량이 부족합니까? 저희 마을이 댈 수 있습니다. 탄환이 다하였습니까? 저희 마을이 운용(運用)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떠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걱정할 바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마침내 병력을 흩어 마을 숲속에 들어가 매복하는 모양을 하니 적이 바라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매복하더라도 우리가 어찌 두 번이나 너희들 계략에 빠지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동민들에게 여러 곳의 숲에서 연기를 피우게 하고 어두워서부터 밤까지 관군은 몰래몰래 율계령(栗溪嶺)으로 진을 옮겨 요충을 지켰다. 적은 끝내 적도동에 매복하여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한 발도 경내로 전진하지 못하였다.

술시에서 해시(亥時, 오후 9~11시)로 바뀔 쯤 눈꽃이 어지러이 날리고 달빛은 희미했다. 운무가 사방을 둘러 지척도 분간한 수 없었고 구름과 안개가 가득한 날씨였다. 병사들은 속으로 두려워하고 초장들은 모두 적의 세력이 너무 크니 상주(尙州) 읍내로 진을 옮겨 각지에서 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하였다. 나는 말없이 한동안 있다가 마침내 5리쯤 걸어가 파수군을 위무하고 함께 밤을 새우겠다고 하니 모든 군사들이 감격하여 진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자 어쩔 수 없이 군막에 돌아왔다. 마침내 옷을 벗고 높은 베개를 베고 누우니 장수와 보좌하는 이들이 놀라면서 물러가 다시는 진을 옮기자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대개 이때의 형세는 만약 한 걸음만 물러나도 중화(中化) 일대가 망하게 될 뿐 아니라 추풍령[大嶺] 이남은 장차 어느 지경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운 후 청주(淸州) 관병 및 옥천(沃川) 의병을 합한 450명이 청산읍에 주둔했다는 것을 들었다. 청주 영관에게 몰래 심복을 보내 편지하기를, “내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밥을 먹고 오시에 병력을 일으키겠습니다. 귀 부대가 뒤쪽을 쫓고 저희들이 그 앞을 공격하면,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합력하여 국가의 근심을 덜면 다행이겠습니다. 편지로 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회신이 곧바로 오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또 금산(金山)의 소모영 영관에게 편지를 보내 시각에 맞춰 거사하여 충성을 떨치고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12일[十二日]

오시 정각에 군사를 인솔하여 급히 용산 뒤 골짜기로 가 청주병을 구하고 다시 율계령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새벽 무렵에 용산 등지에서 총성이 크게 일어났다. 청주 관병에 격문을 전한 군사가 돌아와 보고 하였다. 청주 영관의 편지에 쓰여 있기를, “저희 진(陣)이 사경(四更, 오전 1시~3시)에 밥을 먹고, 오경에 군사를 일으켜, 동 틀 무렵에 적을 습격할 것이니, 귀 부대는 귀를 씻고 첩보를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청주 병력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처럼 운무로 둘러싸여 있는데 지리도 알지 못하면서 군사를 데리고 깊이 들어가면 안으로 적을 맞설 수 없고 밖으로 원군이 없어서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급히 보발(步撥)을 보내 탐문하게 할 때 세작(細作, 정보원)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적도가 사면에서 호병(湖兵, 청주 병력)을 둘러싸여 포위되어서 곤경에 처해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시각이 이미 오정을 지나 마침내 병력을 인솔하여 급히 달려가 한편으로는 소리치고 한편으로는 총성을 내 천지를 흔들었다. 적은 상주 병력이 왔다는 것을 듣고 크게 외치기를, “상주 병력이 또 왔는데 주장이 매우 능하여 가벼이 대적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적은 마침내 부대를 나누어 높이 올라가 우리를 향하여 진을 쳤다. 이때 청주·옥천의 병력이 형세를 틈타 달아나면서 그 군복을 벗고 그 무기를 버려 각각 새나 짐승처럼 흩어지니, 적도는 패하여 도망하는 것을 쫓고 그 뒤를 따라 전진하여 마침내 청산을 함락하였다.

이 싸움에서 청주 영관 및 병정 4명이 쏟아지는 탄환 아래 죽었으니 애석하다. 적도들이 우리를 향할 때 충청도 병력이 힘을 떨쳐 더불어 싸워 앞뒤에서 힘을 합쳐 호응했다면 반드시 이 적을 깨뜨릴 수 있었으나, 이렇게 하지 않고 오직 위험에서 벗어나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적도들이 어려움 없이 횡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14일[十四日]

병력에게 잔치를 베풀고 군중(軍中)에 방문을 걸었다. 소모사 영의 군관인 성귤(成橘)이 왔다.

방문은 다음과 같다. “동적은 무도하므로 반드시 멸하고야 말 것이다. 나라의 근심이 극에 달하였으니 의로운 자는 나서라. 너희 군인들은 사람마다 충성으로 섬기고, 하나하나마다 의로운 마음을 가졌으니 살아서는 이씨(李氏)의 백성이요, 죽어서는 이씨의 귀신이 될 것이다. 우리 열성조께서는 500년 동안 이곳에 깊은 은택을 베풀어주셨다. 하물며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요순의 인자함으로 우리 서민을 아들같이 여겨 하늘처럼 덮어주신다. 우리가 비록 임금과 떨어져 있는 초야의 백성이나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터럭 하나도 우리 임금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적을 멸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서약하자. 담소하면서 가고 북치고 춤추면서 돌아오며, 자식을 가르쳐 농사를 맡기고 각자 본업에 편안히 종사하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어찌 의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돌려 보이니 너희들은 경계하고 두려워하라.”

이 밤 해시 정각에 소모사가 다시 병력 40명을 보내 적을 추적하여 토벌하는 것을 도왔고, 편지를 보내 노고를 위로하니 전 병력이 기뻐 뛰었다. 당시 청산 수령은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 금백(錦伯, 충청도 관찰사)을 만나 유격장이 와서 청산의 백성들을 학대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또 정부에 유언비어를 흘렸다. 금백 및 정부에서 영영(嶺營, 경상도 감영)에 전보하여 진위를 탐지하게 하자, 영영에서는 상주 목사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소모사영의 모든 사람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였으나 나는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충의로 하는 것이다. 지나는 촌과 집을 조금도 범하지 않은 것을, 하늘이 위에서 살피시고, 귀신도 촘촘히 늘어서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죄를 범하였다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다. 마음으로 돌아봐도 꺼릴 것이 없으니 다만 천명을 기다릴 뿐 어찌 두려워하며 어찌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5일[十五日]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오후에 정보원[細作]이 보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청산에 주둔해 있고, 거괴는 동헌에 유숙하며, 나머지는 모두 각 관청 건물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여러 적들에게 방문을 붙여 보이기를, “모레쯤 상주를 함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러 군인들에게 각자 죽통(竹筒) 20개 씩 마련하여 탄약을 채워 전투에 임할때 급히 쓰도록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황간에 머무는 일본 육군 보병 소위 구와하라(桑原)가 병력 16명을 인솔하고 와서 만났다.

이보다 앞서 의지하는 막내 동생[阿季] 김직중을 청산·영동·황간에 보내 적정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구와하라씨가 황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듣고 편지하여 청하기를, “공이 만약 내 지휘를 받고자 하면 용산으로 가지 말고 율계령으로 와서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은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날 밤 사경에 과연 왔다. 구와하라씨는 나이 27세로 성실하고 신중하며 엄중하고 꼼꼼하며 두루 살펴 한 번 보았는데도 오랜 친구 같아서 함께 죽기를 다짐하였다. 그의 북받쳐 오르는 의(義) 때문에 좋아할 만 하였다. 운곡(雲谷)에 사는 황민(黃民)과 지산동 사람이 술·떡·담배·과일을 가지고 와서 군인들을 위문하였다.

16일[十六日]

병력을 인솔하여 청산에 들어갔다.

방문에 이르기를, “의병은 지나가는 곳을 조금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남의 물건을 탐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동적과 같으니 모두 군율로 다스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도 8만여 명이 보은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관청 건물을 헐어버렸다. 보은의 수령 이규백(李圭白)은 급히 청주로 가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적의 후미는 원암(元巖)까지 이어졌고, 머리는 수피(水皮)에 가 있으며, 가운데는 보은에 있어서 30리에 걸쳐 있었다. 이날 밤 관군은 청산읍에 진을 쳤다. 밤중에 구와하라를 돕는 부대로 일본 육군 보병 대위 미야케 다케요시(三宅武義)가 병력 13명을 인솔해 왔고, 태봉(台峰)에 있던 일본 병력 8명도 뒤이어 왔다. 미야케씨는 사람됨이 대범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술을 좋아하였으며 농담도 잘하였으나 병사들을 대하면 자세를 바로하고 의연하여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기운이 있었다.

소모사영의 군관 차상출(車尙出)이 함창(咸昌)·용궁(龍宮)의 병력 40명을 거느리고 와서 소모사와 상주 목사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상주 목사의 편지에, “옛날에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있었다면, 지금은 모(某, 김석중)라고 하겠다. 운운” 하는 말이 있어 내가 보고 탄식하기를, “사람을 장려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면 사람을 무너뜨림이 지나치게 심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나중에 발생할 근심을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17일[十七日]

아침에 청산 객사의 전패(殿牌)를 살펴보고 진으로 돌아왔다.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키의 장단과 노소를 구분해 부대를 나누고 드디어 병력을 인솔하여 보은 종곡(鍾谷)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적을 습격하여 군수 물자를 탈취하고 새벽까지 계속 싸웠다.

적도가 전패를 옮겼다고 들었기 때문에 즉시 나아가 살펴보니 전패는 문 밖에 있는 상[案] 위에 놓여 있고 용이 새겨진 초는 심지를 잘라 계단 아래 버려져 있어서 본래 자리에 봉안하였다. 거민을 위로하고 타일러서 각각 안심하고 모여 살게 하였는데, 읍의 정경이 참담하여 황량한 무너진 집[敗院] 같아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당시 본래 있던 병사 190명은 여러 달 동안 따라다녀서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여 끓는 물과 불에 뛰어들라 하더라도 모두 명령을 따를 것이지만, 함창과 용궁 두 읍의 병력은 어젯밤 새로 와서 주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각 병사들에게 앞에 각자 이름을 적어 내고 물러나게 하였다. 문을 닫고 앉아서 이름을 불러 부대를 편성하되 8척·7척을 구분하고, 노대(老隊)·소대(少隊)를 나누어 구별하니 모든 병사들이 이치에 밝다고 하였다. 일본 장교도 탄복하기를, “공은 참으로 옛날 명장입니다. 어떻게 한 번 본 다음 문을 닫고 앉아서 이처럼 분별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웃으면서 답하기를, “비록 100만이 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게 무슨 말할 거리나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일본 장교가 지도를 보고 원암(元巖)으로 행군하려 하므로 내가 수피로 먼저 진격할 것을 청하였다. 일본 장교가 말하기를, “원암은 대로로 갈 수 있으면서 가깝고, 수피는 좁은 길로 가야 하는데다 멉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원암은 꼬리이고 수피는 머리인데 만약 그 꼬리를 먼저 치면 머리는 반드시 상주로 향할 것입니다. 수피는 상주 경계에서 10리에 불과합니다. 또 상주를 방어하는 것이 나의 책임인데 어찌 적을 몰아 우리 경계로 들어오게 하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일본 장교가 말하기를, “청산·보은은 귀국의 땅이 아닙니까?”라고 하기에, “각자 담당한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일본 장교는 “그렇다면 단지 상주만 지키면 될 텐데 왜 힘들게 적을 쫓아 이곳까지 와서 죽음도 피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정색하고 책망하며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극악한 적이 멋대로 탐학한 짓을 하여 온 나라가 함께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임금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충성으로 힘을 다해 이 적도를 토멸하기를 맹세하는데 어찌 이쪽 구역, 저쪽 경계라 하여 성지(城池)가 훼파되고 백성이 몰락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공들을 한번 보고 충의로 서로 사귀기를 허락하였는데 뜻밖에 이런 가소로운 말을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 장교가 절하고 사죄하기를, “진실로 공의 말과 같습니다. 조금 전 말은 다만 웃자고 한 것입니다. 공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피를 향해 진군하다가 도중에 일본 장교 두 사람이 와서 의논하기를, “저희들이 먼저 가서 적정을 탐지하여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좋습니다. 공들이 역참마다 표를 해두고 가면 신호로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수피령에 오르자 일본 병사 및 본 부대의 병사들이 머물러서 행군하지 않기에 급히 말을 몰아 물어보니 일본인으로 통역하는 자가 답하기를, “우리나라 대장이 적에게 살해되어 모두 두려워서 곡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너는 너희 대장이 죽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묻자,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참마다 표를 해두었는데 이 역참에는 표가 없으니 반드시 적에게 살해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온 자들[從者]에게 통역하는 사람을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죽었다고 잘못된 말을 퍼뜨려 병사들의 마음을 미혹하였으니 죄가 죽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너희 대장은 혼자 적정을 캐고 다녔는데 몸을 지키는 게 뭐가 어렵다고 적에게 해를 입었겠는가? 그 사람됨이 꼼꼼하지 못해 몸을 지킬 지략도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고도 장수가 되면 장차 어떻게 쓰겠는가? 너희 일본 병사는 모두 나의 지휘를 따르라. 명령을 어기는 자는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일본 병사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명령을 들었고 일본인 통역하는 자는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청하였다. 이에 “공을 세우면 죄를 없애 주는 것이 군중(軍中)의 상례이다. 네가 수피에 들어가 적정을 탐지해 오면 너의 죽을죄를 씻어주겠다.”라고 하니, 일본 통역이 땅에 엎드려 애걸하여 말하기를, “죽더라도 대인 앞에서 죽지 적인(賊人)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결박을 풀도록 하고 말하기를, “너를 죽인다고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좌우를 돌아보았으나 종자가 한 명도 없으므로 내가 말을 때려 앞으로 나가 동구에 이르러 돌아보니 성귤이 홀로 걸어서 뒤쫓아 왔다. 내가 말하기를, “이처럼 위험한 곳에 군은 어찌 나를 따라오는가?”라고 하니 성귤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사지도 피하지 않는데, 내가 홀로 벗이 되어 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그 때문에 탄식하고 말을 세워 멀리 동네를 바라보니 고요하고 아득하여 형체나 그림자가 없었다. 말을 돌려 주둔한 곳에 이르러 멀리 보은을 바라보니 성내에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고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여러 병사들이 적도가 보은을 함락시켰으며, 일본 장교가 읍로(邑路)로 향한 것 같다고 하였다. 여러 병사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고 다시 급히 말을 달려 동네에 들어가 2명에게 뒤따르면서 총을 쏘게 하였는데, 갑자기 높은 언덕에 검은 옷을 입은 2명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어 보았더니 일본 장교였다. 적정을 탐지하며 여기까지 와서 적이 읍으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동네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왔다고 하였다. 말이 일본 통역이 목숨을 애걸한 데 이르자 일본 장교가 절하고 이르기를 “지당하십니다. 지당하십니다. 대인은 참으로 뜻이 높은 선비이며, 명장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진군하여 전진하려 하니 일본 장교는 곧바로 보은읍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내가 “안 됩니다. 지금 적은 3부대로 나뉘어 원암에 하나, 장내에 하나가 있으며, 가운데 부대는 보은에 들어갔습니다. 아군이 곧바로 보은에 들어가 가운데 부대와 충돌하면 적이 앞뒤에서 협공을 하여 승패를 알 수 없으니, 이는 병가에서 꺼리는 것입니다. 관동(關洞) 삼거리를 거쳐 청주·상주의 경계로 진군하여 뒤를 돌아볼 염려를 없게 하고, 3개의 진이 합쳐 주둔한 후에 계책을 내어 무찌르는 것이 나을 것이니 이는 만전을 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일본 장교가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관동에서 왼쪽 길로 행하여 장내에 이르니 적은 이미 종곡에 들어가 있었다.

저녁에 귀인교(貴人橋)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세워 밥을 먹이고 한편으로 드러나지 않게 길을 가 적도들이 있는 곳의 기미를 탐지해보니 3개 진이 합쳐 종곡 및 풍점(風店)에 있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용산에 들어가 호서 병사를 구한 후 곧 바로 참모 윤흥렬(尹興烈)을 청주에 보내 다시 병력을 돌려 힘을 합쳐 적을 쳐부수자 하였는데 이날 저녁 청주 병사 300 명이 막 구암점(龜巖店)에 도착했다는 것을 들었다. 서로 20리 정도 떨어져 있어서 첩자[細作]에게 드러나지 않게 가서 약속하기를 밤중에 종곡에서 총소리가 들리면 같이 행동을 취하기로 하였다.

술시 정각에 일본 장교를 청하여 야간 기습할 계책을 의논하니 일본 장교가 “우리 일본 사람은 야간 전투를 모르는데다 지리도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병사의 수도 매우 적으니 가볍게 진군할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진공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였다. “공의 말에 불가한 것이 3가지이니 병법에 이르기를, ‘상대가 많고 아군이 적으면 야간 기습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낮이라면 적의 무리를 보고 예기가 저절로 꺾이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또 이르기를, ‘미처 예상하지 못할 때 나가고, 대비가 없을 때 공격한다.’라고 하였는데, 내일 아침 진군하면 허실을 서서 보게 되니, 적은 이미 대비할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밤에 싸우고 낮에 싸우는 것은 원래 다른 전법이 아닌데, 지금 모른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 그 세 번째입니다. 내가 헤아려보니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다섯입니다. 우리는 도리에 따르고 저들은 거역한 것이 첫 번째요, 그들이 생각지 않았을 때 나가는 것이 두 번째요, 날씨를 보니 서북풍이 불어 기쁨이 있을 조짐[主]이니 세 번째요, 양쪽에 달무리가 약간 검은 것은 적이 패망할 조짐[主]이니 네 번째요, 도참설에 이르기를, ‘속리산에 흰옷을 입은 적이 있으면 마고성(麻姑城) 아래 땅이 피로 가득찬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삼남의 극악한 적이 마침 모두 이곳에 모였으니 그 다섯 번째입니다. 자고로 도참설은 믿을 것이 못되지만 이치로 미루어보아도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공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힘을 내었으니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각각 조짐[主]을 보고도 오늘 밤을 넘겨버리면 이 적을 평정할 날이 없을 것이니 비록 후회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필경은 공은 공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하여 공들은 좋아하는 대로 여기 있고 나는 떠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니 구와하라씨는 절하며 사죄하여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옛날의 손자(孫子)·오자(吳子)입니다. 공의 책략을 따르기를 청하고 감히 진군할 길을 묻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림으로 세 갈래 진군할 길을 보였다. 대위는 본병(本兵) 50명과 일본 병사 22명을 거느리고 왼쪽 길로 들어가고, 소위는 본병 50명과 일본 병사 16명을 거느리고 오른쪽 길로 전진하며, 나는 별포 40명을 거느리고 가운데 길로 진격하였다. 3초장에게 병사 50명을 나누어 먼저 떠나게 하여 세 길에서 맞이하고, 해시 정각에 일제히 총을 쏘기로 약속하였다.

아직 풍점(風店)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 대위가 본병을 보내 고하기를, “적도들이 한쪽은 풍점에 주둔하였다고 들었으나 저는 도로에 어두워 정탐할 수 없으니 공의 지시를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좌우를 돌아보았으나 한 사람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아우 김직중이 나오면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어찌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혼자 가서 탐지하여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별포 10명도 뒤따라 “낭군(郎君)이 피하지 않는데 우리들이 어찌 뒤처지겠습니까? 따라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 10명은 풍점 가까운 곳에 각자 나누어 좌우로 매복하고 접응하라.”라고 하였다. 김직중에게 몰래 걸어 들어가 정황을 자세히 탐지하여 오도록 하였는데, 잠시 후 돌아와 말하기를, “풍점에는 등불이 꺼지고 문이 닫혔으며 적을 하나도 볼 수 없고, 다 종곡에 합쳐 주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고 멀리 바라보니 네 곳에 파수꾼이 불을 놓고 있었다. 꼼꼼한 자 10명을 드러나지 않게 전진시켰더니 세 곳은 사람이 없고 한 곳만 적 4명이 길을 지키고 있어서 한꺼번에 달려들어 결박하여 왔다. 3명은 곧바로 처결하게 하고, 1명은 불러다 자세히 힐문하자 말하기를, “호남에서 시작하여 17곳의 전쟁터를 거쳤는데 이제 삼남이 모두 일어나 한 갈래는 무주·영동·청산·보은·상주·선산 및 일본인 병참·영남 감영·동래부를 함락하고, 한 갈래는 청주·공주로 가서 바로 한강을 건너 서울을 포위하여 대사를 도모하며, 한 갈래는 청국(淸國)과 후원하기로 약속하여 서북 각 지역에서 모두 호응하였습니다. 이제 종곡에 주둔한 것은 삼남대장이 합친 병력 10만 입니다. 운운” 하였다. 문초한 후 역시 처결하였다.

시각이 이미 해시 정각이 되어 마침내 일제히 총을 쏘며 세 길로 진공하자 적도는 막 짐을 꾸리고 있었다. 각지에서 약탈한 재물을 군수품으로 삼아 술과 고기가 낭자하며, 밥과 떡을 배불리 먹고 혹은 편히 자다가 혹은 잔을 가득 채우고 앉았다가 갑자기 총성을 들으니 말에 안장을 얹지 못하고 사람은 관도 쓰지 못한 채, 무기와 군수품을 버리고 동쪽으로 뛰어가고 서쪽으로 달아나 문득 남은 것은 하나의 빈 마을이었다. 이에 병사들을 지휘하여 모두 파수문이 있는 길로 들어갔다. 대오를 점고하고 진을 나눌 때 갑자기 총성이 하늘을 울리고 함성이 땅을 흔드는 소리를 들었고, 한 자리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북쪽 모퉁이 위에서 떠오르듯이 나왔으며, 쿵쾅하는 큰 소리가 나면서 탄환이 머리와 어깨 위에 비가 쏟아지듯이 떨어져 벌이 지나가고 우박이 내리는 것 같았다. 급히 병사들을 일자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마주하여 총 한방을 쏘고 한 걸음을 나가며 싸웠다. 인시(寅時, 오전 3~5시) 초(初)가 되자 적 쪽의 총소리가 덜해졌다.

18일[十八日]

신시(申時, 오후 3~5시) 정각 동적 7만여 명을 종곡에서 대파하고, 회군하여 보은군에 도착하였다.

이날 새벽에 보니 적도는 산 위에 늘어서서 이미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에 미야케씨가 오른쪽 산 아래 엎드려 위로 공격하고, 구와하라씨는 왼쪽 산 아래 엎드려 위로 공격하며, 나는 가운데 길의 텅 비어 있는 땅을 끼고 마주하여 공격하였다. 사시가 되자 적의 세력이 점점 거세져 도륙하겠다고 소리 소리쳤다. 대개 적은 우리 군사가 매우 적은 것을 보고 평탄한 곳을 밟고 아래쪽을 삼키려고 한 것이다. 공격하며 40~50보 나가기를 수십 번이나 하였다. 이에 50명을 세 부대로 나누어 풍점·장내·장암(壯巖)의 요충로에 군사가 있는 것처럼 연기를 피우고 총을 쏘아 귀로를 차단하였다. 또 10명에게 합쳐서 한 적에게 쏘게 하니 적은 소리를 듣고 넘어졌으나 오히려 악을 쓰며 싸웠고 시신을 밟은 채 계속 총을 쏘았다.

이처럼 위급한 때에 일본 병사들이 적의 군수품을 싣고 나가 먼저 피하려 한다는 말이 들렸다. 즉시 그들을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희 30명 때문에 우리 병사 200명을 죽이겠는가? 우리 병사 200명만 죽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물러나면 삼남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게 되는데, 어찌 먼저 군수품을 운반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가? 죄가 참수하여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일본 장교가 듣고 급히 멈추게 하였다.

당시 적의 기세가 거세어 함성을 지르는 것이 부딪쳐 마치 조수가 나가고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군은 밤부터 오시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여 기력이 점점 떨어지고 모두 겁을 먹었다. 마침내 칼을 빼어 크게 외치기를, “사람이라면 누군들 죽지 않겠는가? 충의를 위해 죽으면 죽어도 영광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나는 자는 참하겠다!”라고 하자, 병사들이 모두 떨쳐 일어나 전진하며 죽기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적의 포위는 점점 좁혀오고 돌파할 길이 없었다. 이에 일본 장교를 불러 말하기를, “공들은 많은 전투에 종군하였으니 반드시 좋은 꾀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돌파할 수 없고 계략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니 계략을 내어보시오”라 고 하자 일본 장교가 답하기를, “저희들이 허다하게 종전하였으나 이 적의 무리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풀창고[草廩]가 산을 덮은 것 같고, 전선(電線)이 줄지어 선 것 같습니다. 약 7만 이상의 수가 죽기로 악을 쓰며 싸우니 과연 적을 대항하기 어렵습니다. 공의 책략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대위·소위는 우리 병사 각 15명씩을 돌려보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별포 15명을 분별하여 합쳐 45명에게 언덕 아래에서 몰래 매복하고 있다가 군복을 벗고 흰옷으로 총을 들고 산 꼬리를 따라 올라가게 하자, 적은 멀리서 보고 흰 옷을 입고 있으니 자기 무리로 생각하였다. 산꼭대기 가까이 가서 45자루의 총이 한꺼번에 탄환을 쏘자 산꼭대기의 적이 응전하였으나 별이 떨어져 벼랑에 걸리듯 하고 끊어진 골짜기에 잎이 구르는 것처럼 거꾸러지는 자가 수십 명이었다. 산 아래 우리 병사가 한꺼번에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무릅쓰고 위로 치고 올라갔으며, 일본 병사도 칼을 휘두르며 뛰어 오르자 적은 마침내 크게 무너졌다. 앞에서 고꾸라지고 뒤에서 넘어져 서로 짓밟았으며, 피가 흐르는 것이 움켜쥘 정도였고, 시신이 온 산에 이리저리 가득 찼다. 김제홍·성걸·김상오·유우석 등이 날카로운 칼을 뽑아 목을 자른 것이 10여 명이었으며, 어지러운 총에 맞아 죽은 것이 2,200여 명이었고, 야간 전투에서 살해한 것이 393명이었다. 포획한 우마 60여 두, 깃발과 북 수십 면(面)은 모두 일본 병사들에게 주어 서로 구해줬던 공을 사례하였다. 그 나머지 나팔·무기 등의 물건은 본군에 속하게 하였다. 완전한 승리를 크게 얻었으니 방문을 내걸어 백성을 안심시켰다.

바야흐로 승승장구할 때 서북쪽 위에서 징 연주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청주 병력 300명이 3리쯤 되는 곳에서 막 기어오르고 있었다. 원근 산 위의 적도들이 멀리서 보고는 큰 원군이 왔다고 생각하여 깜짝 놀라 달아났다. 마침내 청주 병력을 불러 위로하여 말하기를, “이제 적도가 크게 패하였다. 탄환이 다 떨어졌으나 맨주먹으로도 잡을 수 있고, 한 손으로도 몰아낼 수 있으니 제군은 급히 뒤를 쫓아 모두 쓰러뜨리기 바라오.”라고 하자, 청주 병력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사죄하여 말하기를, “공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벽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을 절감합니다. 이제 또 가르침을 주시는데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즉시 모두 뒤를 쫓아갔다.

동네로 돌아와 병사를 점고하니 본병은 한 사람도 부상을 입지 않았고, 함창 병사는 1명이 오른손에 부상을 입었으며, 용궁 병사 1명은 왼팔에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이 모두 심하지 않았다. 구와하라씨는 배 아래쪽을 다쳤는데 또한 작은 상처뿐이었다.

보은 수령 이규백이 청주에서 돌아와 소 1마리를 끌고 승리한 병사들을 위로하기를 청하며 말마다 치사하기를, “공의 힘을 입어 근처 지역의 백성이 집안을 보전하고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났으니, 공의 은혜를 논하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습니다. 하물며 극악한 적을 크게 쳐부수어 삼남이 평안해졌으니 공의 공은 비록 역사에 실리더라도 고인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운” 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의 괴수 이른바 대접주 임국호(任局浩)·이원팔(李元八)·김군오(金君五)·정대춘(鄭大春) 등의 목을 베었고, 그 외에도 죽은 자가 있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방문을 내걸어 민을 타일러서 각자 안심하도록 하였다. 소 2마리를 주어 경작을 도왔다.

일본 장교가 밤에 종곡에 주둔하여 흩어진 적의 소식을 탐지한 후 돌아오겠다고 청하기에 내가 힘써 그것이 불가함을 말하여 이르기를, “종곡 전 동네는 불행하게도 큰 적이 거점을 삼아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었고 집집마다 가산을 탕진하였으니 지금 하룻밤이라도 다시 유숙한다면 비록 아침 저녁밥을 사서 먹더라도 공급할 힘이 없습니다. 또 이곳은 외진 곳이어서 널리 탐지할 수 없고 보은읍으로 물러가 사방으로 보내 탐지하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보은 수령에게도 역시 읍에 이르러서 민심을 진정시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일본 장교도 함께 물러났다.

19일[十九日]

영남 감영 병력 및 금산 소모영 병력, 선산 병력이 비로소 보은읍에 도착하였다. 이날 병력을 돌려 상주 화령(化寧) 장터에 갔다. 소모사도 나와 맞이하고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군교를 시켜 세 곳의 병력이 늦게 도착한 까닭을 물으니 혹은 하루에 10리를 가다가 도로 물러나고, 혹은 5리를 가다가 그쳤다. 적에게 나아가는 것에 겁을 먹고 세월만 보냈으니 8~9일 행군한 것이 단지 50~60리였다. 오호라! 이는 누구의 책임인데, 병사들을 책망하는 것이 옳은가?

일본 장교들과 서로 작별하였다. 미야케씨는 우마 7두를 보냈고, 구와하라씨는 은화 20원을 노자로 주면서 말하기를, “제가 동양을 두루 다녔지만 대인처럼 뛰어난 공적이 있는 분은 처음 봅니다. 임금께 아뢰는 날 저희들의 공을 치사할 것은 없습니다. 우마는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군사들을 위문하고, 은화는 약소하지만 정표로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또 구와하라씨가 다시 말하기를, “오늘 공을 보내니 실로 부자가 서로 작별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운운” 하였다.

소모사가 적의 세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듣고, 고립된 군사가 원조도 없는 것을 크게 염려하여 마침내 몸을 일으켜 출진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김모와 함께 죽을지언정 여기 앉아서 위태한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라고 하였다. 17일에 군사를 일으켜 화령 장터에 당도하여 승전보를 듣고 멈추었다. 노고를 위로하고 축하하여 전군을 감격시켰다.

19일[十九日]

대오를 살펴 먼저 떠났고, 소모사는 부대를 돌려 돌아갔다.

이날 전군이 개가를 부르니 백성이 춤추었으며 심지어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말하기를, “오늘처럼 살아서 태평한 기상(氣像)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북정(北亭)에 당도하자 본 목사 이만윤(李晩胤)이 나와 맞이하였고, 토성(土城)에 이르자 진장(鎭將) 유인형(柳寅衡)이 나와 맞이하였다. 마침내 진남루(鎭南樓)에 오르니 소모사 장락(張樂)이 군사들을 위로하였으며, 본군의 부모는 일어나 춤추며 말하기를, “즐겁고 통쾌하다. 통쾌하고 즐겁다. 한 사람도 한 마리 말도[一人一騎]도 하나도 다치지 않았구나. 옛날에는 내가 문에 기댄 채로 네가 죽을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네가 살아서 돌아왔구나. 아마도 내가 신선이 되었나보다. 이것이 누구의 덕인가? 정공! 김공! 김공의 승리, 정공의 공로. 정노인이 없다면 누가 김공을 알겠는가? 즐겁고 통쾌하다. 통쾌하고 즐겁다. 너는 숟가락을 팔고 나는 솥을 팔아 집집마다 비를 세워 공의 장수를 빌자!”라고 하였다. 사녀들이 많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환호하는 소리, 기쁜 기운이 가히 고금의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21일[二十一日]

미야케(三宅) 대위가 병력을 돌려 상주읍에 왔다.

22일[二十二日]

미야케씨를 낙동병참사령부로 돌려 보냈다.

이날 저녁 구와하라씨가 편지를 보내 문안하였다. 편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처음 제가 공을 율계에서 만났을 때 모습은 온화하고 말은 신실하여 한번 보았는데도 오래 된 것 같았으며, 며칠을 같이 있으매 간절함이 더욱 절실했습니다. 제가 비록 노둔하지만 어찌 감히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대개 공이 삼군을 지휘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오호라! 공의 덕은 가히 우러를 만하고 공의 의는 가히 사모할만합니다. 비록 옛날의 손자·오자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직책을 보전하고 후에 상주를 지날 때 공에게 절하고 싶은 마음이 밤낮으로 솟구치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매우 추운 계절에 임금과 나라를 위해 부디 몸을 아끼십시오.”

28일[二十八日]

구와하라(桑原)씨가 내방하여 함께 포정(浦亭)의 고향 집에 함께 갔다.

밤에 구와하라씨가 아들 규수(珪洙)를 불러 더불어 필담을 나누고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어린 나이인데도 재주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12세 소년이 이처럼 일찍 공부가 밝은데 어찌 구미 각국의 책을 가르치지 않으십니까? 우리나라의 아동을 가르치는 법은 충군애국의 네 글자를 먼저하는데, 이 때문에 전투에 임하여 죽는 것만 알고 사는 것은 알지 못하며, 전진만 알고 후퇴는 모릅니다. 우리나라에도 문장이 있는데, 문장이 산과 같이 쌓인 자가 종종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소모영에서 의정부에 승리를 보고하였더니 회답문서[回題]가 왔다.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사들이 힘을 내어 적을 토벌하였으니 극히 가상하다. 일이 평정된 후 마땅히 논공행상이 있을 것이다. 운운”

영남 감영에서 승리를 보고하자 답하는 문서[文移]가 왔다. 대략은 다음과 같다. “금번 김모가 떨쳐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 일전하여 승리를 얻었으니, 통쾌한 사람이고 통쾌한 일이다. 마땅히 임금께 아뢰어 상을 청하겠다. 운운”

도순무영(都巡撫營) 및 군부(軍部)가 모두 소모영에서 보고한 승전보를 바쳤다. 회답은 아직 자세히 보지 못했다.

주석
감사 정현석(鄭顯奭) 1894년 10월 6일 황해도농민군이 해주에 둔 황해감영을 점령하고 감사 정현석을 사로잡았다. 이때 아기접주라 불리는 소년 김창수(김구)가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등단(登壇) 의병장이 되어 출동할 적에 대장의 의식에 따라 단을 세우고 여기에 올라 하늘에 맹세하면서 군사지휘를 선언하는 의식이 있었다. 임진왜란때의 관례이나 조정에서 금지하였다.
낙동 병참 일로(一路) 1894년 여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중간중간에 병참소를 두고 일본군 진출을 도왔는데 선산 태봉의 낙동강가와 충주 가흥 등지에도 두었다.
태봉(台峰) 위의 주 참고. 일본 병참소에 주둔한 일본군.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둘이 다 한의 공신이 되었다. 초의 항우를 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전패(殿牌) 각 고을 객사에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 이는 임금을 상징하여 매월 초하루 보름에 보여 배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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