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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동요일기(東擾日記)

1894년 8월 일 이른바 동학(東學)의 무리가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니 이런 난리가 없다. 가까운 읍으로 말하자면, 김산(金山), 개령(開寧), 선산(善山), 인동(仁同), 지례(知禮) 등의 읍이 소요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8월 23일 성주(星州) 지역에 들어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침학하였고, 27일에는 읍에 들어와 소요를 일으켰다. 그래서 본 것과 들은 것을 뒤에 기록하였다. 이들 무리 중에 전라도 지역에 있는 자들은 도인(道人)이라 일컬으면서 탐관과 토호들을 응징한다고 하는 등 종종 해괴한 소문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말인 듯하니, 오늘 이들 무리들은 다만 토색을 일삼을 뿐이다. 매우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다.

순영에 머무는 전석에게 보내려던 글 [擬與留巡營銓席]

전석(銓席)은 조사가 끝나야 돌아온다고 들었습니다. 적계면의 장부를 안고 가서 조사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못합니다. 노고는 고사하고, 쓸데없는 비용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걱정입니다. 사감(査減)하는 절차는 대략 전하는 말을 들으니, 읍민(邑民)들은 많이 면제해주는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이는 모두 축하할 일입니다. 이런 경황에 돌아다니면서 별탈이 없으시고, 정리한 장부가 그 사이에 있다고 하니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저는 병이 심해서 겨우겨우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병이 근래에 더 심해져 두려워서 늦게라도 달려가 받들 수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레 동학의 소요(東擾)가 일어나 온 고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소요를 그치게 할 방안이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저희 집은 재해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니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참기 어렵습니다. 대강의 상황을 어지러이 기록하여,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서 급히 보내니 1통의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신다면 한 번에 아실 것입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직접 군막에 가서 간절히 읍소할 것이니, 징각(澄閣)에 전달하여 물에 빠진 자를 돕고 불에 타는 자를 구하게 하시고 또한 관문을 내리기를 선처하라는 뜻으로 감사께 들어가 간절히 빌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8월 23일 [八月二十三日]

동도(東徒) 수십명이 천창(泉倉)에 이르러서 진사 여명구(呂命九)를 끌어내어 묶고 때리니, 끝없이 곤욕을 치렀으며, 수천 냥의 돈을 토색하였다. 또한 장참판댁에 들어가서 그의 차남인 장순화(張舜華)를 잡아내어 또한 곤욕을 치르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 이 무리들은 지례(知禮) 방면에서 왔다고 한다.

동도(東徒) 수십 명이 20일 쯤 망성(望星), 칠성(七星)의 주막과 대마(大馬)의 주막에 모여 평민 몇 사람을 잡아다 놓고, 사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남의 무덤에 장사를 치른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23일 저녁 도원리(桃原里)의 배덕립(裵德立)의 집에 들어가서 돈 500냥을 토색하였고, 이 집에 남은 것이 없어서 수작에 응하지 못하자, 곧바로 셀 수 없이 마구 때리고 대마점(大馬店)으로 끌어내니, 곤욕을 치르는 모습이 비할 데가 없었다. 그의 당질 배문선(裵文善)은 소식을 듣고 올라가서 죽게 된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구르다시피 내려와 여기저기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그는 나에게 와서 그와 같은 모습을 직접 말하였다.

25일에 전해들은 소문에는 간신히 200냥을 구해서 주어서야 풀려났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이 무리들은 김천(金泉) 길을 따라 왔다고 한다.천창(泉倉)의 무리들은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읍으로 들어가서, 대산령(大山嶺)의 배좌수(裵座首)의 집에 들어가 토색하고 또 용전(龍田)의 이치우(李致雨) 집에서 토색했으며, 한 부대는 좌방리(左方里) 배웅천(裵熊川)의 첩인 소지(小之)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린 것이 비할 데 없었다. 웅천의 첩 오라비인 송가(宋哥)를 잡아다가 묶고 때리며 배웅천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24일 [二十四日]

24일 동학도 10여 명이 시장 근처의 문용원(文龍元) 집에 모였다. 그날 저녁 잇달아 온 자들이 또한 10여 명인데 모두 25~26명 정도였다고 한다. 환도(還刀) 1구, 총 몇 자루, 붉은 깃발 2쌍, 창 2자루를 가지고 문밖에 서 잡인들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두목이 되는 자 몇 명이 방에 발을 치고서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들 무리들은 천창에서 온 무리들이었다고 한다.

25일 [二十五日]

25일 동학도 7명이 관문에 들어갈 때에 사또(使道)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사또를 일어나게 하고, 곧바로 동헌방에 들어가 술잔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동도 1명이 장교 1명, 군뢰 1명과 함께 영기(令旗)를 가지고 읍내의 각 동(洞)을 순행하였다. 그들이 말하려 한 것은 내년의 결가(結價)는 결마다 15냥, 호포(戶布)는 호마다 봄가을로 각각 6전씩 거두는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날 아침밥을 먹은 후 동학도 5~6명이 본동의 마을 우물 근처에 들이닥쳐 동생의 집을 가리키면서 아이에게 묻기를, “여기가 배경일(裵敬一)의 집인가”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이것은 도(都)아무개의 집입니다”라고 하자, “도아무개는 죄가 없다. 너는 배아무개의 집을 가리켜보아라”고 하고, 곧바로 마을 사람을 끌고서 그 집을 지목하게 하였다. 총을 한 방 쏘고는 곧바로 안마당에 들이닥쳤다.

배숙현(裵叔賢)집의 남정네들은 이미 전날에 기미를 알고 피하였고, 단지 여자들만 있었다. 숙현의 며느리를 몰아내 끌고서 도당들이 모인 곳으로 가니, 숙현의 늙은 부인 또한 통곡을 하면서 따라갔다. 뒤에 듣기로는 그들 무리들이 숙현의 며느리를 잡아들여서 결박하고 주리를 틀면서 숙현의 아들인 배경일이 간 곳을 캐묻고 수없이 곤욕과 핍박을 주었다고 하며, 이어서 방에 가두었다고 한다.
오후에 이르러 또 캐묻자, 그 부인은 곤욕을 이기지 못하여 본동에 숨어 있다고 속여 말하기를, “나와 함께 가면 내가 지목하겠다”고 하였다. 그들 무리 5~6명은 부인을 본동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을 우물가에 이르자 그 부인은 물을 뜨던 여인에게 청하기를, “내 목이 몹시 마르니, 표주박으로 물 한 그릇 마시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이에 우물에 몸을 던졌다. 물을 뜨던 여러 사람들이 깜짝 놀라 구하려 하였으나, 그들 무리들이 우물의 벽돌담을 둘러싸며 소리쳐 말하기를, “이 여자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었다.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너희들은 절대로 도와서 꺼내주지 말라”고 하며, 구원해주려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라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겉으로는 큰 소리쳤지만, 속으로는 두려운 안색을 띠었다고 한다. 이때 나는 집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숙현의 처가 우물에 빠진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라 지팡이를 짚고 우물가로 갔는데, 이미 구한 뒤였다.
대개 이 마을의 우물은 오랫동안 가문 뒤라 물이 아직은 그리 깊지 않아서 겨우 어깨에 미칠 정도였다. 그 집의 머슴과 마을의 머슴들로 때마침 그것을 본 사람들은 급히 크고 긴 밧줄을 찾았으며, 머슴 하나는 허리에 밧줄을 매고 우물에 들어가서 구하려 하였는데, 그 부인이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머슴은 부득이하게 부인을 끌어안아서 밧줄로 허리를 묶었고 우물가의 여러 사람들은 잡아당겨 꺼냈다.
그들 무리는 머슴에게 짊어지게 하고 그 집으로 따라 가게 하였다. 또한 총을 한 번 쏘아 내당에 들어가 앉아서, 옷을 갈아입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 질렀으며, 또한 1,000냥의 돈을 토색하였다. 그의 시어머니가 이러한 광경을 보고 정신을 잃어 미친 듯이 절을 하며 면하게 해줄 것을 빌었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잠시 꾸짖는 말을 하고 나자, 또 그 부인을 잡아다 옷에다 물을 적시고 등에 짊어지고 갔다. 그 남편이 다음날까지 찾으러 오라고 정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돈 수백 냥을 가지고 가서 겨우 풀려났다고 한다. 숙현 부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괴이하다.

같은 날 저녁 동학도 6명이 동야리(東也里)로 달려갔으며, 배웅천 집에 이르러 총을 한 방 쏘면서 대문을 열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문이 열리지 않자 담장을 넘어서 들어갔고, 배웅천을 찾았으나 그는 마침 친정에 다니러 온 딸을 데리고 대구에 갔었다. 배웅천의 처를 잡아서 그들이 모인 방안에 가두고, 빨리 배웅천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다. 나중에 들으니 배국언(裵國彦)을 잡으려 하였는데, 배웅천의 집에 잘못 들어갔다고 한다. 배웅천은 먼저 저들에게 돈 수백 냥을 주었으며, 나중에 그 처를 데리러 와야 했으므로 다시 150냥을 주고 풀려났다고 한다.

같은 날 깊은 밤이 지나 새벽닭이 울 무렵 시끄러운 소리가 큰길가에서 나는 것을 들었으므로 알아보니 동도(東徒) 15명 중에 4명은 말을 타고 대마로(大馬路)에서 내려오는데, 횃불 10여 자루를 잡고 풍물패의 기물을 두드리며 길을 비키라는 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갔다. 원래 있던 도당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합하니, 모두 40명 내외였다고 한다.
영기(令旗)를 앞세워 동을 순회할 때에 승발(承發) 배태만(裵泰晩)이 영기를 보고, 동학도들이 하는 짓에 분노하여 영지(令紙)를 찢으면서 욕을 하였다. 조금 있다가 동학도들이 그를 잡아서 일제히 때리며 죽이려 하였다. 수령이 이를 듣고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옥을 지키는 사령에게 분부하여 배태만을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엄하게 위엄을 보이고 그가 영지를 찢어 손상시킨 죄목을 들어 곤장 10여 도를 쳤다. 배태만은 이로써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억울해하면서 길에서 통곡하고, 다시 동학도들이 모인 집으로 가서, 문밖에서 그 우두머리 다섯을 엿보니, 예전에 노름판에서 잘 알고 지내던 상주에 사는 서리 신가(申姓吏)와 김천(金泉)에 사는 조춘삼(曹春三)과 구가(具哥)였다. 곧바로 그의 자호(字號)를 크게 부르면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야, 너는 너희 무리의 두목이면서 나를 이렇게 욕을 보게 만들었느냐?” 소리지르기를 그치지 않자, 두목이란 자가 배태만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너를 알기 때문에 네가 목숨을 보전한 것이다. 만일 네가 아니었더라면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술잔과 술을 내어 마시고 달래서 보냈다고 한다.

이날 진주에 새로이 부임한 영장이 읍을 두루 다니면서 동학도들이 끝이 없음을 들었고, 하인을 시켜서 뒤에 떨어져서 오게 하고, 혼자 가마를 타고 자취를 감추고 지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듣기를 배태만이 맞아서 드러누웠으며, 조춘삼이란 자가 직접 와서 위문하고 갔다고 한다.
무릇 이들 무리들은 떠돌아다니며 노름하거나 도살하고 술을 파는 천한 것들이다. 그 무리들이 현재 모인 것은 40명에 불과한데, 먼저 소리를 내어 퍼뜨리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다만 도망갈 길을 마련하려 할 뿐이다. 오늘날 한 읍에서 밥술이나마 먹는 자들은 몸을 숨기려 하지 않은 자가 없다. 공청(公廳)의 벼슬아치들 또한 피신하여 숨었고, 수령은 또한 이끌 방책이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저들 무리들이 결가를 줄인다, 호포를 줄인다고 하는 것은 다만 겉으로 드러내어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계책이다. 감해 주고 감해 주지 않는 단서를 그들이 어찌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핑계이고 실제는 조금 잘 사는 사람에게 돈과 재물을 토색하고, 또한 그들 무리들이 작은 원망과 개인적인 불만을 갚으려는 것이다. 그들 무리들이 조금 잘 사는 사람을 잡아 온 것에 대해서는 딱히 말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그들은 나라의 관리가 아닌데 어찌 감히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가? 부자라고 반드시 죄가 있는 것은 아니며, 가난한 자라고 반드시 모두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니, 어찌 부자들의 죄는 다스리고, 가난한 자들의 죄는 다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또한 진실로 죄가 있다면, 그 죄를 적발하여 관아에 알려서 악을 징계할 것을 청해야 함이 옳다. 이제 사사로이 잡아들이는 것은 끝내 돈을 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날 순사가 경상감영에 도임한 초기에 내린 관문(關文)의 내용을 보았는데, 그 중에 이르기를, “잘 사는 집에서 불효하고 화목하지 않은 자가 나오는 경우도 많고, 착한 사람이 갑자기 추잡한 행실을 하기도 한다”고 한 것은 오늘날의 실정을 형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그들 무리들이 죄목으로 들어서 열거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효제(孝悌)나 추행(醜行) 등의 일로써 말한 것은 아니다. 대개 이는 우연한 과실과 뜻밖의 실수가 자그만한 미움을 비집고 나왔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조금이나마 밥술이라도 먹는 자들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감영에서는 그들을 깨우쳐 알아듣게 하지 않고, 서리와 장교들은 팔짱끼고 앉아서 쳐다보고만 있으니, 마을의 백성들은 분함을 참으면서 지붕만 쳐다볼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을 그만 두지 않는다면, 저들은 더욱더 의기양양해 할 것이며, 고을의 사정은 점점 더 다급해져 그러한 것이 끝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이는 어찌 우리 고을 한 읍만의 근심이겠는가? 그 또한 온 도와 온 나라의 큰 근심이다.
다만 인근의 여러 읍에서 전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고을과 마을을 가리지 않고 이 무리들이 한번 지나가면, 무리들이 날로 번성한다. 대부분 자원하여서 무리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재해를 당해 굶주린 사람들과 도둑같은 무뢰배들까지 따라서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심지어 대대로 향리의 역을 맡은 자들이나, 이름이 나고 크게 번창한 집안 또한 그들의 엄청난 기세가 두려워 화를 면하기 위하여 종종 저들 무리에 이름을 올린다. 말이 이에 이르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오늘 이 고을의 이야기를 하자면, 모인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무리들의 수가 쉬지 않고 늘어났다. 저들이 수백, 수천에 이르는 큰 무리를 이루어 며칠 걸리지 않아 들어온다고 하는 것은 이로써 협박하고 사람들을 누르려는 말이다.

동학(東學) 두 글자는 비록 사악한 술수이지만, 이미 ‘학(學)’ 한 자를 칭하고 있고 또 ‘도(道)’ 한 자를 칭하고 있다. 학(學)이라 하고 도(道)라 하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가? 저들의 학은 본래의 무리 중에 반드시 거칠게나마 문자를 알고, 조금은 일의 사리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지금 이들 무리는 다만 동학의 이름을 빌려서 집을 부수고 겁탈하여 재물을 가로채고 사람을 속이는 한 무리의 화적떼이니, 우리 유학의 도를 해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저들 학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나의 얕은 생각으로는 순영문감영에서 특별히 명을 내려서 말의 뜻을 밝혀야 한다.
비장(裨將) 중에서 평판이 좋고 사리를 잘 알고 말을 잘하며 모범적인 자를 한두 명 보내어 명령을 내려 저들 무리를 밝게 깨우쳐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미 ‘백성과 읍을 돕고 죄악을 다스린다’라고 주장하였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폐단 가운데 고칠 수 있는 것은 지금 조정에서 따로 의안을 내려서 확정하여 보고하였으며, 또한 순영문에서는 이제 차례로 조사하여 결가와 호포의 같은 것은 양을 줄여주고 나중에 임금에게 보고하여 바로잡을 생각이다. 또 수령들 중에 탐오한 자와 토호 가운데 힘으로 눌러 제멋대로 하는 자는 순영문에서 또 철저하게 살피기는 했으나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너희들이 만일 여러 가지 원망을 모아 순영문에 고할 일이지, 처벌하고 다스려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어찌 너희들 마음대로 행하고 다스리고자 하는가? 만일 폐단을 고치는 것을 너희들이 스스로 맡는다고 하면, 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은 과연 헛된 직함이란 말이냐? 이와 같은 흉년에 너희들이 많은 무리를 모았으나 오히려 아침저녁으로 굶는 것에 군색하여 고민하지 않았더냐? 너희들이 부유한 자를 잡아서 돈과 재산을 토색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흩어져 돌아가서 순영문의 조치를 기다리라. 그렇지 않으면 왕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 저들 또한 사람이라, 어찌 두려워서 영을 받들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밝혀서 깨닫게 한 뒤에도 만일 또 멈추지 않으면, 저들 40명은 화적떼일 뿐이니 모조리 죽여서 없애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이는 순상(巡相)께서 호령 한마디 하는 것에 달려 있으니, 전날에 감영의 관문 가운데 “생각이 다른 그릇된 무리와 어찌 좋은 관계를 기대하겠느냐”라고 한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무리들이 작은 일이 큰 화가 되어 쉽게 제압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될지 어찌 알겠는가?

한나라 때의 두미적(斗米賊)이나, 송나라 때의 수박도(水泊徒) 명나라 때의 백련교(白蓮敎), 수향교(帥香敎) 틈왕(闖王)도 처음에는 이와 같은 무리였으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이와 같은 병폐(病廢)를 돌아보고, 지금의 상황을 눈으로 보고서, 어리석은 자의 분함을 참지 못한 가운데 관청의 판결(棠陰)을 헤아리지 않고 감영 아래에 나아가 글을 써서 진정하니, 혹 이러한 뜻을 군막에 호소하거나 영방(令房)에 간언하고 처분이 어떠한지 기다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26일 [二十六日]

비가 오다가 그쳤다가 했다. 오후에 동학도들이 아래 무리[성찰(省察)이라고 한다]들 4~5패를 각처에 보내어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첫째 패는 본동에 도착하여 이원집(李元集)의 노친을 잡아들여, 등 쪽으로 잘 묶어 위협하여 먼저 차사(差使)의 예로 수십 냥을 받은 후에 곧바로 잡아 갔다.
둘째 패는 또한 본동에 도착하여 이성삼(李聖三)을 수색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내외가 모두 도망해서 그의 비부 한 놈을 잡아서 갔다.
셋째 패는 서문 밖으로 가서 이백원(李伯元)을 수색하여 잡으려 하였는데 또한 피하고 자리에 없어서 그의 여종 하나를 잡아갔다.
넷째 패는 헌풍리(獻風里)에 가서 상인 김사일(金士一)을 수색하여 잡으려 하였는데 역시 피하여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섯째 패는 봉산(鳳山)으로 가서 이항수(李頂壽)의 형을 수색하여 잡았다고 한다.

동학도가 어제 관아에 들어왔을 때에 건물 마루에 올라서 문밖을 보려 하자, 사또가 바깥방으로 불러들여서 서로 도인이라 높여 칭함이 매우 공손하였다. 오늘 또 술과 고기로 접대하려고 하며, 이방의 동생을 불러서 200냥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읍에 돈을 분담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고 돈을 꾸려고 구해도 얻지 못해서 사방으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동도(東徒)들이 읍에 들어오기 전에 작촌(鵲村)에 사는 강진사가 성현(星峴)에서 잡혀 300냥을 주고 간신히 빠져나왔다는데, 전하는 말로는 강진사도 동도인데 당파가 달라서 이와 같이 곤욕을 치렀으며, 강진사 말로는 이들 무리들은 모두 인동에서 금을 캐던 무리들이라고 한다. 강약이 같지 않아서 비록 때리고 욕을 당하였으나, 동학진당(東學眞黨)이 지금 호서에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황을 문서로 만들어 호서에 알렸으니, 며칠 사이에 반드시 소식이 올 것이라고 한다.

같은 날 저녁 동학도들은 사창 앞에는 배운겸(裵雲兼)을, 객사 뒤에는 이성묵(李聖默)의 아들을 잡아갔다. 또 본동에 도착하여 이정수(李頂壽)를 수색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내외가 모두 피하여 대신에 그의 빙모를 잡아서 찾아내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성삼(李聖三)의 비부가 증언하여 잡은 이성삼의 누이는 야동(冶洞) 신서방(愼書房)의 처라고 한다. 이 외에 읍촌 간에 수색하여 잡힌 자는 자세히 듣지 못하여 모두 기록하지 못하였다.
같은 날 저녁이 지나고, 관속과 읍내에 사는 나무꾼(樵人)과 머슴이 송대(松臺)에 모여 곧바로 일제히 용감하게 달려가서 동도(東徒) 18명을 때려 죽였다고 한다.

28일 [二十八日]

28일 이른 아침에 나는 장청(將廳)에 갔다 왔다. 수임(首任)이 말하기를, “밤사이의 일은 비록 상쾌하지만, 감영에 보고하는 말에, 만일 혹시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오히려 망칠 염려가 있으니, 보고서를 만들 때에 수형리(首刑吏)과 상의하여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금 있다가 형리인 동료 2명이 나와서 초고를 만들기를 억지로 간청하였으므로, 나는 부득이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 내용에, “첩보하는 일입니다. 본주에 동도들이 모여든 일은 연속하여 빨리 보고하였거니와, 어제는 본읍의 장날이었습니다. 소위 동도들이 점차 무리를 더해가서 합친 것이 거의 100여 명으로 시장 변에 있는 문용운(文龍云)이라는 자의 집에 모였습니다. 읍촌의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가 결박하여 주리를 틀고 무수히 구타를 하여 많은 사람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 몇 가지 죄목은 모두 별것 아니거나 애매한 일이었으며 약간의 원한이 있거나 개인적인 혐오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단지 수백 수천의 돈과 재물이며, 잡으려던 사람이 만일 피신하였으면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처가 쪽 친척을 잡아다 핍박하고 욕을 보인 것이 비할 바가 없었습니다. 읍촌에서 잡혀서 욕을 당한 사람들은 우선 들은 자만해도 30명을 헤아립니다.
그들 무리들이 하는 짓은 백주에 나다니는 화적떼였습니다. 읍속배들은 그들이 흉악한 것을 두려워하여 처음에는 숨었다가, 그들이 토색질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것을 보고 서리와 장교 및 감옥사령은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분함을 느끼고 어제 어두워질 무렵 무리를 지어 성밖 송대(松坮) 근처에서 모여서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초군과 머슴들도 또한 차례로 모인 자가 거의 100 이나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허장성세하여 저들이 몰래 도망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저들 무리들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 각기 무기를 잡고 한편으로 관문으로 난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군영과 읍의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한편으로는 군기고를 깨뜨려 마음대로 총칼과 탄약 등의 물건들을 꺼내어서 맞서 싸우려 하였으므로, 목사는 수교들을 불러서 나팔을 불고 포를 쏘며 북을 치게 하였습니다. 읍속배들이 창이나 봉을 들고 일제히 용감하게 나아갔습니다. 동문 밖까지 쫓아가서 몇 명을 쳐서 죽이자, 저들 무리들은 이에 겁이 나서 머리를 싸매고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읍군은 곧 접주인 문용운과 서달용(徐達龍)의 집에 불을 놓아 도망하여 숨은 자 몇 명을 찾아내어, 또한 때려 죽였고 홍기 2장, 환도 2자루, 징과 북 몇 개 등을 빼앗았습니다. 군기고에서 약탈하여 갔던 기물들을 거의 다시 찾았다고 들어와 보고하였습니다.
날이 밝고 나서 점검하여 보니, 죽은 자의 시체가 모두 18명이었고 남은 무리들은 모두 검은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로 혼잡한 가운데 몸을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대개 이들 흉도들은 차례로 찾아내었으니, 김천에 살거나 혹은 부상(扶桑)에 사는 자로서 모두 근처의 읍에서 놀음하고 떠돌아다니는 파락호들이었습니다. 이들 무리들이 읍에 들어온 것은 한 무리는 지례(知禮) 방면에서, 한 무리는 김산 방면에서 왔으며, 그들이 거쳐 간 마을마다 한없이 못된 행패를 부렸습니다.

양반과 상놈을 물론하고 모두가 곤욕을 치르는 것에 겁을 먹어 부득이 이름을 걸어 놓고 무리에 들어간 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장날에도 동학에 이름을 걸어 놓은 자가 와서 동정을 살피다가 형세를 보고는 발을 빼고 먼저 도망한 자가 또한 많이 있었으므로, 풍문에 따르면, ‘저들 무리들 중 뒤에 떨어진 무리들이 읍에서 서북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읍군들이 뒤탈이 날까 염려하여 곧바로 흩어지지 않고 밤이 되도록 관문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관에서도 또 몰래 살피게 하였습니다. 이들 무리들이 읍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들 무리 중 6~7명이 쓰러지듯 관에 들어와서 결역(結役)과 호포(戶布)를 줄여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나운 칼끝을 피하기 위하여 우선 그들이 청한 것에 따라 명령을 내리는 글을 만들어 주었고,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시장 주변에 모두 모인 후에 또 술과 고기를 내어 주겠다는 뜻으로 말을 전달하자, 저들 무리들이 안심하여 염려하지 않고 방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갑자기 뜻하지 않게 그들 무리들을 죽여서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읍군은 한 명도 다친 자가 없었으니 매우 통쾌하고 다행스러웠습니다. 관에서는 지금 바야흐로 소를 잡고 술을 마련하여 읍군들에게 주어서 위로하였으며, 접주인 문용운과 서달용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은 몰래 무리를 짓고, 달래고 부추겨서 시킨 죄가 있어서였습니다. 18명의 시체와 머리는 원래 거주하는 곳과 이름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한 곳에 들어다 놓고 시체의 주인이 찾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먼저 빨리 보고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가까운 읍으로 말하자면 저자 도한기(都漢基)는 성주의 아전인데 ‘가까운 읍으로 말하자면’은 성주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전석(銓席) 이조판서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고과(考課)를 맡은 벼슬아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사는 수령의 성적을 등급을 매겨 반영하는데 그 실무담당자인 듯하다. 의서(擬書)는 보내려고 써 놓았다가 사정으로 미쳐 보내지 못한 글이나 편지를 뜻한다.
징각(澄閣) 징청각(澄淸閣)을 가리킨다. 징청각은 경상감영(慶尙監營)에서 관찰사(觀察使)의 관사(官舍)로 쓰던 건물인데, 여기에서는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의 별칭으로 쓰인 듯하다.
영기(令旗) 병조(兵曹)에서 제정하여 진중(陣中)에서 군령(軍令)을 전할 때 쓰던 것으로, 청색 삼각기에 붉은빛의 ‘영(令)’자를 붙이거나, 적색(赤色) 사각기에 검은색의 ‘영(令)’자를 붙인 것이 있다.
승발(承發) 지방 관아의 구실아치 밑에서 잡무(雜務)를 맡아보던 사람을 말한다.
두미적(斗米賊) 중국 후한(後漢) 말에 장릉(張陵)이 쓰촨[四川] 지방에서 창시한 종교인 오두미도(五斗米道)를 가리킨다.
수박도(水泊徒) 북송(北宋) 말엽 산둥성[山東省] 지닝[濟寧]의 황허강[黃河] 하류의 양산박(梁山泊)에 조개(晁開)·송강(宋江)이 호걸들을 모아 봉기하였는데, 명(明)나라의 작가 시내암(施耐庵)은 이를 주제로 『수호지(水滸誌)』를 지었다.
백련교(白蓮敎) 송(宋)·원(元)·명(明)나라에 걸쳐 성행하였던 신흥종교.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백련교와 관계가 깊었다.
수향교(帥香敎) 명나라때 반란을 도모한 불교도의 한 무리. 조선후기에는 비밀결사인 향도계가 유행했다.
차사(差使) 고을 원이 죄인을 잡으려고 내보내던 관아의 하인을 가르킨다.
동학진당(東學眞黨) 동학진당은 북접의 도주 최시형을 따르는 세력을 말한다. 폭력적 대결을 벌이는 전봉준 등을 위당(僞黨)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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